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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스크랩 [2022/02] 대한 광복회 참여와 임시정부 국내 특파원, 박문용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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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의·용(知·義·勇) 모두 겸비한 독립운동가


일제 세금 횡령해 독립운동자금 모음에 나서


글 | 편집부 자료제공 | 박문용 의사 손주 박경주 


박문용 의사는 9세 때 사서삼경을 통달할 정도로 명석하였으며, 10세 때부터 서울과 러시아에서 신학을 수학할 정도의 지식인으로 성장했다. 이후 대한광복회 활동과 임시정부 불변단 부단장을 역임하고 임시정부 조선독립군사령부 국내 특파원으로 조선총독과 정무총감, 매국노 이완용, 송병준을 암살하고자 결사단에 참여할 정도로 용맹하였다. 특히 1916년 겸백면장으로 재직하면서 공금 300원과 면민에게 징수한 세금 27원 6전을 독립운동자금으로 횡령하여 대한광복회 전라도 지부장으로 활동하였던 우재 이병천과 함께 독립운동자금을 모금, 나라를 되찾기 위해 대한광복회 전라도 지부를 중심으로 합법적인 신분을 버리고 조국광복 실현에 나섰다.     


박문용[朴文鎔, 일명 박환(朴桓)] 의사는 1882년 1월 15일 전라남도 보성군 겸백면 사곡리 254-1번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원, 임진왜란·정유재란 의병장 죽천 박광전(朴光前 1526~1597)의 10세손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9세 때 이미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할 정도였으며, 그해 서울로 가서 교육을 받고, 러시아에서 수학했다. 의사는 을사늑약 이후 조국 독립의 구상을 실천하기 위해 급하게 귀국하였다.  


귀국 이후 신분을 감추고 1911년 12월 8일 보성군 복내면장으로 부임했다. 고흥 거금초등학교장을 거쳐, 부인 임종순(본관 나주) 여사와 결혼을 하고 1913년 겸백면 면장으로 전임하였다.  


 박문용 의사는 우재 이병천과 함께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여 나라를 되찾기 위해 대한광복회 전라도 지부를 중심으로 합법적인 신분을 버리고 조국광복 실현에 나섰다.

 

박문용 의사 부부의 정신세계


박문용 의사는 평소 부인 임종순 여사에게 “러시아 유학시절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구국의 필요성을 깨닫고 독립항쟁을 치밀하게 준비해 왔다”며 “나라가 있어야 민중이 편하고 그래야 주인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대대손손 일본놈들의 종으로 살아야 한다. 조국이 독립되면 모두가 잘사는 길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이러한 지아비의 뜻을 따라 부인 임종순 여사는 여장부답게 일본순사가 칼을 빼들고 죽이겠다고  협박하면서 박문용 의사의 소재지를 추궁하였으나 “여자 하나 죽어서 나라가 망하겠느냐”고 일본 순사한테 되레 호통을 쳤다고 한다. 또한 임종순 여사는 시누이도 잘못하면 회초리로 벌할 정도로 강직한 분이었으며 자식들에게는 “너희는 나라의 자식”이라며 조국 독립의 중요성을 항상 강조한 여인이었다.


한말 의병과 보성독립운동에서 영향을 받다


정태화와 안규홍은 1909년 일제의 호남의병토벌작전에 정탐병 2명을 살려 보내주면서 진지가 노출되어 2년간의 치열한 보성의병의 항쟁은 풍비박산이 나고 의병들은 죽거나 잡혀갔다.


당시 일본의 무단정치는 폭도죄로 단기형을 받아도 죄수들은 거의 감옥에서 1~2년 사이에 고문과 폭행으로 사망했다. 

정태화의 손녀인 정인묘와 박문용 의사의 아들 박태장은 임진왜란 의병장 박광전의 행군장 정길의 선조들의 인연으로 혼인한다. 


광복 이후 보성향교에서는 박문용 의사의 동상을 세우기 위해서 후손들에게 사진을 찾아보지만 한말 의병의 수난사와 대한광복회의 비밀, 결사의 강령에 따라 사진, 글 한 점을 남기지 않은 것은 비밀결사조직의 동지와 가족을 지키려 했던 것이다.

한말의병, 나철의 중광단, 보성향교 조세저항 구국운동은 박문용의 독립운동 구상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일제의 무단통치에 저항했던 대한광복회 활동이 상해 임시정부의 국내특파원의 임무를 수행하는데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지식인 중심의 상해 임시정부 수립과 만주에 건설되었던 무장독립운동 세력이 상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합할 수 있었던 것은 호남의병, 나철의 중광단, 서로군정서 이상룡 총재, 북로군정서 서일 총재, 천진불변단, 대한광복회을 기반으로 임시정부 수립과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 


대한광복회 참여와 활동


1910년 8월 나라가 일본에 합병되자 전국 방방곡곡에서 분을 이기지 못한 의사들이 일어나 향병을 모집하고 일제와 대항하는 애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우재 이병찬은 1913년 채기중 선생이 주도한 풍기 대한광복단과 1915년 박상진 선생이 주도한 조선국권회복단에서 활약했다. 


1915년 박상진, 우재룡 선생과 함께 대구 달성공원에서 대규모로 조직을 정비, 대한광복회를 결성하여 전국에 비밀기관을 설치, 운용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하였으며 전라도 지부장을 맡았다. 


이에 가담한 박문용은 1916년 일본이 부과한 세금 2천 원을 징수한 것과 공금 3백 원, 지방의 부호들로부터 모금한 돈 등 8천 원을 독립군 군자금으로 밀송하고 전라도를 거점으로 비밀조직의 확대, 일제고관·친일분자 제거, 일본의 주요기관의 파괴, 조선헌병대 습격 등 독립군 군자금 모금을 위해 합법적 신분을 버리고 대한광복회의 창립과 조직 확대에 전념한다.


대한광복회는 본부조직을 바탕으로 국내외로 조직을 확대하기 시작해 1915년 12월 우재룡이 길림(吉林)에서 주진수(朱鎭洙)·양재훈(梁載勳)·손일민(孫一民)·이홍주(李洪珠) 등과 만주본부 성격을 갖는 ‘길림광복회’를 설치했다. 


경기도[지부장: 김선호(金善浩)] 황해도[지부장: 이관구(李觀求)]·강원도[지부장: 김동호(金東浩)]· 평안도[지부장: 조현균(趙賢均)]·함경도[지부장: 최봉주(崔鳳周)]· 경상도[지부장: 채기중(蔡基中)]·충청도[지부장: 김한종(金漢鍾)]· 전라도[지부장: 이병찬(李秉燦)]   


 주요활동은 군자금 모집이었다. 창립목적인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회원들이 자산을 기탁해 자금으로 활용했으며 일제가 거두어들인 세금을 탈취하기 위해 경주 광명리에서 우편마차를 공격하기도 했다. 대구지역 부호들을 상대로 자금을 모집하던 중 회원들이 체포, 영월의 중석광과 운산 금광 수송마차를 공격해 자금을 확보, 화폐를 위조해 자금을 조달하기도 했다. 전국의 부호들에게 통고문을 발송해 의연금 모집을 추진했으나 부호들이 협조하지 않아 실효를 거둘 수 없었다.


대한광복회는 친일세력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고 자금모집을 원활히 하기 위해 친일세력들을 처단하는 의협투쟁도 전개했다. 의협투쟁은 경상도와 충청도, 전라도에서 이루어졌으며, 식민지배에 안주하려는 친일세력들에게 민족적 각성을 일깨웠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1916년 5월 광복회 참모장 한우석(일명 한훈)이 김상옥, 장렬, 곽경렬 등과 함께 보성, 벌교의 친일부호 양재학과 서도현을 처단하고 오성의 헌병 분소를 습격하여 군도와 권총을 탈취하였다. 이듬해인 1917년 1월에는 장렬, 고재신과 벌교의 부호 서인을 납치하여 정읍의 김태수 가택에 감금하였다. 이들은 납치한 서인을 군산, 대전, 평양 등 75일간 끌고 다니다가 군자금 5만 원을 받기로 하고 풀어주었다. 광복회의 조선헌병대 기습의거는 1910년대 대표적인 국내무장 항일 투쟁이었다.


1918년 비밀결사조직이었던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일경에 드러나고 대한광복회 조직원 검거가 대대적으로 진행되고 조직원의 밀고로 인해 더 이상 대한광복회가 국내에서의 조직유지가 어렵다 판단하고 해외로 조직을 옮기는 시점과 1919년 천진불변단의 창립 시기가 일치한다. 우재 이병찬은 1918년 7월 목포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병찬 지사의 손자인 이용석 씨는 “조부께서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한 사람도 부지기수인데 살아남은 내가 내세울 게 있느냐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사셨고 누가 묻든, 취재를 오든 독립운동의 행적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 지사의 고집은 먼저 간 동지들에 대한 의기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임시정부 조선독립군사령부 특파원의 임무


특파원은 일종의 특수정보원으로서 임정의 특별한 연결고리의 임무를 띠고 국내에 파견된 중요임무를 띤 밀사로 항일성, 독립성 등 신임이 두텁지 않으면 그 임무 수행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특파원의 주요 임무는 주로 임정활동에 대한 선전을 통한 국내외 동포들의 신뢰도 제고와 시위운동, 연통제의 실시, 비밀결사의 조직과 연계활동, 독립신문 민족의식 도서 등 임정의 관련 문서의 전달과 독립운동의 주요 인사 계보 파악, 각 민족운동 단체의 활동상황과 연계성의 모색과 함께 독립운동자금의 모집 전달 확인 등이었다. 


특파원의 파견과 그 활동은 국내외 동포에 대한 통치의지를 실질적으로 구현하고 독립에의 자신감을 심어주는 임무도 확인하고자 한 것이다. 

 

상해 임시정부 호남의 자금줄


박문용 의사는 톈진에서 임시정부의 불변단(不變團)을 조직하고 단장 에 조만식, 부단장 및 이사부장은 자신이 맡고 그 외 55명의 단원이 모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을 목표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선독립사령부 서기, 국내특파원 전라도 책임자로 특파되었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가장 필요했던 것은 군자금 확보와 독립운동 조직의 확대였다. 


박문용 의사가 조선독립군 사령부 서기로 국내로 파견된 것은 대한광복회 전라도 지부의 경험이 풍부한 국내 활동의 적임자였기 때문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군 운영과 재정에 전라도 주민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한 조선총독부의 비밀문서가 2019년 최초 공개됐다.


일제의 비밀보고서에 등장한 전라도 사람들은 조명석(광주), 조하능(광주), 노석중(광주), 김정연(광주), 정인병(화순), 양사형(화순), 양재국(화순), 윤영기(효천), 손동채(화순), 손여애(화순), 노상영(광주, 노석중 장남), 조병렬(화순), 윤영기(화순), 채상철(광주), 노기준(일곡), 민치도(화순), 주창업(화순), 노석신(일곡), 이윤호(일곡), 이창호(일곡), 유덕례(일곡), 유계윤(광주), 유상규(광주), 고려위(광주), 정용택(군산), 박문용(보성), 최면식(면암 최익현의 손자), 유한선(광주), 박현택(화순, 2백원), 신유선(곡성 삼십원), 정호필(곡성, 백원), 정원래(곡성, 백원), 고인식(곡성), 심유택(곡성, 1천오백원), 신대선(곡성, 일백원), 정호필(곡성, 이백원), 박종호(담양, 천원), 송원근(화순 오천원)이다.


임시정부 조선독립군사령부 특파원 활동


박문용 의사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해 10월 31일 상해 임시정부 주관으로 대표 30인중 1인으로 제2의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1919년 10월 31일 제2의 독립선언서에 서명한다. 


제2의 독립선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일본의 철수를 주장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박문용 의사는 임시정부의 조선독립군 사령부를 국내에 설치하는 데 필요한 군자금 모집을 위하여 권총을 입수하고 1920년 2월 한우석(한훈)과 함께 안창호, 이동녕, 이동휘, 이시영 등 임시정부 간부들과 회합하고 조선독립군사령부(朝鮮獨立軍司令部) 설치를 위해 책임자로 국내로 특파된다.


1920년 8월 미국 상원의원단이 서울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총독 및 정부총감 이완용, 송병준 등이 남대문 정거장에서 환영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암살단(한우석 등 21명 결사단)을 조직한다. 


한우석(한훈)은 1920년 7월 11일 안동현으로 건너가 암살용 권총 3정, 탄약 300발을 입수 귀국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한우석이 김상옥 의사에게 권총 등 무기류를 전달하는 과정에 발각되어 암살단 의거는 실패하지만 상해 임시정부의 미상원단 면담, 만세시위운동, 북로군정서의 투탄작전은 실행에 옮겨진다. 


1920년 미 상원의원단 방한을 기점으로 국내의 만세운동, 상해 임시정부,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만주 무장독립운동 단체가 총망라해서 대한독립을 위한 대대적인 작전이 진행되고 외교적 노력, 암살단 조직, 일제기관 파괴, 국내만세 운동이 진행된다. 미 상원의원단 방한에 따른 조선총독 암살단 조직, 국내 만세운동으로 상해 임시정부 국내 특파원들에 대한 일제의 검거가 강화되면서 박문용은 1921년 3월 나주에서 피체된다.


박문용 의사는 경성지방법원에서 살인예비죄, 공금횡령 탈취죄로 7년형을 선고받고 투옥 중에 병이 악화되어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일제체포와 구금, 혹독한 고문으로 몸이 회복불능의 상태였고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3년간 투병 중에도 조국독립에 대한 희망을 만들기 위해 젊은 후학을 가르치는 일을 하지만 몸을 회복하지 못하고 47세의 짧은 생을 조국 광복에 바쳤다.  

대한민국정부는 1980년 8월 15일 광복절을 기념하여 ‘건국훈장 독립장’을 그의 유가족에게 전수하였다. 또한 보성군 내 뜻있는 인사들과 유림들이 박문용 의사의 의로운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81년 5월 5일 득량면 신전리 앞에 충신봉 아래에 기적비를 건립하였다.


백범 김구 선생과 인연 및 가족사 


백범 김구(1876~1949)는 명성황후를 시해했던 일본 ‘쓰치다’ 중위를 살해하고 체포됐다. 인천 감옥에서 탈옥하여 피신처로 전남 함평의 이동범, 보성 안동김씨 집성촌인 쇠실마을의 김광언의 집에서 40일 동안 은거하였다. 한시 ‘이별난’(離別難)을 써주고 다시 찾아올 것을 약속하였다.


백범 김구는 상해 임시정부의 안창호를 만나 “상해 임시정부의 문지기”라도 하겠다고 하여 경무국장을 역임하였다. 김구와 상해임시정부 활동과 조선독립군사령부(朝鮮獨立軍司令部) 서기였던 박문용과의 인연은 각별했고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20년 후 1940년 9월 창립되었다.


해방 이후 백범 김구는 약속대로 보성을 다시 방문하고 상해 임시정부의 옛 동지였던 박문용의 가족을 찾는다. 부인 임종순과 장남 박태장, 차남 박태욱을 만나 취업을 알선함으로써 임종순 여사와 아들 박태장은 수원으로 이사한다. 


이후 박문용의 아들 박태장은 동탄 인민위원장을 하였던 모필현의 딸 모경애와 재혼한다. 모필현과 박문용의 관계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당시의 혼인관행으로 보아 친밀한 관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원으로 이사한 후 미 상원위원단 방한 총독암살단의 핵심이었던 한우석(한훈)과는 한 동네에서 살게 되고 임종순 여사가 우리 훈이라고 칭하셨다고 한다. 한우석은 1945년 대한광복단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남북분단과 월북을 거부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지의용(知 義 勇) 모두 겸비한 독립운동가


한국 독립운동사에 있어 조국독립을 위해 희생한 수많은 분들이 있지만 지·의·용(知·義·勇)을 모두 갖춘 분은 그리 흔치 않다. 


9세 때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할 정도로 명석하였으며, 10세 때부터 서울과 러시아에서 신학을 수학할 정도의 지식인으로 성장한 후 대한광복회 활동과 임시정부 불변단 부단장을 역임하고 임시정부 조선독립군사령부 국내 특파원으로 한우석과 함께 조선총독과 정무총감, 매국노 이완용, 송병준을 암살하고자 결사단에 참여할 정도로 용맹하였다. 


특히 1911년부터 3년간 보성군 내 면장을 역임하면서 공금을 횡령하여 독립자금으로 사용한 것은 주도면밀한 의도적 친일안주(면장역임)를 한 매우 독특하고 찾아보기 힘든 독립운동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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