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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가 [2022/02] 조국 제단에 모든 것을 바친 형제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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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형제들의 용감한 독립투쟁


피로 이어진 우애와 애국심으로

독립전쟁의 선봉에 서다


글 | 편집부 


피는 물보다 진하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형제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일어섰다. 전 재산을 아낌없이 처분해 독립군을 양성하고 독립전쟁을 위한 무기를 사들였다. 그리고 목숨 바쳐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형 아우 구별 없이 모두 혼신으로 싸웠다. 일제의 보복으로 가족을 잃고 대가 끊기는 비극과 맞닥뜨렸지만, 끝끝내 좌절하지 않고 조국광복을 위해 전진했다. 영양실조, 풍토병, 옥중순국, 교수형, 고문 후유증 등으로 세상을 떠나면서도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깊은 우애를 잃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위대한 형제들의 용감한 투쟁을 우리는 영원히 기억하고 추모해야 하리라. 

전 재산 처분해 신흥무관학교 운영
이회영 여섯 형제

일제강점기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전 재산과 목숨까지 아낌없이 내놓았던 우당 이회영 6형제는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명사로 손꼽힌다.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낸 백사 이항복의 10대손 6형제 중 넷째인 이회영은 1905년 을사늑약에 이어 1910년 한일병합으로 나라를 빼앗기자 국내 독립운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형제들을 설득해 전 재산을 비밀리에 처분했다. 그리고 6형제의 가족 60여 명과 만주로 집단 망명했다. 당시 처분한 재산이 40만 원 정도인데, 1969년 물가 기준으로 약 600억 원, 2013년 기준 약 2조 원에 달하는 거액이다. 

6형제의 전 재산은 최초의 독립군 양성학교인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운영하는 데 사용되었다. 신흥무관학교는 10년간 약 3,500명의 독립군 장교와 병사들을 양성했으며, 이들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훗날 광복군의 주역이 되어 일제에 맞서 싸웠다. 

6형제는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전력을 다해 독립투쟁을 펼쳤다. 첫째 이건영은 서당을 경영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조선 10대 갑부로 꼽혔던 둘째 이석영은 신흥무관학교 운영자금의 대부분을 감당했으며, 신흥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셋째 이철영은 한족 자치기관인 경학사를 조직하고, 이주 동포들의 정착과 생업지도 등에 전력을 다했다. 넷째 이회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며 임시의정원으로 선출돼 활동했다. 다섯째 이시영은 임시정부 법무총장, 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여섯째 이호영은 신흥학교 재무 운영에 전념했으며 친일인사 처단과 재정, 무기 지원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전 재산과 열정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한 6형제의 최후는 비참했다. 이건영은 만주 땅에서 얻은 질병으로 타계했고, 이석영은 전 재산과 함께 두 아들마저 독립전쟁에서 전사해 대(代)가 끊어진 채 중국 상하이의 빈민가에서 영양실조로 외롭게 별세했다. 이철영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풍토병으로 사망했다. 형제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이회영은 뤼순 감옥에서 재판도 없이 모진 고문을 받다가 순국했다. 형제 중 유일하게 생존한 이시영은 광복 후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역임했고 신흥대학(현 경희대학교)을 설립한 후 1953년 6·25전쟁 중 별세했다. 이호영은 만주에서 의병으로 활약하던 중 일본군의 습격으로 가족 전체가 몰살당해 시신도 찾지 못했다.

봉오동전투 대승리 이끈 주역
최진동·최운산 형제

만주에 이회영 형제가 있었다면, 북간도에선 최진동 형제가 있었다. 최진동 형제는 오늘날 화폐가치로 수백억에 달하는 전 재산을 쏟아부어 독립투쟁에 매진했다. 1912년 비적들로부터 동포들을 지킬 목적으로 독립군의 모태가 된 100여 명의 자경단을 만들었다. 또 봉오동 사관학교와 사관연성소를 창설해 독립군 지휘관을 양성했다. 1915년에는 연병장과 막사를 만들고 토성을 건설해 독립군 기지를 구축했다.

최진동 형제의 아버지 최우삼은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일가를 이끌고 봉오동으로 이주, 한인 마을을 건설했다. 최진동은 중국인 부호 밑에서 일해 큰 재산을 물려받았다고 한다. 만주 군벌 장쩌림 부대에 있었던 최운산은 장쩌림의 목숨을 구해 준 각별한 인연으로 봉오동 일대에 부산 면적의 6배나 되는 땅을 갖고 있었다. 또 여러 공장과 대규모 목장도 소유해 간도 제일의 거부로 통했다.

최진동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형제와 같이 조국광복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싸울 것을 결의했다. 이후 동지를 모아 독군부(督軍府)를 조직하고 부장(사령관)에 취임했다. 동생 최운산은 참모장, 셋째 최치흥은 참모가 됐다. 최진동은 무기를 구입해 군인 500여 명을 장총으로 무장시키고, 4개 중대로 나누어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20년 6월 홍범도와 함께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120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이후 봉오동전투 대승리를 이끌었다. 일제와 싸우는 동안 부인과 큰아들, 맏며느리를 잃는 아픔을 겪다가 1941년 일제의 압박과 감시 속에서 병마로 사망했다.

막대한 재력을 가진 최운산은 각 부대에 주둔지를 제공하고 식량과 피복을 지급했다. 또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해주까지 진출했던 체코군의 무기를 사들였다. 독립군들은 신형 무기로 체계화된 군사훈련을 받았다. 최운산은 1930년대에도 무장세력을 유지하며 우수리강 전투, 대황구 전투, 안산리 전투, 대전자령 전투 등을 이끌며 독립투쟁을 계속했다. 1945년까지 대황구 삼림지역에서 무장독립군을 양성했다. 1937년에는 보천보 전투의 배후로 지목돼 투옥됐다. 광복 직전까지 6번이나 투옥돼 심한 고문을 받았다. 1945년 7월 5일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대일항전에 큰 공로 세운 의병장
김원국·김원범 형제

1907년 7월 고종의 강제퇴위와 정미7조약의 체결, 이어진 군대해산 조치로 일제의 식민지화가 본격화되자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고 곳곳에서 교전이 끊이지 않았다. 그중 특히 전라도 지역은 1908년 이후 후기의병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만큼 수많은 의병부대가 활약한 곳이다. 

김원국·김원범은 전라도 광주 출신의 형제 의병장이다. 형 김원국은 1905년 광산군 송정리에서 일본군을 타살한 후 이듬해 3월 무등산에서 300명의 의병을 규합해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고, 동생 김원범은 선봉장이 됐다. 1907년 9월에는 호남의병장의 거목인 기삼연 의병부대에 합류했고, 이어 12월 김준과 합진해 일본군 4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뒀다.

동생 김원범 또한 1908년 7월 전해산 의병장과 함께 대동창의단을 조직해 중군장으로서 영광 불갑산, 장성 동화, 담양 한재, 함평 원야 등 여러 지역에서 활약했다. 1908년 9월 김원국은 의병장 조경환 의진에서 도포장으로 활동하던 동생 김원범을 따라 선봉장이 돼 부하 100여 명을 거느리고 전남 나주, 함평, 광주 어등산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그러나 호남의병을 초토화하려는 일본군의 대대적인 탄압작전으로 김원범은 1909년 1월 광주 어등산 전투에서 체포된 후 자결 순국했다.

김원국은 동생의 체포 이후 의병을 수습해 의병대장이 되었다. 나주향교 유림들에게 격문을 보내 의병을 일으킬 뜻을 알렸고, 일본인이 장악한 광주 세무서에 대해서는 ‘호남의소’의 이름으로 세금을 거두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일본인에게 아부하는 친일파, 일진회원, 밀정 등을 처단한다고 경고했다.

이후 독립적인 의병부대를 이끌어 함평군 적량면 등을 거점으로 광주, 나주, 동복, 창평 등 전라남도 지역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는 등 적극적인 대일항전을 전개해 큰 성과를 거뒀으나, 불갑산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치료 중 적의 기습에 체포되고 말았다. 재판과정에서 김원국은 동생 김원범이 일본 헌병에 살해된 것에 대한 보복과 국가를 위해 의병대장이 됐음을 당당히 밝히고 1910년 5월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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