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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2022/01] 하구 김시현의 삶과 의열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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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엔 항일투쟁, 광복 후엔 반독재투쟁에 투신


“나의 섭생은 오직 독립운동뿐이오”


글 | 권용우(단국대학교 명예교수)     


하구 김시현은 일제강점기에는 항일투쟁을, 광복 후에는 반독재투쟁에 온몸을 바쳤다. 그는 시대를 비켜가지 않고, 온몸으로 부딪치면서 오로지 조국을 위하여 일생을 살았다. 1922년 5월 상해로 돌아오면서 의열단에 가입하여, 행동에 나섰다. 하구는 1923년 초부터 상해에서 비밀리에 폭탄을 제조하는 일에 종사하였다. 이때 김재진·권동산과 함께 경기도 경찰부 경부로 있는 한국인 황옥의 도움을 받아 폭탄 18개를 서울로 반입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런데 김재진이 평양경찰서 경부 김덕기에게 매수됨으로써 서울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김시현 선생은 관객 750만 명을 동원한 영화 <밀정>에서 배우 공유가 연기한 의열단원 김우진의 모델이기도 하다. 


1966년 1월 3일, 이날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아온 하구(何求) 김시현(金始顯)이 세상을 떠났다. 이때가 83세였다. 
하구 김시현은 1883년 경상좌도 안동현(安東縣), 현재 안동시 풍산읍 현애동에서 태어나 집안에서 한학(漢學)을 공부하다가 1899년 4월 농상공부에서 관직생활을 하고 있는 숙부 김의동(金宜東)을 찾아가서 중교의숙에 입학하면서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27세가 되던 1911년에는 일본 유학길에 올라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전문부에 입학하여 법학을 공부하였다. 35세가 되던 1917년 귀국하였다.

청소년기에 안동에서 일어난 갑오·을미의병을 겪으면서 항일의식에 눈떠갔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그는 일제강점기에는 항일투쟁을, 광복 후에는 반독재투쟁에 온몸을 바쳤다. 그는 시대를 비켜가지 않고, 온몸으로 부딪치면서 오로지 조국을 위하여 일생을 살았다. 

하구는 3·1 독립운동에 뛰어들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일생을 바칠 각오를 다진 것으로 보인다. 1919년 5월, 중국 상해(上海)를 거쳐 만주(滿洲)에 정착하면서 김좌진(金佐鎭)과 만나 북로군정서의 조직에 앞장섰다.  

그런데 이 무렵 만주(滿洲)·북경(北京)·상해(上海)·연해주(沿海州) 등지에서는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일본에 강제로 병탄된 조국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펼치고 있었다. 그 첫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것으로 상해에서 이동녕(李東寧)·이동휘(李東輝)·안창호(安昌浩)·이시영(李始榮)·김규식(金奎植) 등이 중심이 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세계만방에 대한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비록 ‘임시’라는 두 글자를 붙이고 있었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우리 2천만 민족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구심점이었다. 그리고 1945년 8·15광복을 맞을 때까지 항일투쟁의 구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만주 류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는 이상룡(李相龍)·이회영(李會榮)·주진수(朱鎭洙)·김동삼(金東三) 등이 한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고, 항일무장투쟁기지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또 1919년 11월에는 만주 길림성(吉林省)에서 김원봉(金元鳳)·윤세주(尹世胄)·이성우(李成宇) ·곽재기(郭在驥)·강세우(姜世宇)·이종암(李鍾岩) 등이 항일무력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의열단이 창설되었다. 의열단은 창설 후 곧 근거지를 북경으로 옮기고 북경·상해에 흩어져 있는 급진적인 독립운동가들을 규합하였다. 그리고 의열단은 다량의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고, 서울에 잠입하여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군사시설·경찰서 등 일본의 주요기관과 중심인물을 척결할 계획을 세웠다. 그 결과, 1920년 3월 곽재기 등에 의한 조선총독부 파괴를 기도한 밀양폭탄투척사건, 같은 해 9월 박재혁(朴在赫)에 의한 부산경찰서 폭파사건, 같은 해 11월 최수봉(崔壽鳳)에 의한 밀양경찰서 폭탄투척사건, 1921년 9월 김익상(金益相)에 의한 조선총독부 폭탄투척사건, 1922년 3월 김익상·이종암 등에 의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암살저격사건, 1923년 1월 김상옥(金相玉)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 1926년 12월 28일 나석주(羅錫疇)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투척사건 등의 테러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처럼 자기의 목숨을 내던지고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는 의열단원들의 의거는 국내외의 뜻있는 인사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일본 정부에 큰 충격 던진
의열단의 무장투쟁

특히, 1924년 1월 5일 김지섭(金祉燮)의 일본 궁성(宮城) 니주바시(二重橋) 폭탄투척사건은 일본 정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일본은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경시총감 유아사 구리헤이(湯淺倉平)를 파면하였다. 
김지섭은 그해 10월 6일 도쿄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28년 2월 2일 지바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김지섭이 상해에서 일본 도쿄로 가면서 배 안에서 읊은 시가 필자의 가슴을 적신다. 

“표연히 이 한 몸 만리 길 떠날 때 / 배 안에 모두 원수이니 뉘라서 벗할 것인가 / 기구한 세상 앞길 촉나라보다 험난하고 / 분통한 겨레 마음 진나라인들 더할 소냐 / 오늘 몸 숨기고 바다 건너는 사람 / 지난 몇 해를 와신상담한 사람인가 / 이미 정한 이 걸음 평생의 뜻이기에 / 다시 고향 돌아갈 길 묻지 않는다.”

여기서, 잠시 하구 김시현과 김지섭의 관계를 보자. 하구가 태어나 성장한 곳인 풍산읍 현애리와 김지섭이 출생한 오미리는 이웃한 마을일 뿐만 아니라, 하구가 1년 연상이고 두 사람은 인척관계이다. 이러한 관계로 말미암아 의열단이란 한 울타리에서 동지로서 돈독한 인연을 이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김지섭이 폭탄투척사건 후 감옥에 있으면서도 서로 안부를 묻고 지냈던 것으로 전한다.

의열단이 급진적 운동을 선택한 것은 이 당시 각 독립운동단체가 너무 미온적인 것에 분개하여 급진적 독립운동을 표방하고 일본 관리를 암살하고 관청을 파과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1923년 1월, 신채호(申采浩)는 의열단 단장 김원봉의 요청에 의하여 민족해방운동론을 집약한 「조선혁명선언」(일명 「의열단선언」)을 발표하였는데, 이에는 테러적 행동을 민족해방운동의 방법론으로 제시하였다. 이 선언에 “…우리는 혁명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함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라고 쓰고 있다. 

이처럼 의열단은 우리나라를 병탄한 후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조선인을 억압하고 경제를 수탈하는 일본을 타도함으로써 2천만 민중이 억압에서 벗어나고,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상해에서 비밀리에 폭탄 제조
10년형 선도받고 고문에 시달려

하구 김시현은 1922년 5월 상해로 돌아오면서 의열단에 가입하여 행동에 나섰다. 하구는 1923년 초부터 상해에서 비밀리에 폭탄을 제조하는 일에 종사하였다. 

이때 하구는 3월 12일 김재진(金在震)·권동산(權東山)과 함께 경기도 경찰부 경부(警部)로 있는 한국인 황옥(黃鈺)의 도움을 받아 폭탄 18개를 서울로 반입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런데 김재진이 평양경찰서 경부 김덕기(金悳基)에게 매수됨으로써 하구는 서울에서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이로써 하구는 1924년 8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고문에 시달렸다. 

하구는 여러 차례 감형을 받고 1929년 1월 29일 형무소에서 풀려 나왔다. 가족들이 그에게 섭생(攝生)하면서 몸을 추스르라고 권면하였지만, “나의 섭생은 독립운동뿐이오”라는 짧은 한 마디를 남기고 조국을 되찾기 위하여 다시 긴 여정에 올랐다.   

필자  권용우 
단국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 국립 Herzen 교육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단국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학생처장ㆍ법과대학장ㆍ산업노사대학원장ㆍ행정법무대학원장ㆍ부총장ㆍ총장 직무대행 등의 보직을 수행하였다. 전공분야는 민법이며, 그중에서 특히 불법행위법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을 하였다. 정년 이후에는 정심서실(正心書室)을 열고, 정심법학(正心法學) 포럼 대표를 맡아서 회원들과 법학관련 학술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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