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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기업열전 [2020/06] 민족기업열전 - 유한양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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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기업의 대명사, 유한양행


유일한 박사의 유산 계승해 100년 기업 발돋움 

고귀한 나라사랑 정신이뿌리 깊은 버드나무로 자라다

 

버드나무는 봄이 되면 가장 먼저 녹색 잎을 틔운다. 그리하여 예로부터 상서로운 생명을 의미했다. ‘버들표가 유한양행의 상징이 된 이유다. 창업주 유일한 박사가 버드나무를 심은 지 어느덧 94년이 되었다. 거의 100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유한양행은 민족기업에서 정직과 신용의 대표기업으로, 가장 존경받는 기업으로 올곧게 성장해 왔다. 국민건강과 인재양성을 위해 헌신하고, 선한 영향력을 전파하는 일에 앞장서온 유한양행의 아름다운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국민건강 지키기 위해 제약회사 설립

열한 살 어린 나이에 홀로 미국 유학을 떠났던 유일한 박사는 21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다. 서슬 퍼런 일제치하에서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보며 건강한 국민만이 잃어버린 주권을 찾을 수 있다는 신념을 굳혔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6년 민족기업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당시 의약품은 한약재나 한약을 매약화한 것이 주종이었다. 양약을 수입하려면 일본의 면허나 허가가 필요했고 일본 회사가 우선순위였다. 민족기업이 설 땅은 없었다. 그럼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의약품 수입을 독점하던 일본 상사들과 경쟁하며 국민건강을 지켜내려 애썼다.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독립운동이라 여겼기에 열과 성을 다했다.

유한양행은 당시 만연하던 피부병·결핵·학질·기생충 감염 치료제를 비롯해 소독제·위생재료·혈청·백신 등 의약품을 보급했다. 수입 의약품의 의존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체 생산에도 뛰어들었다. 1933년 자체 1호 개발품인 안티푸라민이 탄생했다. 이를 시작으로 구충제·피부병 약을 제조, 판매하기 시작했다.

1936년에는 제약 공장과 실험 연구소를 건립하고 주식회사로 변경했다. 1937년부터 중국, 베트남 등에 위장약·구충제·결핵치료제를 수출했다. 만주를 비롯해 미국 로스앤젤레스 등에 해외 지사와 공장, 출장소도 세웠다. 중국인, 일본인, 러시아인이 근무하는 다국적 기업이자 글로벌 1세대 기업이었다.

회사 설립 10여 년 만에 일군 성과라니 참으로 놀랍다. 조국독립을 향한 간절함이 원동력이 되었으리라. 유한양행은 일제강점기라는 척박한 땅 위에 뿌리를 내리고 건강한 생명의 싹을 틔웠다.

 

기술 인재 키워 국가발전의 토대 만들어

민족기업 유한양행의 길은 남달랐다. 유일한 박사는 국가, 교육, 기업, 가정 이 모든 것은 순위를 정하기가 매우 어려운 명제들이다. 그러나 나로 말하면 국가, 교육, 기업, 가정의 순위가 된다고 말했다.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업이윤보다 조국독립을 우선했던 창업주의 신념은 인재양성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는 숙련된 기술 인재를 키워 민족의 역량을 높이는 것이 독립은 물론 지속적인 국가발전의 토대가 되리라 확신했다. 유한공업고등학교 등을 설립 운영했고, 개인 주식을 각종 장학기금으로 출연하는 등 장학 및 교육 사업에 헌신했다.

1971년 세상을 떠날 때에는 전 재산을 기부했다. 공개된 유언장의 내용은 우리 사회에 깊은 울림을 남겼다.

 

손녀에게는 대학 졸업까지 학자금 1만 달러를 준다.

딸에게는 학교 안에 있는 묘소와 주변 땅 5천 평을 물려준다.

그 땅을 동산으로 꾸미고, 결코 울타리를 치지 말고 중·고교 학생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게 하여 그 어린 학생들이 티 없이 맑은 정신에 깃든 젊은 의지를 지하에서나마 더불어 느끼게 해 달라.

내 소유 주식은 전부 사회에 기증한다.

- 고 유일한 박사의 유언장 중에서

유언에 따라, 창업주의 재산은 공익법인인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현재 유한재단과 유한학원의 전신)’에 기부되었다. 기업의 최대주주가 공익재단이 돼 기업이윤을 사회로 환원하는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유한양행의 최대주주는 유한재단과 유한학원이다. 회사 수익은 배당을 통해 재단과 학원으로 들어간다. 기업 이익이 사회적 이익 증대로 이어지는 유한양행의 사례는 국내 최초 기업의 사회적 책임 모델로 평가받는다.

 

정도 걸으며 기업 경영사에 의미 있는 발자취 남겨

유한양행은 창업주의 고귀한 유산(遺産)을 계승해 제약업계 맏형으로서 정도(正道)를 걸어왔다.

1937년 주식 일부를 종업원에 나눠주는 종업원 지주제를 국내 최초로 도입했다. 1998, 2002년에는 상장사로는 처음 임원은 물론 일반 직원에게도 스톡옵션을 나눠줬다. 창업 이후 노사 분규를 한 번도 겪지 않은 것도 유한양행의 자랑이다. 1969년부터 시작된 전문경영인 체제 덕분에 임직원 누구에게나 CEO가 되는 길이 열려 있고, 임직원 모두가 주인이라는 의식이 강하다.

유한양행에는 노사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상생하고 협력하는 노노관계만 있을 뿐이다. 2010년 노사문화대상 국무총리상을 수상했고, 2011년 일터혁신 우수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2013년과 2018년에는 정부포상에서 최고 영예인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2013년 제약업계 매출 1위 기업으로 올라선 유한양행은 2014년 업계 최초 매출 1조 원을 달성했다. 창업 이래 무()적자 기록을 이어왔으며, 매년 높은 매출 성장과 성실한 납세로 국가경제 발전에 기여했다. 공정경쟁을 통한 건강한 상거래를 유지하고, 환경친화경영으로 환경보호에도 앞장서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 17년 연속 1위라는 명예로운 기록을 세웠다.

유한양행은 창립 때부터 시작된 국민건강과 인재양성의 원칙을 변함없이 지키고 있다.

제약기업의 특성을 살려 노인성 질환 맞춤형 프로그램, 취약계층 대상 구강보건교육 등 지역사회 건강증진에 앞장서고 있다. 특히 창업주의 애국애족 정신을 이어나가기 위해 매년 광복절에 안티푸라민 제품을 담은 나라사랑 꾸러미를 만들어 국가유공자들에게 전한다.

미래 세대를 위한 다양한 교육 지원 및 멘토링 활동에도 열심이다. 대학생 대상 유일한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유일한 박사의 독립·역사의식을 되새길 수 있는 사업을 진행했다. 청소년들은 이 시대의 독립운동가가 되어 다양한 사회문제의 해결책을 모색해보는 기회를 가졌다.

 

100년 기업을 향한 힘찬 날갯짓

창립 94주년을 맞은 유한양행은 ‘Great Yuhan, Global Yuhan’이라는 비전 아래 100년 기업을 향한 힘찬 날갯짓을 하고 있다. 특히 미래 성장동력의 핵심역량인 R&D(연구개발) 부문의 투자를 지속 확대하고 있다. 유한양행의 2019R&D 투자금액은 1,382억 원 규모로 2016864억 원 대비 50% 이상 증가했다. 올해 연간 R&D 투자 규모는 2,000억 원에 이를 전망이다.

이정희 사장은 단기적인 이익 성장에만 몰두하지 않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부분에 역점을 두고 있다며 투자 배경을 설명했다. 나아가 신약 개발은 오랜 시간과 많은 투자가 선행되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소명으로, 이는 미래의 희망이 된다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중장기적 관점에서 R&D를 더욱 강화해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의지를 천명했다.

일제강점기라는 척박한 땅 위에 뿌리 내렸던 버드나무는 이제 국내를 넘어 세상을 건강하게 지키는 큰 나무로 성장했다. 연이은 해외 기술수출로 K바이오를 이끌고 있으며, 오픈이노베이션을 통한 글로벌 신약개발이 성과를 내고 있다.

한 평생 오직 국가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민족주의자의 고귀한 나라사랑 정신은 유한양행을 키우는 소중한 밑거름이 되어 백 년 천 년이 흘러도 변함없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가장 푸르른 잎을 틔우리라. 한 세기를 올곧게 걸어온 유한양행의 새로운 미래에 더 큰 박수를 보낸다  

 

유일한 박사의 항일독립운동

 

1895년 평양에서 태어난 유일한 박사는 열한 살 때인 1905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1909년 박용만이 미주 지역에서 최초로 설립한 한인소년병학교에 입학해 오전에는 농장에서 학비를 벌고, 오후에는 학과공부와 군사훈련을 병행했다. 3년 동안의 생활을 통해 형성된 민족의식과 자주독립 사상은 훗날 항일독립운동과 기업경영의 나침반이 되었다.

미시간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한인자유대회에 대의원 자격으로 서재필, 이승만, 조병옥, 임병직 등과 함께 참가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라초이 식품회사를 설립,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25년 조국독립에 기여하고자 귀국했다. 1926년 유한양행을 설립했으며 연희전문학교 교수로도 활동했다. 유한양행의 해외지사는 전략적으로 주요한 도시에 세워졌으며, 이들은 유사시에 항일운동의 지하조직으로 운영할 방침이었다.

193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 체류하면서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1941년 하와이에서 열린 해외한족대회에서 중책을 맡았다. 이 대회는 대한민국 임정의 후원 아래 항일독립전선에 모든 역량을 집결해 광복대업을 이루기 위해 구상되었다. 유일한 박사는 과업에 전념하기 위해 1941년 유한양행을 주식회사로 바꾸고 사장직을 유명한에게 넘겼다.

이듬해인 1942년 미군 전략정보처 OSS(CIA의 전신)의 한국담당 고문으로 활약했다. 1945년 국토수복작전인 냅코(NAPKO) 프로젝트의 제1조 조장으로 발탁되어 공작원 훈련까지 받았다. 명령을 기다리던 중 일제의 항복으로 작전실행을 하지 못했지만, 50세 나이에 항일 특수공작에 자원하여 당당히 죽음에 맞설 만큼 애국애족 정신이 투철했다.

정부에서는 유일한 박사의 공훈을 인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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