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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 역사기행 [2022/06] 한용운 선생의 심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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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 비유로 저항정신 불태우며

‘님’ 향한 일편단심 오롯이 지키다 


글 | 강소이(시인, 여행작가) 


두 번이나 결혼을 했던 스님, 두 여인에게서 각각 아들과 딸을 낳고, 방대한 불교 서적을 남기고, 시집과 소설 작품을 남기고, 서대문형무소에 두 번이나 투옥되었던 스님. 일제강점기라는 격랑(激浪) 속에서나 조계종 종단에서나 문밖에 세워진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하며 마음이 아려왔던 인제 만해마을 여행. 은유, 상징이라는 비유의 문학 장치를 통해 저항정신과 독립의지를 불태웠던 작가. 삼엄한 감시와 억압 속에서 그렇게 가슴 조이며 문학을 통해서 일제에 저항한 그의 열정이 놀랍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5번의 행장을 꾸려본 적이 있는가?


갈 때마다 그는 나를 외면하기라도 하듯 만나주질 않았다. 한성대역에서 내려 그의 유택에 도착했던 지난해 겨울. 물어물어 골목길을 더듬어 간신히 찾아갔을 때는 짧은 겨울해가 이미 집으로 돌아간 시각. 닫힌 문을 빠끔히 열고 그의 집에 들어서니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불빛 없는 성북동 언덕 위에 한옥집. 


3대(三代)가 적선을 해야 남향집에서 살 수 있다는데, 구지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는 고집 센 스님의 유택. 66세의 생을 살면서 그는 참으로 많은 일들을 하셨다는 생각을 하며 그의 집을 어둠 속에서 둘러보았다. 


일제강점기 격랑 속에서나 

종단에서나 문밖에 서있는 사람


두 번이나 결혼을 했던 스님, 두 여인에게서 각각 아들과 딸을 낳고, 방대한 불교 서적을 남기고, 시집과 소설 작품을 남기고, 서대문형무소에 두 번이나 투옥되었던 스님. 충청도 홍성에 그의 생가, 강원도 인제 백담사에 그의 문학관, 남한산성기념관, 성북동 심우장, 종로3가 탑골공원에 세워진 그의 동상…….  무엇이 그를 이렇게 기리고 기념하게 하는 것일까? 그가 살아있던 생전에는 불교 조계종 종단에서는 그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진보적인 불교계 청년단체에서만 그를 찾을 뿐이었다. 


첫 번째 부인과 아들을 버리고 스님이 된 것도 모자라, 스님도 결혼하게 해달라는 대처승제도를 주장하기 일쑤였고, 결혼하지 않고 수도에만 힘쓰는 다른 스님들과 달리, 재혼을 하여 딸까지 낳았으니 그 시대에 노블레스 오블리주였으리라. 시와 소설을 쓰며, 논문과 칼럼을 신문에 내는 일에 열심이었으니 그리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을 것은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말년에 그는 사찰을 떠나 “서울에 남은 마지막 달동네” 성북동 언덕에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의 동료 스님 김적음이 내어준 땅 52평에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 등 뜻있는 유지들의 도움으로 땅을 사서 말년을 보내다가 사망한 곳이 심우장이다. 


몇 달 전 문인협회에서 단체로 떠났던 만해문학관 기행. 단체로 가기 전 미리 사전 답사를 위해 다녀왔음에도 그의 문학관에서 나는 그를 만나지 못했다. 아니 그는 나를 만나주질 않았다. 만해문학관 입구에 세워진 그의 동상이며, 유리관 속에 전시되어 있던 그의 저서들을 들여다보면서, 그의 일대기에 대해서 사유하며 벽에 붙어있던 전시물을 꼼꼼히 살펴보고 기록했을 뿐. 특히, 단체 여행 때는 문우들과 사진 찍느라 그를 담을 마음의 저장 공간이 남아있질 않았다. 기억에 남는 것은 사진 속에 담긴 문우들 얼굴과 만해의 저서 몇 가지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문학관 밖에 도포차림으로 서 있는 그의 동상에 내리던 눈발만이 나의 기억창고를 꽉 채우고 있었다. 일제강점기를 사셨던 많은 이들이 겪었을 시련과 역경이 고스란히 다가오는 듯한 느낌. 눈을 맞고 서 계신 그는 일제강점기라는 격랑(激浪) 속에서나 조계종 종단에서나 문밖에 세워진 시린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하며 마음이 아려왔던 인제 만해마을 여행. 


성북동 골짜기 ‘심우장’에서 

저술에만 힘쓰며 말년 보내


1897년 구한말 혼란기에 태어나 1944년에 사망하기까지 일제 강점기를 살아냈던 스님, 만해 한용운. 그는 너무 큰 인물이어서 어떤 각도에서 글을 써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몇 해 전 경상북도 영양 조지훈 문학관에 들렀을 때였다. 조지훈 시인이 만해를 연구하여 논문집을 몇 권씩 두꺼운 책으로 시리즈로 낸 것을 전시실에서 볼 수 있었다. 시리즈로 다뤄지는 만해를 짧은 답사기로 써낸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주눅이 들어있던 모양이다. 여행을 다녀오면 언제나 기행문을 써놓곤 했는데, 글의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다. 


성 밖 마을 북장골, 한적한 동네-성북동 골짜기 셋방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던 만해에게 동료 승려 벽산(碧山) 김적음이 땅을 내어준다. 김적음이 자신의 초당을 지으려고 준비한 땅 52평을 내어주자,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 등 뜻있는 유지들의 도움으로 땅을 더 사서 집을 짓고 ‘심우장’이라고 이름 한다. 그곳에서 저술에만 힘쓰며 말년을 보내게 된다. 


승려로서의 그의 행보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자. 대각사의 백용성 스님이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던 것처럼, 만해 역시 불교가 대중화되어야 함을 주장하며 포교에 힘썼다. 개신교와 천주교 등 서양 종교와 문물이 밀려들어 오는 때에, 불교가 산사(山寺)에서만 고립되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불교 대중화의 일환으로 그는 어려운 불교 경전을 쉬운 한글로 번역하는 것에 주력하였다. 또한 불경 대중화를 위한 작업으로 양산 통도사에서 방대한 팔만대장경을 모두 열람하여 『불교대전』을 편찬한다. 1914년 4월 30일 범어사에서 찬술 발행되어 불교 경전 현대화 작업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된다. 또한, 백담사에 머물면서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하고 1913년 5월 25일 불교 서관에서 발행한다. 불교인이든 아니든 인간에게는 누구나 정신이 유신을 해야 하며 그 길만이 조선이 살아갈 수 있는 길임을 강조하며 유신 운동의 기본적인 목표와 방향이 정신문화 혁명에 있다고 주장한다. 


매서운 눈빛의 독립운동가 

옥중에서 『조선독립의 서』 집필


이 책을 저술하기 3년 전의 일을 살펴보자. 1910년 말 원종(圓宗) 종무원 이회광이 불교 확장이라는 미명 아래 일본에 가서 원종이 일본 조동종과 연합 동맹할 것을 협약하고 오는 일이 있었다. 1911년 만해는 박한영, 백용성과 이회광 규탄 및 승려 궐기대회를 개최하여 그를 종문난적(宗文亂賊)으로 규정, 원종에 대응하는 임제종(臨濟宗)을 창립한다. 이 일은 그 전까지 불분명했던 만해의 반제국주의 사상이 뚜렷해지는 계기가 된다. 


정교 분립을 주장-종교를 정부 혹은 일제 체제의 하수인으로 삼으려는 조선총독부·학무국 정책에 반대하는 운동으로 이어져 일본 형사들의 감시를 받게 된다. 이러한 일제에 대한 1931년 승려 비밀결사단체인 만당(卍黨)을 조직하고 당수가 되었으나 1937년 불교관계 항일 단체로 적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재구속되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여기서 그의 서대문형무소 최초의 구속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독립만세를 세 번 선창한 이가 만해 한용운이었다. 민족 대표 33인 중에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백용성 스님의 도장도 그가 찍었다는 일설도 전해진다. 


이 일로 인해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을 복역하게 된다. 그때 일본 경찰에 의해 죄수복을 입은 사진이 강제로 찍힌 것이 형무소 담벽에 붙어 있는 그 사진인 것이다. 반항심이 가득한 청년의 분노한 저항의 눈빛. 그 매서운 눈빛의 독립운동가는 옥중에서 『조선독립의 서』를 집필하다가 발각되어 형사에게 제출해야 했다. 일부를 휴지에 작은 글씨로 옮겨 적었고, 그것을 형무소 밖으로 나가는 의복 갈피에 넣어 외부로 나오는 데 성공한다. 그 선언서는 중국 상해까지 전달되게 된다. 그의 옥바라지를 하던 제자 춘성을 통해 종이를 노끈처럼 말아 상해로 보내져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 1919년 11월 4일 기사 부록에 ‘조선 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라는 제목으로 발표 보도된다. “뜻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길이 있다”는 말이 생각난다. 글이란 화살처럼 날아갈 곳으로 날아가서 읽을 사람들에게 읽혀진다는 글의 생명력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권리와 자유와 평등에 대한 길을 가로막는 어떠한 형태의 무력, 군사력, 일제 정치는 결국 스스로의 덫에 걸려 스스로 패망하게 되리라는 내용”은 진리가 되고 상해 하늘로 화살이 되어 날아간 것이다. 이런 일이 계기가 되었는지 1922년 출옥 후, 그는 언론에 칼럼을 발표하는 동시에 1924년부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논설위원을 겸하게 된다. 


1925년부터 백담사에서 집필하여 경성 안동서관에서 1926년에 저항시집인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서게 된다. 당시 자유주의적 남녀 간의 연애를 위주로 하던 한국 문단의 영향을 받지 않고, 민족의 현실과 이상을 풍부한 시적 이미지로 형상화하여 민족 문학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었다. 조선의 독립과 자연을 ‘님’으로 표현하여 부처 또는 이별한 연인으로 해석되는 중의적 화법을 통해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검열과 탄압을 피할 수 있었다. 

 

문학 작품 속 비유 통해 

저항정신과 독립의지 담아


그의 문학적인 욕심은 시에서 그치지 않았다. 1935년에 조선일보에 소설 ‘흑풍’을 연재했는데, 검열을 피하기 위해 청나라를 무대로 하여 여성해방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설파했다. 반봉건 정신 및 여성도 인격체라는 평등사상을 피력했다고 볼 수 있다. 1936년에는 조선중앙일보에 장편 ‘후회’를 연재하여 민족 운동을 전개하려는 의도를 다분히 보여주었다. 1938년에 소설 장편 ‘박명’을 발표하였다. 그의 문학작품들은 은유, 상징이라는 비유의 문학 장치를 통해 그의 저항정신과 독립의지를 숨겨서 나타낸 것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직설적인 표현은 검열의 그물망을 피해나갈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 당시 삼엄한 감시와 억압 속에서 그렇게 가슴 조이며 문학을 통해서 일제에 저항한 그의 열정이 놀랍지 않을 수 없다. 그를 시인, 소설가, 대처승, 불교계의 저술가로만 알고 있던 후손들에게 1960년 들어서 그가 독립운동가로 활약했던 사실이 부각되기 시작한다. 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을 만해가 기술했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가 선명하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민족대표 33인 중에 대다수(최남선 등)는 일제가 주는 은사금을 받고 생활비를 충당했다고 한다. 끝까지 은사금을 마다하고 저항의 의지를 버리지 않았던 최후의 두 사람 중에 한 분이 한용운 선생이다. 


일제 때 독립운동을 했던 독립지사들이 한둘이 아니지만, 유독 만해 한용운이 우리들 마음을 깊이 파고드는 것은 그의 문학 작품이 주는 여운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필자 강소이 

서울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나와 교육대학원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했으며, 월간 <시문학>으로 시, <서울문학>에 수필로 등단했다. 한국시문학문회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국제협력위원으로 있다. 문단에 나와 시와 수필, 평론 등을 쓰며 문학의 지평을 넓혀왔던 필자는 최근 역사 유적지 여행을 정리한  『독립운동가 숨을 만나다 1, 2, 3권』을 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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