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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2022/02]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와 국채보상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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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진 패물 내놓고 반찬값 줄이고…눈물겨운 나라사랑 정신


“나라 빚 갚는 일에 어찌 남녀가 다르리오”


글 | 권용우(단국대학교 명예교수)     


대일차관(對日借款) 1,300만 원을 갚기 위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감동한 대구 남일동 부인들은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를 결성해 전국에 격문을 보냈다. 이 격문에는 “우리가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나라의 빚을 갚는 일에 어찌 남녀가 다르리요”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전국의 부인들은 부인탈환회·부인감찬회 등을 조직하여 국채보상운동에 동참했다. 끼고 있는 반지를 빼고, 아침·저녁 반찬값을 줄였다. 노리개·은가락지·은장도·금반지 등 값진 패물을 들고 나와 모금함에 넣었다. 미국과 일본 등 해외에서도 호응이 이어졌다.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에서 시작된 여성단체들의 조직과 활동은 여성운동사에 큰 발자취로 자리매김하였다. 


“敬告 我 婦人 동포라!”(우리 부인 동포에게 공경스럽게 고한다)  


이는 대구 광문사 사장 김광제(金光濟)와 부사장 서상돈(徐相敦)이 중심이 되어 대일차관(對日借款) 1,300만 원을 갚기 위한 국채보상운동을 펼치게 되자 이에 감동된 부인들이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를 결성하고 전국의 부인들을 향하여 발송한 격문의 제목이다. 


이 격문에는 “우리가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나라의 빚을 갚는 일에 어찌 남녀가 다르리요”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이에 감동된 전국의 부인들이 부인탈환회(婦人奪還會)·부인감찬회(婦人減饌會) 등을 조직하여 국채보상운동에 동참하였다. 탈환회는 끼고 있는 반지를 빼고, 감찬회는 아침·저녁 반찬값을 줄였다. 노리개·은가락지·은장도·금반지 등 값진 패물을 들고 나와 모금함에 넣었다. 참으로 눈물겨운 광경이었다. 


대구에서 시작된 여성들의 ‘빚 갚기 운동’

전국 곳곳으로 이어져


대구에서 불을 댕긴 여성들의 ‘나라 빚 갚기 운동’은 서울의 대안동 국채보상부인회·진명부인회·대한부인회로 이어졌으며, 경기도의 김포검단면 국채보상의무소·인천국미적성회·남양군 부인의성회·안성군 국채보상부인회, 경상도의 대구남산국채보상부인회·부산항 좌천리부인회·부산영도 국채보상부인회·단연동맹부인회·진주애국부인회 등이 크게 활동하였다. 이 밖에도 전라도의 금산봉황정부인회·제주삼도리부인회, 평안도의 삼화항패물폐지부인회·선천부인의성회, 함경도의 영흥군 국채보상감반회, 황해도의 안악군 국채보상탈환회 등이 있었다. 여성들의 국채보상운동은 해외에서도 동참하였는데, 미국 하와이에 거주하는 부인들도 성금을 보내왔으며, 일본에 유학 중인 여학생들도 이에 호응하였다. 


그리고 국채보상운동은 2천만 국민이 담배를 끊고 절약한 돈으로 일본 차관을 상환하여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출발되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전국 각지에 단체가 조직됨으로써 거국적으로 전개되었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와 황성신문(皇城新聞) 등의 언론기관이 이 운동에 참여하여 ‘2천만 국민이 3개월 동안 담배를 끊고 그 돈으로 1,300만 원을 갚아 나라의 위기를 구하자’는 캠페인을 벌임으로써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호응하였다. 정부의 관료나 양반뿐만 아니라 노동자·농민·상인·군인·승려·학생·노비·초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이 참여하여 많게는 10,000원, 적게는 10전, 1전의 지원금을 기탁하였다. 


그런데 국채 1,300만 원은 일본정부가 대한제국의 경제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강제로 빌려준 돈이었는데, 1905년 6월부터 그 이듬해 3월까지 네 차례에 걸쳐 발생되었다. 그 명목은 여러 가지였다. 화폐정리자금채·구채상환과 세계 부족 보충비·금융조합 창립자금·통감부 개설에 따른 시정개선비 이러한 명목이었다. 이렇게 도입된 차관 1,150만 원과 이에 따른 이자를 합쳐 1,300만 원이었는데, 이 액수는 우리 정부가 상환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국채의 발생은 1904년 8월 22일 강제로 체결된 제1차 한일협약에 따른 것이었는데,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가 재정고문으로 임명되면서 식민지배를 위한 경제적 길 닦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일본의 계획은 통감부의 내정간섭이 노골화되면서 더욱 그 속도를 더해갔다. 


국채보상운동, 통감부의 방해에 부딪치다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의 광문사 사장 김광제와 부사장 서상돈이 단연회(斷煙會)를 조직하고 첫발을 떼면서, 1907년 1월 29일 「국채일천삼백만원보상취지서」(國債一千三百萬圓報償趣旨書)를 전국에 발송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2월 21일자 대한매일신보에 국채보상운동의 취지서를 게재함으로써 이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뒤 이어 22일에는 서울에서 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가 조직되고, 대대적인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로써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인 호응을 얻었으나, 이를 총괄하는 중앙기구가 없어서 큰 혼란이 야기되었다. 뿐만 아니라, 통감부의 방해로 말미암아 일반 국민들은 뜻이 있어도 헌금의 기탁이 쉽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각 단체의 대표들이 모여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國債報償支援金總合所)를 설치하고 규약을 정하는 한편, 대한매일신보사에 본부를 두고 양기탁(梁起鐸)으로 하여금 이를 총괄토록 하였다. 이렇게 되자 대한매일신보사 사원들도 국채보상지원금 관리에 앞장서게 되었다. 그리고 대한매일신보사는 기탁된 금액과 기부자를 보도함으로써 국채보상운동은 더욱 활기를 띄게 되었다.  


이처럼 국채보상운동이 활기를 띠게 되자 통감부는 국채보상운동이 거족적인 항일운동으로 발전해나가는 것을 사전에 막아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고,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총괄하는 양기탁을 곱지 않은 눈으로 보았다. 통감부는 일본의 꼭두각시 일진회(一進會)로 하여금 모금활동을 방해하도록 하였다. 그러던 중 1908년 7월 12일, ‘국채보상지원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양기탁을 구속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는 마치 대한매일신보사 사장 영국인 베델(Bethell, E. T.)이 3주간의 감금형을 선고받고, 상해에 수감되어 국내에 없는 시기였다.  


양기탁이 무죄판결을 받고 구금된지 64일만인 1908년 9월 29일 석방되었지만, 이로 말미암아 국채보상운동의 주체가 분열됨으로써 그 이상의 진전을 보지 못하고 좌절되고 말았다. 결국 일제의 마수가 우리 2천만 민중의 꿈을 접게 하였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은 비록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지만 우리 민중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온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민중들의 나라사랑 정신은 1997년 IMF로 나라가 곤경에 빠졌을 때 ‘외채상환(外債償還) 금 모으기 범국민운동’으로 되살아났다. “각 가정의 장롱 속에 숨겨두었던 금붙이를 가지고 나와 모금함에 넣었다.” 그때 기록에 의하면 1998년 초부터 시작돼 한 달여 만에 243만 명이 참여하였다고 전한다. 참으로 장한 일이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대구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에서 시작된 여성단체들의 조직과 활동은 여성운동사에 큰 발자취로 자리매김하였다.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가 “우리가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나라의 빚을 갚는 일에 어찌 남녀가 다르리요”라는 내용을 담은 격문은 전국 각지의 여성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리고 끼고 있는 반지를 빼고, 아침·저녁 반찬값을 줄였다. 


이 자랑스러운 여성들의 ‘나라사랑 정신’이 대구광역시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 ‘국채보상운동 여성기념비’로 다시 태어나, 우리를 손짓하고 있다.  


필자  권용우 

단국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 국립 Herzen 교육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단국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학생처장ㆍ법과대학장ㆍ산업노사대학원장ㆍ행정법무대학원장ㆍ부총장ㆍ총장 직무대행 등의 보직을 수행하였다. 전공분야는 민법이며, 그중에서 특히 불법행위법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을 하였다. 정년 이후에는 정심서실(正心書室)을 열고, 정심법학(正心法學) 포럼 대표를 맡아서 회원들과 법학관련 학술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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