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시론 [2021/12] 중공군 인해전술에 막힌 장진호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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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박한 순간 기적을 만들어낸 인도주의의 승리
“반드시 피란민 전원을 구출하라”
글 | 권용우(단국대학교 명예교수)
흥남부두에서의 철수작전은 참으로 급박하였다. 이때 미군 제10군단 군단장 앨몬드 장군은 “병력과 군수물자만을 싣고 철수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피란민 10만여 명을 남겨둔 채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김백일 장군은 “UN군이 피란민을 이곳에 버리고 철수한다면 우리는 육로라도 그들을 후퇴시키겠다”고 항의했다. 민간인 보좌관 현봉학(玄鳳學)도 “이대로 철수하면 저 사람들은 다 죽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한참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반드시 피란민 전원을 구출하라.” 앨몬드 장군의 이 한 마디로 35만여 톤의 군수물자를 바다에 버렸다. 참으로 귀한 결정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이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우고 38선 전역에 걸쳐 일제히 공격을 개시함으로써 시작된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 우리 국군은 전쟁이 발발한 지 불과 3일만에 수도 서울을 적군에게 점령당하고, 채 두 달도 되지 않아 낙동강까지 밀려나고 말았다.
포성에 놀라 단잠에서 깨어난 시민들도 짐을 꾸리고 피란길에 올랐다. 정처 없이 그저 남으로, 남으로 피란길이 이어졌다. 더러는 맨몸인 채로, 더러는 보리쌀 두어 되를 등에 메고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그 길을 떠나야 했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야 했다. 부모 잃은 아이들의 울부짖음, 총탄에 상처를 입고 피흘리는 사람들의 신음소리, 짐보따리를 잃어버린 아낙네의 넋나간 모습, 칭얼대는 갓난아이를 달래는 어머니의 굳은 표정들이 뒤엉켜 있는 피란길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인해전술 중공군에 포위된 상태
흥남항에서 철수 계획을 세우다
정부는 수도 서울을 적군에게 넘겨주고 대전으로, 대전에서 대구로, 대구에서 부산으로 옮겨가야만 했다. 이러는 사이에 UN군 사령부가 창설되고, 미국을 비롯한 16개 우방국들이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반격의 기회를 맞기도 하였다.

10월 10일 국군 제1군단(金白一 소장)이 원산을 점령하였으며, 이어서 미군 제10군단(Edward N. Almond 중장)이 동부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뒤이어 미군 제7사단 제17연대가 장진호 북동쪽에 위치한 갑산에 도착하였다. 이때 미군 제10군단 예하 제1해병사단이 장진호 북쪽으로 진출해 있었다. 올리버 스미스(Oliver P. Smith) 사단장은 장진호 서쪽 능선을 따라 조심스럽게 부대를 이동시켰다. 태백산맥의 협곡은 눈과 얼음으로 쌓여있어서 부대의 이동이 쉽지 않았다.
11월 27일, 중공군 제9병단 예하 7개 사단 병력 12만 명이 몰려와 포위망을 형성하고 전면전을 개시함으로써 12월 11일까지 2주간의 전투가 계속되었다. 중공군은 수적인 우위를 이용하여 인해전술을 펼쳤다. 전황은 혹한의 날씨에 국군과 미군이 중공군에 협공된 상태에서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전세가 불리해진 국군과 미군은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중공군이 투입한 대규모의 병력에 포위된 상태에서 마지막 수단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흥남항이었다. 이때 국군 제1군단과 미군 제10군단의 장병 10만 500여 명, 차량 1만 7,500여 대, 보급품과 장비 35만여 톤 등을 해상을 통하여 철수해야 하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때 남쪽으로 떠나는 피란민 1만여 명이 몰려들었다.
자유를 갈망하는 피란민을 구출하다

그로부터 한참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반드시 피란민 전원을 구출하라.” 앨몬드 장군의 이 한 마디로 35만여 톤의 군수물자를 바다에 버리고 피난민들을 태우게 했다. 참으로 귀한 결정이었다. 중공군이 6km 앞까지 들이닥친 절박한 상황이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자유를 갈망하는 피란민을 차마 버릴 수 없었다. 추위에 발을 동동 굴리며 서있던 피란민들이 화물선에 올랐다. 화물선의 그물을 잡고 기어오르는 사람도 있었다. 어디 그뿐이었던가. 먼저 올라탄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포대기 끈으로 끌어올렸다. 참으로 절박한 순간이었다. 인도주의의 승리였다. 인간승리였다.
12월 19일 피난민을 철수시키기 시작하여 12월 24일 7시 30분, 7,600톤급 화물선 메러더스 빅토리호(Meredith Victory)가 마지막으로 화물 대신 1만 4,000명의 피란민을 태우고 흥남항을 떠났다. 이때 선장(船長)은 프랑스계 미국인 레너드 라뤼(Leonard LaRue)였다.
이렇게 흥남항을 떠난 메러더스 빅토리호는 800km의 바닷길을 헤쳐 12월 27일 오후 경상남도 거제도(巨濟島) 장승포항(長承浦港)에 입항함으로써 숨막히는 긴 여정(旅程)의 막이 내려졌다. 이로써 12월 19일부터 시작된 피란민 철수작전은 숨가쁘게 끝이 났다. 이렇게 해서 9만 8,000여 명의 피란민이 부산과 거제도에서 새 삶을 시작하였다.
흥남철수의 시작은 이러하였다. 1950년 10월 25일, 중공군이 6·25전쟁에 참전함으로써 전세(戰勢)가 불리해지자, 1950년 12월 15일 앨몬드 장군이 이끄는 미군 제10군단과 김백일 장군의 국군 제1군단이 해상을 통한 전략적(戰略的) 철수를 하면서 피란민을 수송하는 작전이 개시되었다. 이것이 흥남철수의 시작이었다.
끝없는 피란민들의 행렬
긴박했던 그때를 생각하다
급박했던 흥남철수를 생각할 때면, 필자는 2015년 연초부터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영화 <국제시장>(감독 윤재균)을 떠올린다. 중공군의 공격을 피해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떠나려는 피란민들의 행렬은 온통 흥남항의 부두를 가득 메웠다. 손에 손을 잡고 이어지는 피란민들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갓난아기를 등에 업고, 피란봇짐을 머리에 이고 몰려드는 피란민의 수가 10만 명을 넘었다고 하니, 부두에 발 디딜 틈이나 있었겠는가. 밀고 밀리고, 넘어지고 밟히고……. 영하 35도를 넘는 칼바람이 불었다.
흥남부두의 긴박했던 그때를 생각하면, 전쟁가요 「굳세어라 금순아」(노래 : 현인)가 떠오른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 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를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드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1·4 이후 나홀로 왔다”

단국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 국립 Herzen 교육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단국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학생처장ㆍ법과대학장ㆍ산업노사대학원장ㆍ행정법무대학원장ㆍ부총장ㆍ총장 직무대행 등의 보직을 수행하였다. 전공분야는 민법이며, 그중에서 특히 불법행위법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을 하였다. 정년 이후에는 정심서실(正心書室)을 열고, 정심법학(正心法學) 포럼 대표를 맡아서 회원들과 법학관련 학술활동을 계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