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독립운동가 [2021/12] 독립운동의 정신적 구심점, 민족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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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식민사관에 대항해 ‘국혼(國魂)’ 지켜내
한민족의 주체적 역사 바로 세우며
근대 역사학의 토대 마련
글 | 편집부
오늘까지 이어진 ‘역사 왜곡’의 뿌리는 일제강점기 식민사관에 기인한다.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는 조선사를 새로 펴내며 고구려 이전 4천 년 상고시대 역사를 신화로 치부, 한국 역사를 2천 년으로 왜곡해 식민통치의 고착화를 시도했다. 식민사관 추종 역사학자들은 “한국에는 독자적인 청동기시대가 없었고, 단기간의 금석병용기가 있었다”고 주장하며 일제 식민사관에 동조했다. 이에 박은식과 신채호를 중심으로 일제의 식민사관을 비판하고 우리 민족의 정신과 전통을 바탕으로 주체적인 역사를 세우고자 민족주의 사학이 태동했다.
19세기 말 신채호, 박은식 등에 의해 형성되기 시작한 민족주의 사학은 1920년대에 이르러 본격적인 근대 역사학의 토대를 마련했다. 일제의 역사 왜곡에 대항해 한국사의 기원을 밝히고, 우리 문화의 우수성과 한국사의 주체적 발전을 강조하는 연구 활동을 전개했다. 박은식과 신채호에 이어 정인보, 문일평, 안재홍 등이 연구했다.
민족주의 사학은 역사연구를 민족해방운동의 한 부분으로 생각했다. 박은식과 신채호가 만주나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역사를 연구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들은 비록 나라를 빼앗겼지만 한민족의 정신을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는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박은식 “민족의 흥망은 국혼에 있어”

박은식은 1898년 9월 장지연이 창간한 황성신문의 주필을 맡아 민중계몽에 나섰고, 만민공동회와 더불어 반봉건·반침략 투쟁을 벌이던 독립협회에도 가입했다. 성균관의 후신인 경학원 강사와 한성사범학교 교관을 지내면서 교육개혁에 관한 글을 집필했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1911년 만주로 망명해 해외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대동교를 창건하고 신한혁명당을 조직해 항일활동을 전개했으며, 상해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냈다. 특히 『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 『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 『안중근전』 『한국통사(韓國痛史)』 등을 펴내 나라 잃은 슬픔을 역사연구를 통해 승화시키려 노력했다. 이후 191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3·1운동을 맞이하자 독립에 대한 확신을 갖고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하기 시작, 이듬해 간행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신채호 “역사는 애국심의 원천”

1910년 중국 망명 후에는 러시아와 중국에 있던 한민족을 계몽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신채호는 백두산 등정 및 광개토대왕릉 답사 등 만주 지역의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지를 돌아보며 부여, 고구려, 발해 중심의 한국 고대사를 정리했다. 이후 1910년대 후반부터 1920년대 중반까지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를 집필했다.
『조선상고문화사』는 한국 상고사를 담은 책으로 한반도와 만주 지역을 넘어 중국대륙의 일부까지 우리 역사로 인식하고 있다. 『조선상고사』에서는 ‘역사라는 것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라는 명제를 내걸어 민족사관을 수립, 한국 근대사학의 기초를 확립했다. 『조선사연구초』는 이두문의 해석, 고려와 조선이 사대주의로 전락한 원인 등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고찰한 6편의 논문이 담겨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됐다.
정인보·안재홍·문일평
신민족주의 사학으로 진화

그는 연희전문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등에서 국학 및 동양사를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 얼을 환기시키는 한편 동아일보, 시대일보의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며 민족사관 정립에 심혈을 기울였다. 1926년 동아일보에 고전을 소개하는 ‘조선고전해제’를 비롯해 ‘단군 개천’, ‘5천 년간의 조선의 얼’을 연재했다. 광복 후에는 바른 국사(國史)를 알리고자 국학대학을 세우고, 1946년 9월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를 간행했다. 정인보의 역사의식은 독립투쟁의 방도로서 민족사 연구를 지향하던 신채호의 민족사학과 달리, 엄밀한 사료적 추적에 의한 사실 인식과 그에 대한 민족사적 의미의 부각을 의도하는 신민족주의 사학에 기반하고 있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안재홍은 1923년 시대일보 창간에 참여해 이사와 논설위원을 지내고, 조선일보사 사장 겸 주필로 10년간 재직했다. 물산장려회 이사를 겸임하며 국산품 장려운동을 벌였다. 신간회 총무로 활약하다 투옥되어 8개월 후 풀려났고, 1936년 임시정부와의 내통이 발각되어 2년간 복역하고,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다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문일평은 1933년부터 조선일보 편집고문직을 맡아 언론을 통한 역사의 대중화에 힘을 기울였다. 그의 역사연구는 역사학자적 연구인 역사 사실의 기초적 연구보다는 우리나라 역사 가운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고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문일평은 당시 사학의 주류인 민족의식·민족정신 고취를 핵심으로 조선 정신인 ‘조선심(朝鮮心)’을 강조했다. 조선심은 추상적인 관념론을 벗어나 다분히 현실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 증명으로 조선심의 결정체로서 ‘한글’을 들었으며, 조선심은 세종대왕에 의해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실학사상도 강조했는데, ‘실사구시’ 정신을 자아의 재검토·재수립으로 정의했고, 이는 조선심의 재현이라고 보았다. 결국 조선심은 우리 역사의 구석구석에서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무지한 민중도 쉽게 지닐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저서로 『조선사화』 『호암전집』 『한국의 문화』 등이 있으며,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