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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러운 우리 것들 [2022/05] 선비정신의 본산 한국의 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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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자연이 소통·공존하는 사유와 배움의 공간


자연과 벗하며 우주와 인간 이치 연구

고결한 선비정신 오롯이 담겨


글 | 편집부  사진 | 문화재청  


우리나라 교육기관은 예로부터 국립대학 성균관, 국립지방학교 향교, 사립지방학교 서원이라는 큰 틀을 유지해왔다. 이 가운데 서원은 성리학의 가치관, 세계관, 자연관이 잘 반영된 공간으로 2019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서원의 입지·공간 구성, 건물 배치는 자연경관과 하나로 어우러지는 특징이 있다. 보통 마을 부근의 한적하면서도 산과 하천을 끼고 있는 곳에 설립됐는데, 주택과 사원, 정자의 건축 양식이 배합되어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닌다.  인간과 자연이 소통하며, 고결한 정신을 중시했던 한국의 서원을 둘러보며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한국의 교육열이 나아갈 지향점을 되새겨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리라.  


학문과 교육의 지방 확대에 공헌


서원은 조선시대 사립 교육기관으로 선현에 대한 제사와 학문 연구, 사림의 자제 교육을 담당했던 곳이다. 성리학이 조선 사회에 정착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학문과 교육의 지방 확대에 공헌했다. 유교적 향촌 질서 유지는 물론 시정(時政)을 비판하는 공론장 역할도 했다.


최초의 서원은 1543년(중종 38년)에 풍기 군수 주세봉이 안향(安珦)을 봉사하기 위해 세운 백운동서원이다. 이후 1548년 명종 때 이황의 건의로 백운동서원이 소수서원으로 사액(賜額)되고, 국가로부터 서적과 토지·노비 등을 받고 면세와 면역 특권까지 받으면서 경제적 기반을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많은 서원이 지방에 설치되었는데, 서원은 향교와는 다르게 각기 다른 선현들을 제사 지내는 것은 물론 운영에서도 독자성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선조 때에는 사액서원만 100개를 넘어섰고 18세기에는 700여 개, 고종 때는 1,000여 개에 이르렀다.


우리가 서원에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선비들의 고결한 정신이다. 당시 나라의 든든한 재정적 지원이 있었음에도 서원 건물들은 더없이 소박했다.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다. 얼마든지 크고 호화롭게 지을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물질)보다 안에 있는 마음(정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로 성리학을 신봉하는 선비의 정신이다. 


서원에는 반드시 심는 나무가 있다. 꽃이 백일 동안 붉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백일홍 나무(배롱나무)다. 배롱나무는 속이 다 비칠 정도로 껍질이 아주 얇다. 옛 선비들은 이 나무의 모습처럼 어떤 삿된 생각도 하지 않고 투명하게 살 것을 다짐했다.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선정된 한국의 서원에는 영주 소수서원, 경주 옥산서원, 안동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대구 달성 도동서원, 함양 남계서원, 정읍 무성서원, 장성 필암서원, 논산 돈암서원 등 9곳이 포함됐다. 모두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으로 지정돼 있으며, 보존·관리가 잘되어 있어 문화유산적 가치가 높다.

 

경북 영주 소수서원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조선시대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사액서원은 조선시대 왕으로부터 편액(扁額)·서적·토지·노비 등을 하사받아 그 권위를 인정받은 서원을 말한다. 1543년(중종 38) 풍기 군수 주세붕이 국내 주자학의 효시인 고려시대 학자 안향을 배향하고, 유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설립한 백운동서원이 사액받으면서 소수서원이 됐다. 소수서원은 가장 먼저 설립된 서원으로서 한국 서원의 강학 및 제향과 관련된 규정을 처음 제시한 기본 모델로 평가받는다. 이곳에서 이황의 문인인 김성일 등 4,000여 명의 인재가 배출됐다. 


경남 함양 남계서원


남계서원(南溪書院)은 강당 영역이 앞에 있고 사당 영역이 뒤에 있는 조선시대 서원 배치의 전형을 처음으로 제시한 서원이다. 1552년(명종 7) 경남 함양 출신인 조선시대 학자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을 모시기 위해 설립됐으며, 1566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남계서원은 지역 사림들이 설립한 최초의 사원으로, 민간인 신분의 사림들이 자발적으로 운영한 점이 특징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경남의 의병활동을 주도했으며, 이에 1595년(선조 28) 왜군에 의해 전소됐으나 1603년(선조 36) 재건됐다. 


경북 경주 옥산서원


옥산서원(玉山書院)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彥迪, 1491~1553)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기 위해 1573년 설립한 서원이다. 1574년 사액을 받았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당시 철폐되지 않은 47곳의 서원 중 하나다. 옥산서원은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남향이 아닌 서향으로 중심 건물들을 배치한 특징을 지닌다. 19세기 말 조정의 일방적 근대화 정책에 반발해 성리학 전통을 고수한 8,849명의 서명 상소인 만인소가 소장돼 있으며, 16세기 명필인 한호와 19세기 명필 추사 김정희의 편액이 걸려 있다. 


경북 안동 도산서원


도산서원(陶山書院)은 조선 중기 성리학의 대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학문을 하며 제자들을 가르친 도산서당을 모체로 하여, 퇴계 사후 4년째인 1574년 건립됐다. 특히 이듬해인 1575년 선조는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陶山書院)’ 현판을 하사하기도 했다. 이황의 문인 및 제자들의 학술공간으로서 성리학과 관련된 다양한 철학적 논쟁이 펼쳐졌으며, 정조는 1792년(정조 16) 이황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서 7,000여 명이 참가한 특별 과거를 실시하기도 했다. 주변 환경이 특히 뛰어나 도산서원의 경관을 주제로 한 시문(詩文)이 3,000여 점에 이른다.


전남 장성 필암서원


필암서원(筆巖書院)은 김인후(金麟厚, 1510~1560)의 도학을 추모하기 위해 1590년 건립된 서원으로, 평지에 세워진 서원 건축의 대표적인 사례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24년 복원되었으며, 1662년(현종 3) 사액되었다. 동남부 지역에서 시작된 서원운동이 서남부 지역까지 확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필암서원에는 노비의 명단과 계보도인 노비보가 현존해 있는데, 이는 국내에 존재하는 유일한 노비족보다. 


경북 대구 도동서원


도동서원(道東書院)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을 모시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1605년 보로동서원으로 건립돼 1607년 도동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다. 제사가 끝난 뒤 술이나 제물을 먹는 음복례를 엄격하게 시행하는 곳으로, 엄숙한 분위기에서 제관 모두가 음복례를 해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다. 낙동강을 북쪽으로 바라보게끔 건립돼 건물이 대부분 북향이며, 경사지를 활용한 서원의 건축 배치를 탁월하게 구현해냈다. 인근에는 김굉필의 묘소가 있는데, 묘제와 서원 제향을 결합한 유일한 서원이다. 


경북 안동 병산서원


병산서원(屛山書院)은 조선 선조 때의 재상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을 향사한 서원으로 경북 안동에 위치한다. 1613년(광해군 5) 설립됐으며 1863년(철종 14) 사액사원으로 승격되었다. 병산서원은 최초로 유생 수천 명이 연명한 유소(儒疏)를 올린 곳으로, 지역 공론장으로서 역할을 담당했다. 2010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의 일부이기도 하며 정면 7칸, 측면 2칸으로 된 누마루인 만대루(晩對樓)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충남 논산 돈암서원


돈암서원(遯巖書院)은 조선시대 예학(禮學)을 대성한 유학자인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을 추모하기 위해 그 위패를 모신 곳이다. 예학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가 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 연구된 학문으로, 김장생의 학문 세계는 그의 아들인 김집을 통해 조선 후기 송준길, 송시열로 이어졌으며 이들은 돈암서원에 추가로 배향됐다. 1634년(인조 12) 건립되었으며, 1660년(현종 1) 사액서원이 되었다. 


전북 정읍 무성서원


무성서원(武城書院)은 1696년 지방관의 향촌민에 대한 학문 부흥을 목적으로, 마을 가운데 세워진 서원이다. 원래 통일신라 말기의 학자인 최치원(崔致遠)을 제향하기 위한 태산사(泰山祠)였으나, 1696년(숙종 22) 사액을 받아 무성서원이 되었다. 지역사회의 강학과 성리학 연구를 중심으로 했던 다른 서원들과 달리 무성서원에 배향된 인물들은 향촌 교육과 연계돼 성리학의 가치를 보급하고 학문을 권장했다. 특히 향촌 자치규약인 향악과 관련이 깊어 지역민 결집에 중요 역할을 했고, 최익현과 임병찬이 이곳에서 항일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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