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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2022/03] 보재 이상설의 삶과 구국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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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에 서전서죽 세우고 헤이그 특사로 기약 없는 망명길 

자주독립의 꿈 향한 험난한 여정


글 | 권용우(단국대학교 명예교수)     


1906년 4월, 보재는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고 언제 돌아올는지 기약 없는 망명의 길에 올랐다. 상해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북간도에 이르렀다. 그는 이곳에서 미리 이주해온 동포들과 뜻을 모아 근대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구국독립운동의 씨앗을 뿌리기 시작하였다. 1907년 6월 25일, 보재 선생은 이준, 이위종과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도착했다. 국제사회에 일제의 악랄한 대한정책(對韓政策)을 알리고 한국의 입장을 호소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힘의 논리’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7월 14일,울분이 병이 되어 이준이 서거했다. 1907년, 보재는 나라 잃은 슬픔을 되새기며 헤이그를 떠나 다시 자주독립의 꿈을 향해 험난한 발길을 옮겨놓았다. 


1917년 3월 2일, 이날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이 러시아 니코리스크(현재 우스리스크)에서 47년의 짧은 삶을 마감하고 순국하였다. 


보재는 1871년 1월 27일(음력 1870년 12월 7일) 충청북도 진천에서 이행우(李行雨)의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일곱 살 되던 해에 동부승지(同副承旨) 이용우(李龍雨)에게 입양되어 한학(漢學)을 공부하면서 세상에 눈떠갔다. 그리고 189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관직에 입문하였다. 이때 보재의 학문은 성리학의 기초 위에 신학문을 접목시켜가면서, 법률·정치·경제·철학·종교 등에 있어서 높은 경지에 올라있었다. 그리고 이 무렵 보재는 미국 선교사 헐버트(Hulbert, H. B.)와의 교유를 통해서 선진학문을 공부하면서 ‘급격하게 밀려오는 외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의 우리나라에 대한 압박은 날이 갈수록 거세져만 갔다.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명성황후가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지휘한 일본군에 의해서 참살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시작으로 한 일본의 우리나라에 대한 정책은 강경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같은 해 11월 15일(음력), 일본은 김홍집(金弘集) 친일내각을 앞세워 단발령을 선포하고, 11월 17일(음력)을 1896년 1월 1일로 변경하고 양력을 쓰게 하는 을미개혁을 단행하였다. 일본은 거칠 것이 없었다. 


한편, 궁궐에서 황후가 일본군에 의해서 무참하게 참살되는 상황을 지켜보았던 고종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러시아 공사 웨베르(Weber, K. I.)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였다. 이것이 1896년 2월 11일의 일이었다. 그런데 국왕이 신변의 안전을 위하여 왕궁을 떠나 외국의 공사관에 머물고 있다는 것은 국가의 자주성을 훼손한다는 비판의 소리가 잇따랐다. 


이러한 비판의 소리가 나날이 높아지자 고종은 1897년 3월 경운궁(慶運宮, 지금의 덕수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고종은 환궁 후 통치체제를 정비하고, 자주독립국가의 면모를 갖추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大韓)으로’ 바꾸고,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자주독립국가임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그러나 나라는 여전히 세계열강들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더욱이 일본의 침략의 손길은 나날이 거칠어져 갔다. 1904년 2월 23일, 일본은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체결하고, 이를 구실로 하여 내정간섭을 노골화하였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였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은 강제로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을 체결하고 우리의 외교권마저 빼앗아갔다. 이때 의정부 참찬의 자리에 있던 보재는 일본군의 방해를 받아 어전회의에 참석도 하지 못했다. 보재는 조약의 체결을 끝까지 반대했던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과 두 손을 맞잡고 통곡하였다. 


충정공 민영환(閔泳煥)이 순국하면서 2천만 동포에게 남긴 피맺힌 유서가 필자의 가슴을 찌잉하게 한다. “아! 슬프다. 나라의 수치와 국민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 민족은 장차 생존경쟁에 진멸되고 말 것이다. … 우리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 이별을 고하노라!” 이것이 어찌 민 충정공 혼자만의 심정이었으랴!


고종황제 밀명 받아 헤이그 특사로 파견


1906년 4월, 보재는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고 언제 돌아올는지 기약 없는 망명의 길에 올랐다. 보재는 인천항에서 중국상선을 타고 상해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를 거쳐 북간도에 이르렀다. 이곳은 일본의 감시를 피하기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 러시아와의 교섭이 편리한 곳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미리 이주해온 동포들과 뜻을 모아 근대교육기관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여 구국독립운동의 씨앗을 뿌리기 시작하였다. 보재는 20세 전후의 청년들을 모아 항일민족교육을 실시하면서, 고국으로부터 고종황제의 제2의 밀명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1907년 4월, 보재는 고종황제의 특사로서 고국을 출발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오게 될 전 평리원 검사 이준(李儁)을 만나기 위하여 북간도를 떠났다. 한편 1907년 4월 22일, 이준은 고종황제의 신임장(信任狀)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Nikolai, A.) 2세에게 전달할 친서를 휴대하고 일본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부산을 거쳐 길을 재촉하였다. 전 러시아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李瑋鍾)도 만나야 한다. 


이렇게 해서, 보재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준과 이위종을 만나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Hague)에서 개최되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The International Peace Conference)에 참석하기 위하여 또 다시 먼 길을 떠났다. 이때 보재가 정사, 이준이 부사의 임무를 띄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미국·러시아·영국·프랑스·이탈리아 등 세계열강들에게 1905년 11월의 을사오조약의 불법성을 알리고, 잃어버린 국권을 회복하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있었다.    


이들 특사 일행은 러시아의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로 향하였다. 이들이 먼저 할 일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고종황제의 친서를 전달하는 일이었다. 이들 일행은 5월 20일에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여 니콜라이 2세에게 고종황제의 친서를 전달하면서 특사의 임무를 개시하였다. 이들 특사 세 사람은 더 이상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만국평화회의는 45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6월 16일부터 진행되었는데, 이들 세 사람이 헤이그에 도착한 것은 6월 25일이었다. 그런데 이 회의는 세계 45개국이 모인 국제회의이므로, 일제의 악랄한 대한정책(對韓政策)을 알리고 한국의 입장을 호소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들 특사 일행은 회의장인 드 리더잘(De Ridderzaal)을 둘러본 후 드용(De Jong) 호텔에 여장을 풀고, 호텔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특사로서의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각오를 다졌다. 이들 특사의 마음은 참으로 바빴다. 세 사람이 이마를 마주하고, 자료를 살펴보면서 대책을 논의하였다. 6월 29일, 특사 일행은 만국평화회의의 의장인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Nelidov)를 만나 고종황제의 신임장을 제시하고, 한국대표로 회의 참석을 요청하였지만 허사였다. 넬리도프도, 주최국인 네덜란드도 한국에서 온 특사들에게 귀 기울여주지 않았다. 고종황제의 국권회복의 노력이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하는 순간이었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특사 일행은 참으로 암담하였다. 국제사회의 ‘힘의 논리’에 부딪히고 말았다. 7월 14일, 울분이 병이 되어 이준이 서거했다. 보재는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 나라잃은 슬픔을 되새기며 언론을 통해 한국의 실정을 국제사회에 알렸다.  


1907년, 보재는 헤이그를 떠나 다시 자주독립의 꿈을 향해 험난한 발길을 옮겨놓았다. 보재가 걸었던 가시밭길을 되돌아보면서, 이 글을 마무리한다.  


필자  권용우 

단국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 국립 Herzen 교육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단국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학생처장ㆍ법과대학장ㆍ산업노사대학원장ㆍ행정법무대학원장ㆍ부총장ㆍ총장 직무대행 등의 보직을 수행하였다. 전공분야는 민법이며, 그중에서 특히 불법행위법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을 하였다. 정년 이후에는 정심서실(正心書室)을 열고, 정심법학(正心法學) 포럼 대표를 맡아서 회원들과 법학관련 학술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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