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선열 역사기행 [2022/05] 진관사 칠성각 흙벽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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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초월 스님이 지킨 태극기가
후세에도 늘 살아서 펄럭이길
글 | 강소이(시인, 여행작가)
칠성각 안으로 들어가 그 모습을 사진기에 담아 본다. 두 사람 정도가 누우면 꽉 찰 정도의 작은 방에서 백초월 스님이 태극기와 신문들을 감추고 계실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급박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수차례 체포되면서 일본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정신병자 행세를 한 백초월 스님. 정신병으로 석방되어 나오면 또 독립운동을 하다가 또 체포되고 심한 고문을 당하고 병으로 풀려나고 또 체포되고…. 진관사와 마포나루에 있는 극락암(진관사 포교당)을 거점으로 전국 사찰을 돌아다니며 은밀한 독립운동과 신문 배포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오뚝이 같은 스님이었다.
369,000여 일 동안 그 절에서는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을까?
고려 때, 반대파가 대량원군을 죽이려 하자 진관조사가 절(그때는 신혈사) 대웅전 불상 뒤에 숨겨 목숨을 구해준다. 대량원군이 현종으로 등극한 후 진관조사의 이름을 따서 지어준 보은(報恩)의 절이 진관사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살생한 것을 참회하기 위해, 이 절에서 수륙제를 베풀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 후 왕실의 지원을 받으며 수륙제가 몇 차례 올려졌다고 한다. 지금은 비구니(女僧)들의 기도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절이다. 북한산 비봉으로 등산을 가는 등산객들이 스쳐지나가는 곳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진관사를 거점으로 불교가 독립운동에 깊게 관여했던 천년고찰임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은 것 같다.
태극기와 신문들 감추고 있을
백초월 스님을 상상해보니
구파발역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타면 10여 분 만에 진관사 입구에 내려준다. 천천히 산 공기를 마시면서 산길을 걷다보면 10여 분 만에 닿을 수 있는 곳이 진관사이다. 멀리 북한산의 봉우리들로 둘러싸인 진관사의 풍광은 사람들의 마음을 끌고도 남음이 있다. 며칠 전 구파발역에서 내려 진관사 칠성각을 찾아 나지막한 산길을 걷다가 절 입구 100여 미터 앞에 넓적한 돌에 새겨진 태극기를 보았다. 칠성각에서 90년 전에 발견된 기미독립운동 때 사용하던 태극기라고 한다.

민족대표 33인 중에 한용운 스님과 백용성 스님, 백초월 스님의 이름이 올라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만해 한용운 선생에 관한 공적은 여기저기에서 인정되어 심우장과 만해기념관이 남한산성에도 백담사에도 현재한다. 그의 생가도 충청도 홍성에 보존되어 있다. 만해는 ‘님의 침묵’이라는 시집으로도 유명하다.
종로 3가 대각사의 용성스님도 독립자금을 모아 상해임시정부로 보냈으며, 윤봉길 의사로 하여금 상해로 건너가 살신성인(殺身成仁)하도록 독려했던 독립운동가로 유명하다.
그분들에 못지않게 독립을 위해서 고군분투하신 백초월(1878~1944, 본명 白寅榮) 스님에 대해 아는 사람은 유족들과 역사학자들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주머니 속에 송곳은 밖으로 반드시 드러나는 법이며, 향을 쌌던 종이에서는 반드시 향내가 나는 법이다. 유족들의 노력으로 간신히 순국선열 명부에 이름만 건국포장으로 올라있던 그의 공적이 90년 만에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벽 속에 넣고 흙을 발라
태극기를 은폐한 이유
인간에게 재능과 재물을 주고, 비를 내려 풍년을 들게 해준다는 도교의 칠성신. 칠성신을 받드는 칠성각이 진관사 대웅전 오른쪽 후원에 있다.

어떤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헌신한 오뚝이 스님
백초월 스님은 항일 비밀결사 조직인 일심교(一心敎)와 보살계 법회를 통해 군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로 보낸다. 임시정부와 서울과의 긴밀한 비밀 연락망인 연통제가 이곳 진관사에 거점을 두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독립신문과 비밀 지하신문을 조선에 배포하며 독립운동을 벌였던 것이다. 독립신문들이 1919년 6월~12월 사이에 상해와 서울에서 발행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상해에서 발행된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신채호의 신대한신문(新大韓新聞), 천도교가 발행한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 등 똑같은 것이 두 부씩 있는 것으로 보아, 백초월 스님의 활동을 짐작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1920년 2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유학생들과 독립운동을 일으키려다가 체포되었고, 1920년 4월 상해임시정부에서 파견된 신상완 스님과 ‘승려의용군’을 조직, 군자금을 모으려다 또 체포된다. 수차례 체포되면서 일본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정신병자 행세를 하기 시작한다. 실제로 죽은 거북이와 얘기를 하는 등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바람에 체포된 뒤 정신병으로 금방 석방되어 나오면 또 독립운동을 하다가 또 체포되고 심한 고문을 당하고 병으로 풀려나고 또 체포되고…. 진관사와 마포나루에 있는 극락암(진관사 포교당)을 거점으로 전국 사찰을 돌아다니며 은밀한 독립운동과 신문 배포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오뚝이 같은 스님이었다. 머리를 인두로 지지는 고문을 심하게 받은 탓에 여름에 모기에 물려도 인식하지 못하고, 겨울에 문을 열어놓아도 추운 것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어떤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그를 따르는 일심교 회원들(70~80여 명)과 함께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운동을 벌여나가다가 1939년에 또 체포된다.
용산역에서 만주로 가는 군용열차에 박수남이 “대한독립만세”라는 낙서를 한다. 이 낙서사건의 주모자로 백초월 스님은 일본 경찰에 구속되어 3년 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하다가 대전 청주교도소로 이감되던 중 청주교도소에서 순국한다. 독립을 1년 앞둔 1944년 6월 29일의 일이었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에서 순국한 불교계 스님은 백초월 스님이 유일하다. 그의 시신은 청주시 상당구 금천동의 형무소 공동묘지에 안치되었다가 6·25 때 망실되었다. 그는 묘소 하나 남기지 않고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태극기와 신문자료들 속에 항일구국정신으로 남아있다. 2010년 2월 26일부터 3월 14일까지 광화문에 있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그 태극기와 재료들이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전시되었다. 지금은 진관사에 보관 중이다.
민족혼 상징하는 깃발로
후손들 가슴속에서 펄럭이길
진관사 종무소에 들러 자세한 설명을 듣고 그곳을 나와, 백초월 스님의 숱한 발자국이 서려 있는 길을 따라 걸었다. 마음이 저려왔다. 독립운동과 체포당함-고문-석방-독립운동-체포당함을 반복하면서도 그 길을 중단하지 않았던 스님의 발자취가 길에 묻어있는 것 같다. 지나가는 등산복 차림의 한 무리의 사람들 속에서 백초월 스님이 승복을 입고 걸어오실 것만 같다.
진관사 태극기가 백초월 스님과 함께 민족혼을 상징하는 깃발로 후손들의 가슴속에서 늘 살아서 펄럭이길 기대해 본다.

서울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나와 교육대학원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했으며, 월간 <시문학>으로 시, <서울문학>에 수필로 등단했다. 한국시문학문회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국제협력위원으로 있다. 문단에 나와 시와 수필, 평론 등을 쓰며 문학의 지평을 넓혀왔던 필자는 최근 역사 유적지 여행을 정리한 『독립운동가 숨을 만나다 1, 2, 3권』을 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