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전설 [2022/02] 충남 홍성의 만세시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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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유림의 고장에서 펼쳐진 독창적인 시위운동
연극 공연장에서 울려퍼진 ‘대한독립만세’
글 | 이정은(3·1운동기념사업회장)
1919년 4월 1일 오후 8시경 홍성 금마면 사람들이 모여 들고 연극 공연이 시작되었다. 연극이 공연되고 있는 중간에 조한원이 벌떡 일어나 군중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수십명의 관중들이 따라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전국에서 독특한 연극 공연장 시위가 벌어졌다. 4월 4일 밤에는 홍성 주변 각지 산 위에서 일제히 횃불이 피어올랐다. 야간 연합 횃불시위는 예산군 관내 18개소, 당진군 관내 8개소가 연대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홍성군 내에서는 금마·홍북·홍동·구항 등 4개면 24개소에서 주민들이 마을 주위 산에 올라 화톳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야간 횃불시위는 독립만세 시위를 낮에서 밤까지, 평지에서 산 위로까지 확장한 독창적인 시위운동이었다.
충남 홍성은 영남 유림과 더불어 조선유학의 양대 기둥의 하나인 기호유림의 고장이었다. 그러므로 단발령 공표와 더불어 1896년 홍주의병이 일어났고, 1906년 5월에는 을사조약에 반발하여 전국에서 가장 강력한 의병항쟁이 홍주성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 지역 유교적 의리 정신과 자주독립 의식을 보여 준다. 홍성에서 3·1운동의 한용운, 만주 독립군의 김좌진 등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각 면별 만세시위 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금마면
4월 1일 오후 8시경 사람들이 모여 들고 연극 공연이 시작되었다. 연극이 공연되고 있는 중간에 조한원이 벌떡 일어나 군중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수십명의 관중들이 따라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전국에서 독특한 연극 공연장 시위가 벌어졌다.
4월 2일, 7일 읍내 만세시위
4월 1일 금마 연극 공연장 만세시위를 주도한 인사들이 이튿날인 2일에 홍성 읍내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불렀고, 4월 7일에도 장터에서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불렀다.
4월 4일 홍성 4개 면의 야간 연합 횃불시위
4월 4일 밤에는 홍성 주변 각지 산 위에서 일제히 횃불이 피어올랐다. 이 야간 연합 횃불시위는 예산군 관내 18개소, 당진군 관내 8개소가 연대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홍성군 내에서는 금마·홍북·홍동·구항 등 4개면 24개소에서 주민들이 마을 주위 산에 올라 화톳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야간 횃불시위는 독립만세 시위를 낮에서 밤까지, 평지에서 산 위로까지 확장한 독창적인 시위운동이었다.
홍동면 각 마을은 4월 4일 주민들이 산에서 횃불만세운동을 하고, 4월 5일 밤에 신기리 이제경(李齊經)·조우식(趙愚植) 등이 주민 100여 명과 마을 뒤 꽃동산에 모여 횃불을 올리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날 일제 보병이 출동하여 경무기관 합동으로 총기로 진압을 하여 10명이 사망하는 큰 인명피해를 냈다.
그러자 일제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었다. 4월 6일 밤 박성식(朴性植)은 홍북면 상하리 엄중삼(嚴仲三) 집에서 음주를 하다가 만세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김헌식(金憲植)에게 “어찌하여 만세를 부르지 않느냐?”고 비난하면서 그를 구타하는 사건도 생겼다.
4월 4일, 7일의 장곡면 시위

4월 7일 홍성군 장곡면 화계리 오경춘(吳敬春)은 종을 쳐서 주민들을 집합시켰다. 종소리를 듣고 사흘 전처럼 이웃 광성리, 신풍리 주민들도 가세하여 약 300명이 모여 장곡면사무소 뒷편 응봉산에 올라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장곡면 가송리 김동화(金東河, 東化)도 그날 오후 8시경 화계리 주민들과 앞산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도산리의 장곡면사무소로 나아갔다.
광성리·가송리 주민 300여 명도 응봉산에 합류했다. 한상철이 일제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고 독립선언문의 취지를 설명하였다. 면민들은 북을 치면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김동하의 주도로 대열을 지어 면사무소로 나아갔다. 면민들은 돌과 막대기 등으로 면사무소의 유리창과 각종 시설·기물·문서 등을 파손하였다. 오후 11시 반경 주민과 학생들 60여 명이 도산리에 모여서 면사무소를 공격하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급보를 듣고 일제는 경찰관 3명, 보병 2명을 급파하여 총기를 사용하여 해산시켰다. 주모자 이하 11명이 체포되고, 부상자 2명이 생겼다.
4월 4일, 7일 구항면 시위
구항면 만세시위는 4월 4일에 금마·홍북·홍동에서와 같이 횃불만세운동으로 시작되었다.
황곡리 유학자 이설(李楔)의 제자인 이길성(李吉性)은 ‘대한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종이 깃발을 제작한 후 4월 7일 밤 구항면 황곡리 일월산[日月山]에 올라가 깃발을 세우고 화톳불(篝火)을 피우며 황문수(黃文秀), 이유홍(李有弘) 이희보(李熙輔) 등 여러 주민과 함께 대한국 독립만세를 외쳤다.
군경이 출동하여 총격을 가하며 쫓아오자 이들은 일단 하산하였다가 군경을 따돌리고 월산의 다른 정상에 올라 또다시 독립만세를 불렀다.
4월 8일 홍동면 만세시위

4월 9일 은하면, 갈산면 만세시위
은하면에서는 3월 21일 대천리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있었고, 4월 9일에는 장곡리에서 전명규(田明圭)·신이진(申利鎭)·신치일(申致一)·전태용(田太用)·유학선(劉學先) 등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갈산면 상촌리에서는 4월 8일 오전 9시경 갈산공립보통학교 학생 60여 명이 교정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유림단의 파리장서 참여
민족대표 독립선언에서 참여하지 못한 유림계는 경상도의 곽종석(郭鍾錫), 김창숙(金昌淑) 등이 중심이 되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고 있는 파리강화회의에 조선의 독립 요구를 밝히고 독립을 청원하기로 하였다. 김창숙 등은 피리강화회의에 보낼 청원서 문안을 작성하고 이에 연명 서명서를 작성하기 위해 각 지역 유생들을 방문했는데, 경상북도 성주군 이기형(李基馨), 봉화군 권상원(權相元), 충청남도 홍성군 최중식(崔中軾), 청양군 안병찬(安炳瓚) 등은 각 거주지인 경북 성주군, 봉화군, 충남 홍성군, 청양군 등지 유림들에게 청원서에 서명하거나 대서하도록 하였다. 이 문서를 김창숙이 파리로 가져갈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사건을 파리장서사건이라고 한다. 홍성은 조선 유학의 영남 유림과 더불어 양대 기둥의 하나인 기호유림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파리장서 사건에서 홍성이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탄압 피해
일제의 무단 발포로 홍동면에서만 10명 순국했고, 4명이 부상을 입었다. 또한 34명이 옥고를 치렀다. 그중 장곡면이 집중적인 피해를 입었다. 태형으로 즉결처분을 받은 사람이 256명에 달했는데, 특히 연극 공연장 만세시위를 한 금마면의 경우 176명이 태형을 받았고, 그중에서 90도(度) 태형이 161명에 달해 집중적인 탄압을 받았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3·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3·1운동기념사업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3·1운동은 우리 독립운동사뿐만 아니라 한국근현대사에 있어 가장 크고도 깊은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이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