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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가 [2022/01] 독립전쟁 향한 힘찬 비상, 항공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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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치하에서 시작된 대한민국 항공역사


조선의 희망이 된 ‘빨간 마후라’ 

독립에 대한 열망 안고 하늘을 날다


글 | 편집부 


하늘에서 쏟아지는 폭탄은 그 어떤 무기보다 강력했다. 1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서구 열강들은 ‘항공전력’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1차 세계대전에 미군으로 참전한 한국인 비행사, 일본과 중국에서 비행술을 배운 청년들의 활약에 고무되면서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비행대 편성과 비행사를 육성하는 일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1920년 미국 캘리포니아에 한인비행학교가 설립되었고, 한인 비행사들은 조국독립의 염원을 안고 드넓은 하늘을 날았다.  


“항공력 이용해 독립전쟁을 하겠다”

노백린·김종림


당시 임시정부 군무총장이던 노백린(1875∼1926)은 ‘독립전쟁의 승리는 하늘을 지배하는 자에게 있다’는 확신으로 비행대 편성을 추진했다. 비행기 구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미국 캘리포니아를 찾은 그는 대한인국민회 산하 ‘청년혈성단’ 단원들이 조국독립에 투신하고자 비행술을 배우고 있는 모습에 매우 놀랐다.


노백린은 1920년 2월 5일 직접 레드우드 비행학교를 방문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비행학교’ 설립을 제안했고, 청년들은 흔쾌히 의기투합했다. 캘리포니아주에서 쌀농사로 거부가 된 김종림(1884~1973)이 당시 5만 달러, 현재 가치로 110억 원에 달하는 거금을 쾌척하고 자신의 농장 중 40에이커(약 4만 9,000평) 규모의 땅을 활주로 부지로 제공하는 등 비행학교 설립 비용 전액을 지원했다. 청년혈성단원들에게 비행술을 가르치고 있던 미국인 프랭크 브라이언트(Frank K. Bryant)도 조선인의 애국심에 감동해 교관으로 합류했다. 


당시 비행기는 미국에서조차 신기한 기계였기에,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동양의 ‘코리안’들이 나라도 없으면서 비행학교를 만든다는 사실은 현지인들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다. 


2월 20일 드디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산하의 한인비행학교(K.A.C.: Korean Aviation Corps)가 임시로 문을 열었고, 7월 5일 24명의 학생으로 공식 개교했다. 비행학교 훈련생들은 주로 이민 1.5세대들로 정비사를 비롯해 학생, 전도사, 실업가 등의 직업을 가진 청년들이었다.


​레드우드 비행학교에서 훈련 경험이 있던 우병옥, 오림하, 이용식, 이초 등 4명이 첫 졸업생이 되었고, 이들은 졸업과 동시에 비행학교의 훈련 교관으로 임명됐다. 훈련생 중에는 1921년 7월 7일 국제 항공연맹(FAI)에서 공식 조종사 자격증까지 취득한 박희성과 이용근이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두 사람을 육군 비행병 참위(소위)로 임명했고, 이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 장교가 되었다.


“정복에 말 타고 남대문에 입성해보면 참으로 좋겠다”며 망명 생활을 하던 노백린은 1926년 1월 22일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라”는 유언을 남긴 채 52년의 생을 마감했다. 정부는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고, 국립항공박물관은 조국을 위해 목숨 바쳤던 노백린과 항공독립운동가들의 뜻을 기리고자 2020년 8월 박물관 야외에 동상을 세웠다.


한국인 최초 한반도 비행에 성공

천재 비행사 안창남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로 불리는 안창남(1901~1930)은 뛰어난 비행 실력으로 식민치하 한국인들에게 큰 기쁨과 자긍심을 선물했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 휘문보통중학교를 중퇴하고 1919년 일본으로 건너가 비행술을 배웠다. 1921년 일본 도쿄 오쿠리(小栗) 비행학교를 마치고 비행사 자격증을 따면서 민족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안창남을 초청해 한국인 최초로 한반도의 하늘을 날게 하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안창남고국방문후원회가 결성되고, 비행기 구입을 위한 모금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안창남은 1922년 11월 일본비행협회가 주최한 도쿄~오사카 간 왕복 우편비행대회에서 일본인 비행사를 제치고 우승하며 한국인의 기상을 세상에 알렸다. 조선인 천재 비행사의 탄생 소식은 현해탄을 건너 한반도에 상륙했다. 모든 신문은 이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마침내 동아일보사 초청으로 안창남 고국 방문 비행이 성사됐다. 1922년 12월 10일, 서울 여의도 간이비행장에서 우리나라 항공사에 한 획을 긋는 역사적인 비행이 개최됐다. 찬 바람 부는 겨울 날씨에도 이를 보기 위해 5만여 명의 인파가 몰렸다. 당시 경성 인구가 30만여 명이었으니 얼마나 많은 인파가 모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안창남은 단발쌍엽의 1인승 ‘금강호’를 타고 남산을 돌아 창덕궁 상공을 거쳐 여의도 상공에서 고공비행의 묘기를 선보였다. 당시 나라 잃은 백성들에게 민족적 자부심과 긍지를 일깨워준 비행이었다. 세간에서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란 노래가 유행할 정도로 국민의 영웅이 됐다.


하지만 그는 높은 소득과 명예가 보장된 비행사에 머물지 않고 험난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24년 관동대지진 이후 일본을 탈출한 그는 중국으로 건너가 산시성(山西省)에서 비행학교 교관으로 활약하며 대한독립공명단에 가입했다. 공명단은 상하이와 만주를 중심으로 다양한 항일독립운동을 벌인 단체였다. 1929년에는 비행대 설립을 위해 600원을 쾌척하기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30년 4월 2일 산시성에서 비행 훈련을 하던 중 추락해 29세 나이로 요절했다.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일왕 왕궁에 폭탄을 쏟아붓겠다”

최초 여성 비행사 권기옥


안창남의 뒤를 이어 수많은 ‘빨간 마후라’들이 대한독립을 외쳤다. 남자의 그늘에 가려 있었던 봉건시대, 더구나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식민치하에서 여성들도 당당히 하늘을 날았다. 권기옥(1901~1988), 박경원(1901~1933), 이정희(1910~?)가 대표적 인물이다. 


권기옥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이자 남편 이상정(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인 이상화의 형)과 함께 독립운동을 벌인 항일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평양 숭의여학교 송죽회에 가입해 독립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송죽회와 함께 3·1운동에 사용할 태극기를 만들고, 앞장서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또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채를 팔아 독립자금을 지원하는 데 힘썼다. 그러던 중 일제에 붙잡혀 가혹한 고문을 견디며 6개월간 복역했다. 


1920년 상하이로 망명한 그는 중국운남육군항공학교 제1기생으로 입학해 1925년 졸업했다. 1924년 단독비행까지 무사히 마치며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가 돼 장제스의 국민혁명군 항공사령부 소속 비행사로 합류했다.


권기옥은 단순히 하늘을 나는 것이 꿈이 아닌, 일본에 폭탄을 투하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조선총독부를 폭파하고자 하니 비행기를 준비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비행기를 살 돈은커녕, 빌릴 돈도 없었다. 그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1932년 상하이 전쟁이 벌어지자 중국 측에서 일본을 상대로 맞서 싸웠다.


1935년 장제스의 부인인 송미령 중국항공위원회 부위원장이 중국 청년들에게 공군의 멋짐을 알리겠다며 권기옥을 앞세운 선전비행을 제안했다. 권기옥은 종착지가 일본 도쿄임을 확인하곤 일왕의 궁전에 폭탄을 쏟아부을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선전비행을 앞두고 일본군이 베이징에 인접한 펑타이를 점령하면서 계획 자체가 취소됐다. 1943년 여름에는 중국 공군에서 활동하던 최용덕, 손기종 등과 함께 한국 비행대 편성과 작전계획을 구상했지만, 일본이 예상보다 일찍 패망하며 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광복 후인 1949년 귀국한 권기옥은 국회 국방위원회 전문위원을 맡아 한국 공군 창설의 산파 역할을 했다. 정부는 1968년 대통령 표창, 1977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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