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 Focus

한번 더 생각하는 역사 [2022/01] 대한제국은 왜 멸망했나? 8┃고종은 과연 계몽군주인가?

페이지 정보

본문

망국군주와 그 곁을 지킨 여덟 가지 간신


왕정시대의 망국은 군주의 책임이다


글 | 신복룡(전 건국대학교 석좌교수) 


역사적으로 망국의 군주가 영명했던 사례는 없다. 바꾸어 말하면 군주가 영명한데 나라가 멸망한 사례가 왕정 체제에서는 없었다. 지도자가 영명하고 백성이 그를 우러러보며 열심히 일하는데, 멀쩡하던 나라가 왜 멸망하는가? 문제는 사람이었고, 특히 지도자였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어차피 권력의 주변에는 ‘영혼의 노숙자’(spiritual homeless)가 많았다. 그뿐만 아니라 대한제국이 안으로 구조적 모순을 안고 있었던 점도 멸망의 원인으로 지적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의 멸망이 역사적 필연이었거나 운명적인 것은 아니었다. 


요즘 느닷없이 “고종은 매국노였다”는 논지의 책이 출판되어 화제이다. 이러한 논지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고, 대놓고 말은 안했으나, 뒤로 구시렁거리던 이야기가 드디어 지상으로 떠오른 것이다. 그가 과연 매국노일까마는, 그런 말을 들을 소지는 여러 곳에서 보였다. 


나는 고종의 시대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그를 감싸는 보수주의 강단 사학자의 글을 읽을 때마다 문득 경순왕(敬順王)을 생각한다. 망국의 군주를 칭송하는 글을 일찍이 읽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가 계몽군주인지 아닌지에 관해서는 서로 할 말이 많겠지만, 절대군주 시대에 망국은 결국 군주의 책임이라는 사실에 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여기에서 국제관계니, 일본의 정한론(征韓論)이 얼마나 가혹했는지에 대한 비난은 망국의 군주에게 면책 사유가 되지 않는다. 


나는 망국의 군주가 저지른 실수를 생각하노라면 자꾸 -한비자-(韓非子)의 글이 머리에 떠오른다. 한비자의 말에 따르면, 한 나라를 망치는 군주 곁에는 반드시 여덟 가지의 간신(八姦, 卷2/9)이 있다. 한비자가 말한 팔간이라 함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같은 베갯머리의 여인(同床)이다. 고종의 경우에는 민비(閔妃)를 가리킨다. 민비는 담대했고, 결기(決起)도 있었고, 왕실에 대한 걱정도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실수를 했다. 그는 왕위 계승의 문제에서 지혜롭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혈육 순종(純宗)이 지진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면 종묘사직을 위해 왕자들 가운데 더 능력 있고, 출중한 완화군(完和君) 이강(李堈)을 후사로 삼는 것이 순리였을 것이다. 


둘째는 곁에 있는 근신(近臣, 在旁)이다. 후한(後漢)이 멸망한 것을 십상시(十常侍)에 돌리는 것은 옳은 필법이 아니다. 십상시보다 역사에 더 큰 죄를 짓는 이는 혼군(昏君)과 암군(暗君)이다. 을사오적(乙巳五賊)은 모두 고종의 총신들이었다. 


셋째는 부모·형제(父兄)이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술수로 왕이 되었으니 어려서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던 정황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자식이 부모를 섬기면서 세 번 간언해도 듣지 않으면 울면서 따라가야 하기 때문이다.[-禮記- 曲禮(下)] 그러나 그가 성인이 되어 명실상부한 왕이 되었을 때 그는 왜 지혜롭게 정사를 처리하지 못했는가? 


넷째는 양앙(養殃)이니 주군의 향락을 책임진 무리이다. 이를테면 채홍사(採紅使)들이 그에 든다. 그러나 고종이 주색에 탐닉했다는 기록은 없다.


다섯째는 민맹(民萌)인데, 국고를 풀어 민심을 얻는 무리를 말한다. 역사를 돌아보면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돈다발을 흔드는 사람이 선거에서 이겼다. “받아먹고 바로 찍으면 된다”지만, 아직 역사에 그런 사례(史例)는 보고된 바가 없다. 


여섯째는 유행(流行)이니, 철석같이 맹세해 놓고 말을 바꾸는 무리를 말한다. 정치인의 실수는 말을 아끼지 않는 데 있다. 페리클레스(Pericles)가 위대한 것은 “모든 것에 대답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위강(威强)이니, 검객과 무사를 모아 그 위력을 드러내어 자신과 한 편이 되면 이롭고 자기편이 되지 않으면 죽음을 겪을 것이라 위협하는 무리를 뜻한다. 그러나 고종에게 그런 무리는 보이지 않는다.


여덟째는 사방(四方)이니, 국록을 먹는 몸으로 사직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적어 사대하며 군사는 나약하여 강국에 굽신거리는 무리를 말하는데, 당대의 친미파·친청파·친러파·친일파를 뜻한다. 


아관파천 자체가 큰 실수

좀 더 신중했더라면 미국으로 피신했어야


이런 상황에서 조선의 을미사변(乙未事變)과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났다. 을미사변을 주도한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외교적으로 매우 미욱한 인물이었다. 아관파천 자체가 실수였다. 나라가 어려우면 국왕이 백성과 더불어 목숨을 걸고 사직을 지킬 생각을 하지 않고 야반도주한 것부터 제왕답지 못했다. 어차피 파천이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면, 그리고 그때 고종이 좀 더 신중했었더라면 미국공사관으로 피신을 하는 것이 순리였다. 그러나 고종이 미국공사관에로의 파천을 타진했을 때 미국 공사는 거절했다. 


아마도 아관파천은 일본의 한국 병합을 더욱 굳게 결심하도록 만든 고비가 되었을 것이다. 일본의 전통적인 러시아 인식은 공로증(恐露症, Russo-phobia)이다. 그러나 러시아에 먹히는 것이 일본에 먹히는 것보다 더 불행하리라는 것을 고종은 몰랐다.


일찍이 1896년 10월에 일본은 러시아공사관에 파천한 고종을 환궁시키는 방안으로 조선의 관료들을 매수하고자 자금력과 인맥 관리에 탁월한 거상(巨商)의 전담자인 도다 도노모(戶田賴毛)를 고용하여 이미 조선에서 암약하게 했다. 이 무렵 조선 왕실은 재정이 궁핍했다. 그런데도 1906년 조선 황태자의 결혼 비용에 125만 엔을 썼다. 조선의 육군의 1년 유지비가 125만 엔이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이처럼 한국 병합을 도모하고 있을 때 고종의 대응은 어떠했는가? 이를 알려면 특명 전권 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열흘이 지나 귀국에 앞서 고종에게 출국 인사를 하러 온 자리에 두 사람이 나눈 다음과 같은 대화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메이지(明治) 38년(1905) 11월 28일: 이토 히로부미 대사가 황제를 알현하러 들어가자 황제가 물었다. (…)

황제: 아직 업무를 맡은 대신으로부터 아무 말도 듣지 못했으나, 이번 일[을사조약의 체결] 같은 것도 경(卿)이 여기에 있기에 이를 신속히 마무리를 지었다고 생각하오. 그런데 실제로 언제 출발 예정인가요?

이토: 내일 아침 출발 예정으로, 오늘은 말하자면 고별인사 겸하여 참내(參內)했습니다.

황제: 그건 너무 서두르는 것이 아니오? 하다 못해 사나흘 만이라도 연기함이 어떨까요? 그리하여 뒷일을 어떻게 조치할까에 관해 각 대신에게 자세히 설명할 수 있기를 바라오. 짐(朕)이 이렇게 경에게 애틋[戀戀]한 것은 감히 짐의 개인적인 정분[私情]뿐 아니라 실로 우리나라를 위해 경의 재량(裁量)에 기대할 것이 없을까 생각하기 때문이오. 경의 지금 머리카락이 반백(半白)이라, 생각건대 그렇게 된 것도 전부 국사(國事)에 마음과 몸을 다하여 나랏일에 이바지한[盡瘁] 결과요. 바라건대 일본의 정치는 후진의 정치가에 맡기고 지금 남아 있는 흑발(黑髮)의 절반을 짐의 보필에 쓰지 않겠소? 비록 그 수염이 서리처럼 흰 것[霜白]을 볼 때 우리 국가에 위대한 공헌을 하고 그 성효(成效)를 기대할 수는 없겠으나, 짐이 경의 노체(老體)를 되돌아보지 않고 이렇게 강요하는 이유는 짐이 경을 신뢰함이 정부 대신보다 낫기 때문이오. 

이토 : (그 말을 듣자 대사가 빙긋이 웃었다.)

[-日韓外交資料集成-(6/上, 1964), pp. 74-75. :]


이것이 망국의 군주가 침략의 수괴 앞에서 할 말인가? “고종은 이토의 속마음을 읽지 못했다”는 말(韓相一)이 맞을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의 미욱한 탓이지 이토를 탓할 일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망국의 군주가 영명했던 사례는 없다. 바꾸어 말하면 군주가 영명한데 나라가 멸망한 사례가 왕정 체제에서는 없었다. 지도자가 영명하고 백성이 그를 우러러보며 열심히 일하는데, 멀쩡하던 나라가 왜 멸망하는가? 


문제는 사람이었고, 특히 지도자였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어차피 권력의 주변에는 “영혼의 노숙자”(spiritual homeless)가 많았다. 그뿐만 아니라 대한제국이 안으로 구조적 모순을 안고 있었던 점도 멸망의 원인으로 지적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의 멸망이 역사적 필연이었거나 운명적인 것은 아니었다. 


강단 사학에서 망국군주를

영명 군주로 평가하는 일 없길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노린 헛점은 바로 왕실과 대신의 부패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당초에 조선 지배층에 쓰기로 계산한 매수 자금은 3천만 엔(圓)이었다. 이는 송병준(宋秉濬)이 요구한 1억 엔에 많이 못 미치는 액수였다. 1904년 3월 13일에 이토는 세 번째로 한국에 왔다. 


이때 이토는 궁내부대신 민병석(閔丙奭)을 통해 황제에게 30만 엔, 엄비(嚴妃)에게 1만 엔, 황태자 부부에게 5천 엔을 전달했다. 뇌물은 다이이치은행(第一銀行) 경성(京城)지점에서 발행한 2만 엔의 예금어음으로, 궁내부 예식원(禮式院) 참리관(參理官) 현백운(玄百運)을 거쳐 현영운의 처에 교부하고, 민병석을 통하여 잘 전달되었는지 확인했다.[-日本外交文書-(37/1), p. 297]


역사에서 인물에 대한 평가는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 이 글이 고종에게 악의적이어야 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다만 문중의 연민이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강단 사학에서 망국의 군주를 영명하게 평가한다는 것은 -춘추-(春秋)를 배운 사람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불편함을 느낀다. 이제 와서 공민왕(恭愍王)을 명군(明君)으로 추앙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우리의 역사학이 얼마나 허망하게 될까를 걱정할 뿐이다.  


필자 신복룡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조지타운대학교 객원교수와 대한민국 학술원상 심사위원,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그리고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출판부장, 중앙도서관장, 대학원장,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등을 역임한 바 있다. 저서로는 『한국분단사연구』, 『한국사 새로 보기』, 『한국정치사상사』, 『해방정국의 풍경』, 『전봉준평전』, 역서 『한말 외국인기록』(전 23권) 등 다수가 있다.  


최신글

  • 글이 없습니다.

순국Inside

순국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