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가는 역사를 다시 생각한다 [2022/05] 3·1만세운동의 성지 강화 원도심 스토리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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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고려·조선·일제강점기·산업화시대의 공존
한민족 반만년 역사가 피고 지고
장대한 대서사가 골목마다 가득
글 | 편집부 사진 | 강화군청·한국관광공사
강화군은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지붕 없는 박물관’이다. 최초의 국가 고조선부터 고구려, 고려, 조선, 3·1운동과 산업화 시대의 흔적이 공존하고 있다. 특히 원도심은 강화의 역사, 산업, 종교를 한눈에 만날 수 있는 매력적인 도보여행 코스다. 1970년대 방직공장, 3·1독립만세기념비, 700년 수령의 은행나무, 독립운동의 현장인 강화중앙교회와 합일초등학교 독립운동길…. 1970년대 시공간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랐다가 다시 치열한 3·1운동의 현장으로, 멀리 고려시대까지 넘나든다. 좁다란 골목에 이토록 장대한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은 없으리라.

산수유, 개나리, 목련, 벚꽃, 진달래, 철쭉… 꽃이 피고 꽃이 진다. 온통 꽃세상이다. 덕분에 매일 어여쁜 꽃길을 걷는 행운을 누린다. 이 얼마나 축복받은 계절인가. 이래저래 팍팍한 삶이, 고단한 마음이 알록달록 봄꽃으로 물든다.
강화읍 원도심으로 떠나는 여행길에도 꽃길이 이어진다. 연분홍 진달래, 그 수줍은 빛깔에 마음이 빼앗긴다. 잎도 없이 홀로 꽃을 피우니 벌과 나비들이 찾기 쉬워 반긴다. 소월의 시 ‘진달래꽃’이 입술을 맴돌고, 앙증맞은 화전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여고 시절 ‘진달래꽃’을 응원가로 부르며 얼마나 신이 났던가. 진달래 하면 강화 고려산을 빼놓을 수 없다. 정상 능선을 따라 펼쳐진 분홍색 ‘꽃대궐’은 황홀경 그 자체다. 코로나19로 3년째 진달래 개화기에 빗장을 걸어 잠근 탓에, 그리움이 더욱 사무친다.
고조선 단군부터 시작되는
강화의 역사
인천 강화는 아주 매력적인 여행지다. 바다와 명산, 고찰에 섬까지 다채로운 볼거리가 넘쳐나고 신선한 해산물이 사시사철 풍부하다. 고려시대부터 전해온 강화도의 명물 ‘젓국갈비’와 밴댕이, 갯벌장어도 빼놓을 수 없다.

무엇보다 강화는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지붕 없는 박물관’이다. 장대한 역사는 대한민국 최초의 국가 고조선부터 시작한다. 강화군 화도면에 위치한 마니산 정상에는 단군이 천제를 올리던 곳이라 전해지는 참성단이 있다. 고려산에는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태어났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시대 서해안 수비 체제의 흔적인 초지진과 광성보를 통해 당시 신미양요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원도심은 강화의 역사, 산업, 종교를 한눈에 만날 수 있는 매력적인 도보여행 코스다. ‘강화 원도심 스토리워크’라 이름 붙여진 이곳은 강화 역사만이 아닌 대한민국 근대사와 연결돼 있기에 더욱 의미 있다.
1970년대 산업화 시대 전성기를 느낄 수 있는 심도직물 터, 한옥으로 지어진 가장 오래된 교회인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강화3·1독립만세기념비, 고려시대부터 마을을 지켜온 700년 수령의 은행나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식 방직공장이었던 조양방직, 강화의 독립운동 현장인 강화중앙교회, 합일초등학교 독립운동길…. 1970년대에 머물렀던 시점은 어느새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랐다가 다시 치열한 3·1운동의 현장으로, 또다시 저 멀리 고려시대까지 넘나든다. 좁다란 마을 길에 이토록 장대한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은 없으리라.
조선시대, 3·1운동
그리고 산업화 현장
지붕 없는 역사박물관의 출발점은 ‘용흥궁공원’이다. 이 공원은 삼도직물이 있었던 터다. 삼도직물은 1947년 설립된 이후로 1970년대 종사했던 종업원이 1,200명에 달할 정도로 큰 규모였다. 지금은 용흥궁공원 내에 공장 굴뚝의 일부만 남아 있다.

공원 한쪽에 이웃한 ‘용흥궁’은 조선 25대 왕인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살던 집이다. 창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처럼 살림집 형태로 지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내전 1동, 외전 1동, 별전 1동 등이며 궁 안에는 철종이 살았던 곳임을 알려 주는 비석과 비각이 자리하고 있다. 1995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20호로 지정됐다.
용흥궁의 다른 한쪽으로 고개를 조금 돌리면 언덕 위에 있는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이 눈에 들어온다. 성당의 내부는 유럽식이지만 외형은 전통 한옥 양식으로 지어졌다. 1900년 11월에 지어져 처음 형태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공원의 한쪽 길가에는 강화3·1독립만세기념비가 서 있다. 강화도에서는 1919년 3월 7일, 강화읍 장날을 맞아 관청리 웃장터에서 강화군민과 김포군민 2만 4,000여 명이 합세해 대규모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를 기록하고자 1994년 견자산 기슭에 처음 세워졌던 기념비는 1996년 만세운동의 현장인 웃장터(은혜교회 안)로 옮겼다가 2011년 지금 위치로 옮겨졌다.
강화산성 북문으로 올라가는 길목, 주변 다른 나무들에 비해 월등하게 큰 나무가 있다면 잠시 걸음을 멈추자. 한눈에 보기에도 거대한 이 은행나무가 심어진 시기는 무려 1300년경 고려시대라고 전해진다. 1982년 강화군이 ‘보호수’로 지정할 당시 688년 수령이었으니, 지금은 나이가 700세를 훌쩍 넘긴 셈이다. 세월의 굽이굽이마다 소리 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던 역사의 산증인이다.

발길을 이어가면 강화 직물산업의 흔적인 ‘이화견직 담장길’ 스토리보드에 다다른다. 1970년대까지 강화읍은 우리나라 최고의 직물 생산지로 당시 직물업계의 선두를 달리던 대구와 견줄 만큼 직물산업이 번성했다. 당시 강화읍에는 심도직물을 위시해 이화직물, 조양방직, 평화직물 등 크고 작은 수십 개의 직물공장이 있었다.
강화의 직물 역사를 품은 핵심 장소인 ‘조양방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식 방직공장으로 1960년대까지 국내 최고의 인조직물을 생산했지만,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값싼 중국산 직물에 밀려 쇠락의 길을 걸었다. 지금은 리모델링해 카페 겸 미술관으로 변신했다. 과거 골동품 수집가였던 주인장의 손길 덕에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뉴트로(Newtro) 명소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홍익인간, 계몽교육
그리고 독립운동
1900년에 창립돼 섬사람들의 교육과 계몽, 민족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해온 잠두교회는 강화읍교회를 거쳐 1976년 강화중앙교회로 명칭을 바꿔 강화읍 향나무길에 우뚝 서 있다. 1901년 잠두교회 부설 ‘잠두의숙’으로 시작된 합일초등학교는 1901년 미국인 선교사 조원식과 강화교회의 박능일 목사에 의해 설립됐다. ‘후세를 교육하지 않으면 독립도 어렵다’는 일념으로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을 강화하고 계몽과 독립을 이루려 했던 의지가 담겨 있다. 초등학교 담장에 설치된 스토리보드에는 김구 선생의 휘호 ‘홍익인간’과 독립운동을 했던 강화사람들에 대한 판결문을 부조 형식으로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때 교회의 역할은 종교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강화 3·1운동을 주도했던 조봉암 선생과 계몽운동의 선구자였던 최상현 합일초등학교 교장 등 독립과 교육에 앞장섰던 이들 모두 강화중앙교회 출신이었다. 교회 입구 쪽에 있는 기념비는 1907년 강화진위대(근대 지방군대)가 강제 해산되며 일어난 의병들이 일제에 의해 부당하게 목숨을 잃는 사건을 기리는 뜻으로 2003년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