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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 사랑방 [2022/10] 가을 절기 한로와 상강 중양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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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 이슬 맺히며 완연한 가을로 넘어가는 때


국화전 안주에 국화주 한잔으로

몸과 마음 모두 겨울 채비 단단히


글 | 김영조(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소장)



양력 10월에는 24절기 가운데 ‘한로’와 ‘상강’이 들어 있다. 이제 완연한 가을로 들어선 것이다. 한로(寒露)는 찬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는 때라는 뜻이다. 한로가 지나면 제비도 강남으로 가고 대신 기러기가 날아온다. 백로 다음에 오는 상강(霜降)은 서리가 내리는 때인데 벌써 하루해 길이는 노루꼬리처럼 뭉텅 짧아졌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면 하룻밤 새 들판 풍경은 완연히 다르다.  

“한로(寒露)는 이슬이 내리고 날은 점점 쌀쌀해지는데, 그 이슬은 서리가 된다. 상강(霜降)은 풀은 죽이지만 만물의 열매를 익게 한다. 비록 죽이면서도 생성의 길이 있어서 곡우(穀雨)와 서로 짝한다.” 이는 조선 후기 실학자인 위백규(魏伯珪)가 쓴 시문집 《존재집(存齋集)》에 나오는 내용이다. 양력 10월에는 24절기 가운데 ‘한로’와 ‘상강’이 들어 있다. 이제 완연한 가을로 들어선 것이다.

특히 한로(寒露)는 24절기 가운데 열일곱째로 찬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는 때라는 뜻이다. 한로가 지나면 제비도 강남으로 가고 대신 기러기가 날아온다. 《고려사》에 보면 “한로는 9월의 절기다. 초후에 기러기가 와서 머물고 차후에 참새가 큰물에 들어가 조개가 된다. 말후에 국화꽃이 누렇게 핀다”라고 기록했다. 이렇게 옛사람들은 한로에서 상강 사이 15일 동안을 5일씩으로 나누어 세밀하게 날씨 변화를 관찰했으나 ‘차후에 참새가 큰물에 들어가 조개가 된다’라고 하는 말은 현대인이 이해하기 힘든 말이다.

한로의 들녘,  
농부는 길손과 함께 막걸리 한 잔

한로 무렵은 찬이슬이 맺힐 때여서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가을걷이를 끝내야 하므로 농촌은 오곡백과를 수확하기 위해 눈코 뜰 새가 없다. 이때 농부들이 열심히 일하고 쉬는 새참에는 지나가는 길손을 불러 함께 밥을 먹고 막걸리 한 사발도 나눠 먹을 만큼 후한 인심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 가을 들판에는 콤바인이 굉음을 울리며 논을 누비면서 거두고 타작을 함과 동시에 나락을 가마니에 담아내고 있어 옛 정취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또한 대부분 자동차를 타고 달리기에 한가롭게 길가는 나그네도 볼 수가 없고 콤바인으로 뚝딱 해치우는 가을걷이 탓에 예전처럼 막걸리 한잔을 나누거나 논둑에 앉아서 새참 먹는 모습도 보기 어려워졌다. 
또 한로 때는 부지런히 나락을 베는 것 말고도 메주콩과 팥을 베어 도리깨로 털고, 그것들을 다시 햇볕에 말린다. 그뿐만이 아니라 가을걷이가 바빠도 틈틈이 겨울농사도 준비해야 한다. 겨울농사로 보리씨를 뿌리고 심어야 겨울이 오기 전에 뿌리를 내려 추위를 이겨낸다. 특히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때를 잘 알려주는 것이 절기 ‘한로’인데 양기가 성하던 것이 음기가 점점 많아지니 찬 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찬 이슬은 서리로 바뀌고 드디어 음기의 끝인 눈으로 변한다. 이런 것을 보면서 농부들은 “철을 안다”라고 했는데 “철을 안다”든가 “철이 났다”든가 하는 말은 아이가 어른이 되고, 그래서 성숙한 농부가 됐다는 뜻이 담겨 있는 말이다.

상강, 노루꼬리처럼 
뭉텅 짧아진 하루해

백로 다음에 오는 24절기의 열여덟째 상강(霜降)은 올해엔 양력 10월 23일이다. 말 그대로 서리가 내리는 때인데 벌써 하루해 길이는 노루꼬리처럼 뭉텅 짧아졌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면 하룻밤 새 들판 풍경은 완연히 다르다. 된서리 한방에 푸르던 잎들이 수채색 물감으로 범벅을 만든 듯 누렇고 빨갛게 바뀌었다. 그리고 서서히 그 단풍은 하나둘 떨어져 지고 나무들은 헐벗는다. 옛사람들의 말에 “한로불산냉(寒露不算冷), 상강변료천(霜降變了天)”이란 말이 있다. 이는 “한로 때엔 차가움을 별로 느끼지 못하지만, 상강 때엔 날씨가 급변한다”라는 뜻이다. 상강이야말로 가을 절기는 끝나고 겨울로 들어서기 직전이다.

“한밤중에 된서리가 팔방에 두루 내리니, 숙연히 천지가 한번 깨끗해지네. 바라보이는 산 모습이 점점 파리해 보이고, 구름 끝에는 기러기가 놀라 나란히 가로질러 가네. 시냇가의 쇠잔한 버들은 잎에 병이 들어 시드는데, 울타리 아래에 이슬이 내려 찬 꽃부리가 빛나네. 하지만 근심이 되는 것은 늙은 농부가 가을이 다 가면, 때로 서풍을 맞으며 깨진 술잔을 씻는 것이라네.” 

위는 조선 중기 문신 권문해(權文海)의 《초간선생문집(草澗先生文集)》에 나오는 상강에 관한 내용이다. 상강(霜降)은 말 그대로 물기가 땅 위에서 엉겨 서리가 내리는 때인데,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첫얼음이 얼기도 한다.

갑자기 날씨가 싸늘해진 날 한 스님이 운문(雲門, 864~949) 선사에게 “나뭇잎이 시들어 바람에 떨어지면 어떻게 되느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운문 선사는 “체로금풍(體露金風)이니라. 나무는 있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낼 것이고(體露), 천지엔 가을바람(金風)만 가득하겠지”라고 답했다고 한다. 상강이 지나면 추위에 약한 푸나무(식물)들은 자람이 멈춘다. 천지는 으스스하고 쓸쓸한 가운데 조용하고 평온한 상태로 들어가는데 들판과 뫼(산)는 깊어진 가을을 실감케 하는 정경을 보여준다.
이즈음 농가에서는 가을걷이로 한창 바쁘다. 〈농가월령가〉에 보면 “들에는 조, 피더미, 집 근처 콩, 팥가리, 벼 타작 마친 후에 틈나거든 두드리세…”라는 구절이 보인다. 이를 보면 상강 무렵엔 가을걷이할 곡식들이 사방에 널려 있어 일손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속담에 “가을에는 부지깽이도 덤빈다”, “가을 들판에는 대부인(大夫人) 마님이 나막신짝 들고 나선다”라는 말이 있는데, 쓸모없는 부지깽이도 필요할 만큼 바쁘고, 존귀하신 대부인까지 나서야 할 만큼 곡식 갈무리로 바쁨을 나타낸 말들이다. 또 이때부터는 가을걷이뿐만 아니라 겨우살이 채비를 서둘러야 할 때다.

이 삭막한 서릿발의 차가운 세상. 하지만 국화뿐 아니라 모과도 상강이 지나 서리를 맞아야 향이 더 진하다. 꽃은 늘 그 자리에 있는데, 향기는 느끼는 자의 몫이며, 상강을 맞아 그 진한 국화 향을 맡을 수 있는 것도 각자의 몫이다. 이 무렵 감국(甘菊)이라고 불리는 노란 국화로 만든 국화차는 지방간 예방에 좋은 콜린, 대사에 필요한 에너지로 쓰이는 아데닌이 풍부하다고 하니 투명 유리잔에 노란빛을 즐기며 마셔보는 일도 즐거운 일이리라. 또 상강 무렵엔 고혈압과 피부노화를 막는 비타민C·A, 탄닌, 칼륨과 마그네슘 등이 풍부한 먹음직스러운 감도 풍성하게 나오는 계절이다. 

모롱이 개암 열매 
제풀에 떨어지고
상강도 주춤주춤
잰걸음을 치는 저녁
부뚜막 개다리소반엔 
시래깃국 두 그릇
노부부 살강살강 
그릇을 비우는 사이
빈 마을 휘돌아 온 
살가운 바람 한 올
홍적세(洪績世) 
까만 시간을 되짚고 돌아왔다

위 시는 상강 즈음을 노래한 정용국 시인의 “아득하다”란 제목의 시로 서리 내리는 날 저녁, 노부부가 시래깃국을 마주하고 있는 모습이 쓸쓸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정겹게 느껴진다. 무서리가 내리고 늦가을 바람이 불어대면 더없이 황량하겠으나 노부부의 익어가는 사랑처럼 초가삼간 방안에는 어느새 화롯불이 훈훈하게 자리할 것이다. 

국화전 안주 삼아 
국화주 마시는 중양절

참고로 이달에는 명절의 하나로 지냈던 ‘중양절(重陽節)’이 양력 10월 4일(음력 9월 9일) 들어 있다. 

“임금이 신하들에게 의논하기를, ‘사신이 우리나라에 오면 설날·삼짇날·단오·유두(流頭)·칠석·한가위·중구(重九, 중양절)·동지(冬至) 같은 속절(俗節)에는 잔치를 베풀어 주는 것이 어떨까’ 하니, 모두 아뢰기를, ‘위의 여러 속절은 너무 많아서 번거로울 듯하오니, 유두와 칠석은 빼고, 그 나머지 여섯 명절에만 잔치하는 것이 마땅하옵니다. 그러나, 사신이 서울에 있으면 괜찮지만, 만약 먼 지방에 가 있으면, 여섯 명절에 다 사람을 보내어 잔치하기가 어려울 것이오니, 먼 지방에 가 있을 때는 설과 동지에만 사람을 보내어 위로함이 가하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위는 《세종실록》 13년(1431) 9월 12일 기록이다. 음력 9월 9일 ‘중양절’은 조선시대에 다른 나라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기까지 했던 명절이다. 우리 겨레는 음양사상에 따라 양수(홀수)가 겹친 날(설날·삼짇날·단오·칠석)을 길일로 여겨 명절로 지냈는데, 중양절도 그 가운데 하나다. 중양절은 숫자 ‘9’가 겹쳤다 하여 ‘중구(重九)’라 부르기도 한다. 신라 때는 중양절에 임금과 신하들이 함께 모여 시를 짓고 평을 하는 일종의 백일장을 열었다.

중양절 세시풍속으로는 ‘등고(登高)’가 있는데 붉은 산수유 열매를 담은 주머니를 차거나 머리에 꽂고 산에 올라가 국화전을 먹고 국화주를 마시며 즐겼다. 붉은 산수유 열매는 귀신을 쫓는다고 생각했다. 이 세시풍속은 1819년(순조 19) 김매순(金邁淳)이 쓴 한양의 연중행사를 기록한 책 《열양세시기》와 역시 조선 후기의 학자인 홍석모(洪錫謨)가 펴낸 세시풍속집 《동국세시기》에 기록되어 있다. 또 중양절에는 국화잎을 따다가 술을 담그고, 화전을 부쳐 먹기도 했다. 이때 마시는 국화주는 《동의보감》 《요록》 《고사십이집(攷事十二集)》 《임원십육지》 《규곤요람》 《음식법》 등에 빚는 법이 나와 있다. 이 밖에 한가위 때 햇곡식으로 차례를 올리지 못한 집에서는 이날 차례를 지내기도 한다. 

국화주는 하루에 세 번, 한 번에 한 잔씩 따뜻하게 데워 마시면 뼈와 근육이 튼튼해지고 오래 살게 된다고 알려졌다. 《본초강목》에는 두통을 낫게 하고 눈과 귀를 밝게 하며 백병을 없애는 효능이 있다고 하였다. 또 국화주는 예로부터 궁중의 축하주로 애용되었고, 중양절에 마시면 병이 생기지 않고, 장수한다고 하는 믿음이 전해진다. 중양절, 국화전을 안주로 국화주 한잔 어떨까? 

이제 양기가 성하던 것이 음기가 점점 많아지는 겨울로 다가서니 몸과 마음 모두 겨울 채비를 단단히 할 때다.  

필자 김영조 
2000년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2011년 한국문화사랑협회를 설립하여 한국문화를 널리 알리고 있다. 또한, 2015년 한국문화를 특화한 국내 유일의 한국문화 전문지 인터넷신문 <우리문화신문>을 창간하여 발행인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맛깔스런 우리 문화 속풀이 31가지》, 《하루하루가 잔치로세(2011년 문화관광부 우수도서)》, 《나눔을 실천한 한국의 명문종가》, 《아름다운 우리문화 산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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