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우리 것들 [2022/06] 한국의 등(燈) 축제 연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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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진 우리 사회 비춰 온 ‘천년의 빛’
기쁨 나누고 위기 극복에 기여
가족·이웃·나라 위해 복을 빌다
글 | 편집부 사진 | 문화재청
우리나라 교육기관은 예로부터 국립대학 성균관, 국립지방학교 향교, 사립지방학교 서원이라는 큰 틀을 유지해왔다. 이 가운데 서원은 성리학의 가치관, 세계관, 자연관이 잘 반영된 공간으로 2019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서원의 입지·공간 구성, 건물 배치는 자연경관과 하나로 어우러지는 특징이 있다. 보통 마을 부근의 한적하면서도 산과 하천을 끼고 있는 곳에 설립됐는데, 주택과 사원, 정자의 건축 양식이 배합되어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닌다. 인간과 자연이 소통하며, 고결한 정신을 중시했던 한국의 서원을 둘러보며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한국의 교육열이 나아갈 지향점을 되새겨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리라.
해마다 열리는 연등회는 아기 부처상을 목욕시키는 관불(灌佛)의식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런 다음 부처의 지혜를 상징하는 등불을 손에 들고 행진한다. 일반인들은 자신과 가족, 이웃 그리고 나라를 위해서 복을 비는 마음으로 자신이 만든 연등을 들고 참여할 수 있다.
연등회 참가자들은 ‘종이꽃’ 같은 것으로 연등을 장식한다. 전통적으로 종이꽃은 불교 의식에서 부처에게 공양하는 예물로 이용되었지만, 샤머니즘 의식이나 조선왕조의 왕실 행사에서도 사용되었다. 형태도 크기도 서로 다른 연등은 다양한 문화적 의미를 담고 있다. 거북 모양의 등은 장수를, 수박처럼 씨앗이 많은 과일은 다산과 번영을 상징한다.
등불을 밝힌다는 것은 부처의 지혜를 통해 개인과 공동체, 전체 사회의 마음을 밝히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행렬을 마친 참가자들은 전통놀이 등을 함께하면서 잠시나마 사회적 경계를 허물고 단결하는 즐거움을 누린다.
2012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2020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는 연등회가 ‘시대를 지나며 바뀌어온 포용성으로 문화적 다양성을 보여주는 점’, ‘기쁨을 나누고 위기를 극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 등을 높이 평가했다.
신라시대 국가적 행사로 거행
정월 대보름에 풍년과 복 빌어

『삼국사기』의 신라본기(新羅本紀)에는 관등 행사가 매년 정월 15일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국세시기』에는 정월을 등절(燈節)이라 하여 등을 밝히면서 밤을 새웠으며, 대보름에는 횃불을 들고 높은 곳에 올라 달맞이를 하면서 풍년과 흉년을 점치고 풍년을 빌었다고 한다. 이러한 풍속은 불교적이라기보다는 고대로부터 전해온 풍년기원제의 성격이 강했다.
또한 『동국세시기』에는 2월 초에 제주도에서 있던 영신제(迎神祭)와 함께 연등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신라의 연등은 사농(司農)과 호국호법(護國護法)으로서의 용신(龍神)에 대한 제사, 태일성제(太一星祭), 그 밖에 민족적 행사가 불교의 등공양과 접목된 종합적 가무제(歌舞祭)로 행해졌으며, 그 행사는 호국신앙의 대본산(大本山)인 황룡사에서 거행되었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부터 성대한 국가 의례
부처님 탄생일에도 연등 행사 열려
연등회는 특히 고려 때 성행했다. 고려 시대에는 태조의 ‘훈요십조(訓要十條)’에 따라 국가 의례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초기에는 정월 15일에 연등이 있었으며, 정월 15일의 연등이 987년(성종 6) 10월 정회(停會)되었다가 현종 때 2월 15일로 다시 만들어져 고려 시대 멸망 때까지 열렸다. 고려 중반에는 부처님이 태어난 날(사월 초파일)에도 열렸다. 이 행사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에 빈번히 나타나고 있다.
1105년(숙종 10)에는 정월에 연등을 행했고, 의종 때의 연등회는 20회 모두 정월에 열렸다. 1105년 연등회에는 “천지신명(天地神明)을 모셨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태조의 정신을 추종함을 의미하고 있다. 의종 때는 인종의 기일을 피하려 정월 연등을 행했다고 전해진다. 이 밖에도 연등은 망일(望日, 보름날)에 여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그날이 한식(寒食)이면 15일 미리 앞당겨서 열기도 했다. 그리고 정기적인 연등회 외에 특설 연등회가 수시로 있었음을 볼 수 있다.
1067년(문종 21)에 흥왕사가 낙성되었을 때 축제와 함께 5일 밤낮 동안 연등회가 성대히 치러졌다. 1073년 2월에는 봉은사에서 불상을 새로 조성하고 경찬(慶讚)을 위한 연등회가 열려 관등과 주연이 밤늦도록 베풀어졌음을 볼 수 있다.
공민왕은 직접 초파일 연등을 열었고, 이때부터 초파일 연등은 일반 서민층에까지 확대되었다. 어린이들이 연등의 비용을 만들기 위해서 한 달 전부터 종이를 오려서 대나무에 기를 만들어 달고 성중(城中)을 다니면서 쌀과 베를 구하는 호기풍속(呼旗風俗)이 본격화되었다. 공민왕도 두 차례에 걸쳐 어린이들에게 쌀 등을 하사한 적이 있다. 이 호기풍속은 연등 행사가 일종의 민속으로 변해 조선 시대의 연등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사람들은 한 해가 시작되는 정월 대보름에 대나무와 종이로 등을 만들어 성문과 큰길가에 매달았다. 밤에는 등에 불을 켜서 성안을 대낮같이 밝혔다.
국왕과 왕족, 신하들은 절에서 태조 왕건에게 제사를 올렸으며, 다음날 수만 개의 연등이 밝혀져 있는 성의 모습을 구경하며 잔치를 벌였다. 백성들도 절에 가서 향을 피우고 그해의 복을 빌었다. 궁궐 앞의 무대에서 공연되는 춤과 음악, 곡예를 구경했으며 전국에서 올라온 상인들이 갖가지 특산품과 진기한 물건들을 가져와 임시 시장이 열리기도 했다. 백성들은 밝은 등불 아래 성안을 돌아다니면서 밤새도록 연등회를 즐겼다.
조선 시대 들어서면서 크게 쇠퇴
연등만 민속처럼 전승

조선 초기에는 상원 연등과 초파일 연등이 계속되었으나, 1415년(태조 15)에 초파일 연등을 중지시켰고, 1416년 이후의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월 연등에 관한 기록이 없다. 다만 1414년부터 정월 연등을 대신해 수륙재(水陸齋)가 열렸다. 수륙은 물과 육지에 사는 수많은 영(靈)을 공양하는 의식으로, 조선 태조는 수륙재를 2월과 10월에 개최했다. 이는 불교 신자인 태조가 유생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호국신앙의 성격을 띤 수륙재를 통해 연등과 팔관을 정기적 행사로 합리화시킨 노력이라 볼 수 있다.
정월 15일의 연등은 조선 시대에 와서 수륙재라는 이질적인 현상을 나타내었지만, 초파일 연등은 많은 기복을 겪으면서도 꾸준하게 전승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조선 시대 사월 초파일 연등 행사는 며칠 전부터 준비가 시작되었다. 민가와 관청, 시장, 거리의 집집마다 대나무에 등을 쭉 매달아 묶어 세우고 오색 비단으로 꾸몄다. 등은 학, 잉어, 거북, 오리, 연꽃 등 다양한 모양으로 만들었으며 밤이 되면 늘어선 연등에 불을 붙여 세상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