한번 더 생각하는 역사 [2021/12] 장진호전투와 흥남철수의 영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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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척 선박 통해 약 10만 명의 생명 구출
크리스마스 이브, 마지막 배가 도착하다
글 | 김학준(단국대학교 석좌교수)
흥남항 부두에는 수많은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은 피난민을 동승시키는 것을 꺼렸다. 1군단장 김백일 장군 등 한국군 지휘관들이 “피난민을 버리고 가느니 차라리 우리가 걸어서 후퇴하겠다”라며 맞섰다.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의 통역이었던 20세의 현봉학과 해군 군수참모 에드워드 포니 대령 등이 알몬드 사령관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이들의 노력이 합쳐져 마침내 사령관은 피난민을 태우기로 결정했다. 결국 193척의 선박을 통해 약 10만 명의 피난민이 12월 19일부터 24일까지 무사히 피난할 수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다섯 명의 새 생명이 태어났다.
이러한 변화 또는 발전을 가져오게 한 주인공은 바로 우리 국민이다. 그 점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정권이 1950년 6월 25일에 일으킨 전쟁 때 자신을 희생하면서 나라를 지킨 호국영령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러한 생각 속에 12월을 떠올리면 서로 연결되는 장진호전투와 흥남철수를 잊을 수 없다.
세계 역사에서 가장 추웠던 전투
6·25전쟁이 일어난 때로부터 5개월이 지난 11월 27일 밤, 함경남도 장진군의 장진호 일대에 배치되어 있던 미 10군단 산하 제1해병사단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은 인해전술로 밀려내려온 중공군 3개 군단 병력의 전면적 기습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유엔군 병력은 한국 육군 통역 110명과 전투경찰 1개 중대를 포함해 3만 명으로, 중공군 12만 명의 25%에 지나지 않았다. 현대전에서 중공군과 미군 사이의 최초의 전투로 평가되는 이 전투에서 유엔군의 실제 숫자를 3만 명이 아니라 2만 명으로 계산하는 어떤 전쟁사 연구자들은 유엔군 2만 명이 중공군 12만 명을 상대한 1대 6의 전투였다고 말한다.

전후좌우로 완전히 포위된 유엔군은 깊은 산에 둘러싸인 험난한 지형 속에서 샛길을 찾아 매우 어렵게 후퇴를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고, 1만 7천여 명의 사상자를 기록한 채 12월 11일에 겨우 흥남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것은 미국 역사학자들의 표현으로 미국 전쟁사에서 가장 긴 기간의 후퇴였다.
“이 배를 타지 못하면 죽는다”
이때 함경남도의 도청 소재지 함흥 그리고 함경남도의 제2 도시이면서 가장 큰 항구인 흥남 일대를 제외한 함경도 전체는 이미 중공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게다가 12월 9일에는, 지난날에는 함경남도에 속했으나 북한정권이 출범한 뒤 강원도로 편입된 원산도 중공군에 의해 점령됐다. 이제 함경도 일대에 배치된 병력과 피난민이 남쪽으로 내려갈 방법은 흥남항에서 배로 철수하는 것이 유일했다. 유엔군사령부는 동해에 배치된 미 해군의 함포사격의 지원을 받으며 한국군을 포함한 유엔군의 철수를 준비했다.
흥남항 부두에는 수많은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소설가 김동리가 쓴 소설 『흥남철수』의 표현으로, “그들은 모두 이 배를 타지 못하면 그대로 죽는 것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절박한 심정으로 배를 타려고 글자 그대로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은 피난민을 동승시키는 것을 꺼렸다. 그들을 태우기 위해 시간을 늦추게 되면 중공군의 접근과 공격으로 미군의 희생이 늘어나게 되고 또 피난민 사이에 스파이가 끼어드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게다가 실어야 할 병력과 장비가 많은데, 피난민을 태우면 그만큼 그것들을 줄여야 하는 부담이 뒤따르기 때문이었다.
1군단장 김백일 장군 등 한국군 지휘관들이 나섰다. 그들은 “피난민을 버리고 가느니 차라리 우리가 걸어서 후퇴하겠다”라며 맞섰다. 미 10군단 사령관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의 통역이었던 20세의 현봉학 그리고 해군 군수참모로 상륙을 담당하는 에드워드 포니 대령 등이 알몬드 사령관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이들의 노력이 합쳐져 마침내 사령관은 피난민을 태우기로 결정했다. 결국 미군 LST함을 비롯해 상선 등 모두 193척의 선박을 통해 약 10만 명의 피난민이 12월 19일부터 24일까지 거제도 장승포항으로 무사히 피난할 수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다섯 명의 새 생명이 태어났다. 마지막 배가 장승포항에 도착한 때는 바로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그들을 태운 선박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1만 4천여 명을 태운 메러디스 빅토리아호로, 선장은 러나드 라루였다. 그는 자신의 이 경험을 통해 ‘소중한 생명의 가치’를 새삼 깨달아 전쟁 이후 천주교 수도회인 베네딕토회에 입회해 수도자가 됐고, ‘마리너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베네딕토 수도원이 2000년경 경영난으로 폐쇄된다는 소식을 접한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의 성(聖) 베넥딕토회 수도원에서 지원해 복구했다. 한국 쪽에서 흥남철수 때 진 큰 빚의 일부라도 갚은, 가슴 훈훈하게 만든 선행이었다.
피난민을 살려낸 ‘쉰들러들’
숭고한 인류애에 경의를 표하다

다른 한편으로, 대한민국과 그 국민을 위해 헌신한 국군을 포함한 유엔군 전투원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게 된다. 피난민들은 놀라움을 보여주었다. 그들이야말로 자신들이 겪은 공산통치가 얼마나 비인도적이며 폭압적인가를 절실하게 깨달았기에 목숨을 걸고 자유를 선택했으며, 생면부지의 피난처에서 억센 생활력으로 새 삶을 개척했다. 거기에 상징된 한국민의 생활력이 대한민국의 발전의 밑거름이 된 것이다.
현봉학 통역은 훗날 미국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고 의사로서 구휼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한국의 쉰들러’로 불리고 있는 그의 숭고한 동포애에 새삼 경의를 표한다.

1943년 중국 심양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켄트주립대와 피츠버그대에서 정치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단국대학교 이사장, 인천대학교 총장, 동아일보사 사장·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단국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