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선열 역사기행 [2022/12] 시인의 폭탄 - 윤봉길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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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사 전날 훙커우 공원에서 또 한 편의 시를 짓다
글 | 강소이(시인, 여행작가)
윤우의 선생은 20세에 시집(詩集)을 세 권이나 낼 정도의 문학청년이었다. 그가 지은 한시(漢詩)가 300여 편에 달하고 그중 100여 편만이 전해진다고 하지만, 그는 문학청년을 넘어 시인이었다. 그리고, 시를 지을 때마다 자신의 별명인 봉길(奉吉)이라는 이름을 필명(筆名)처럼 사용했다. 해서 윤우의(尹禹儀)는 윤봉길이 되었다.
내가 그 시인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역사 시간부터였을 것이다. 물통과 도시락 폭탄으로만 알려진 윤우의(尹禹儀) 선생. 윤우의 선생은 20세에 시집(詩集)을 세 권이나 낼 정도의 문학청년이었다. 그가 지은 한시(漢詩)가 300여 편에 달하고 그중 100여 편만이 전해진다고 하지만, 그는 문학청년을 넘어 시인이었다. 그리고, 시를 지을 때마다 자신의 별명인 봉길(奉吉)이라는 이름을 필명(筆名)처럼 사용했다. 해서 윤우의(尹禹儀)는 윤봉길이 되었다. 그는 시인으로 정식 등단하지 않았고, 그 당시 문학청년들이 참여했던 어떤 동인지(同人誌)에도 들어간 적이 없다. 오치서숙에서 성주록(成周錄) 선생에게 한문학을 배웠고, 시가 좋아서 시를 지었을 뿐이다. 그가 시집을 묶었을 때는 먹을 것조차 부족하여 나라 전체에 궁핍이 극심한 때였다. 그럴 때 시집을 세 권이나 묶었다는 것은 그의 문학에 대한 애착과 애정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 일이다. 요즘도 쌀이 되지 않고, 밥이 되지 않는 게 시집 발간이다. 그는 손익계산을 모르는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57년을 남편 없이 살았던
독립투사의 아내
충청도 예산에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추사 고택과 화순옹주 정려각을 둘러보고 수덕사로 향하는 길이었다. ‘윤봉길 생가’, 그의 사당인 ‘충의사’ 표지판 앞을 지나게 되었다. 수덕사로 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뭔가에 사로잡힌 듯 그의 발자취를 둘러보았다. 그가 태어났다는 ‘광현당’, 그가 유년 시절을 보냈다는 ‘저한당’, 야학을 했다는 ‘부흥원’, ‘도중도(島中島)’를 혼자 둘러보았다. 함께 여행길에 올랐던 친구는 수덕사로 가야겠다고 하여 나 혼자 외로운 발걸음을 타박타박 옮겼던 기억. 청년 윤봉길 의사의 동상 앞에서 “왜 그러셨어요? 24세 꽃나이에? 임신 9개월째인 만삭의 아내와 어린 아들, 부모를 두고…. 왜요?”라고 그에게 물었다. 뙤약볕 아래 무궁화가 담장을 두르고 있었고, 아침을 거르고 새벽에 출발하느라 분주했던 그날. 쓰린 속을 초콜릿 몇 개로 달래면서 나는 윤봉길 의사보다 그의 아내 배용순 여사를 더 많이 생각했다. 배 여사는 16세에 한 살 연하인 윤봉길과 결혼하여 남편과 함께 산 것은 불과 6~7년, 25세에 남편을 잃었다. 1988년 82세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57년을 남편 없이 살았다. 독립투사의 아내라는 이름 하나 붙잡고…. 2만 8백 5일 정도 되는 긴 나날들이다. 2남 1녀를 두었지만, 윤 의사 생전에 딸을 일찍 여의었다. 둘째 아들이 유복자로 태어났지만, 그 아들도 영양실조로 두 살 때 잃게 된다. 그 당시 독립운동가의 집에 탄압이 심했고, 그 집에 떡 하나 갖다 주는 것도 일제의 감시가 극심하여 그의 가족은 궁핍했고, 젖이 돌지 않아 둘째 아들을 영양실조로 잃었다고 한다. 어떤 기록에는 아홉 살 때 복막염으로 죽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독립투사들의 집안 형편이 모두 어려웠듯이 윤 의사의 남겨진 유족들도 마찬가지였다. 해방 후 백범 김구의 아들(金信 장군)이 교통부장관으로 있을 때, 그의 알선으로 김포공항에서 스넥코너를 하며 어렵게 1남 6녀를 키워냈다는 김옥남(金玉南) 씨-윤 의사의 며느리-의 증언이다. 여기서, 윤 의사의 가족이 겪었을 칠흑의 시간들을 생각해 보자. 가족에게 그런 고통을 선물하고자 윤봉길 의사는 중국 망명길에 올랐었겠는가를.
법관보다 우위에
이상을 가진 자
고향 예산에 남아있었어도 일제의 감시와 간섭은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여 그는 중국 망명길에 올랐고, 다시는 가족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그의 편지는 자신의 앞날을 각오한 소치였을 것이다. 고향에 남아있었어도 결코 평탄하지도 편안하지도 못할 자신의 앞날을 내다본 결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린다. 아리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몇 년 전 충의사-윤봉길 의사 사당-를 찾았던 예산 여행을 다시 상기해 본다. 계단을 여러 개 올라가서야 그의 영정을 볼 수 있었다. 향 꽂고 묵념을 올리고 그의 영정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젊은 아빠를 본 적이 있다. 어린 딸을 데리고 충의사를 찾은 그 사람의 얼굴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도 알 길이 없다. 다만, 그때 윤봉길 의사를 기리기 위해 그곳을 찾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 묵념을 마치고 계단을 내려올 때 입구에 들어서는 20대 남녀도…. 중요한 것은 그를 기리는 이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발걸음들은 그의 동상 앞에서 내가 물었던 “왜?”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 같았다. 윤봉길 의사가 후대에 기려지고 존경을 받고 싶어서 그런 일을 했겠는가? 일본 수뇌부 장교 몇 명 처단하여 독립 영웅이 되고 싶다는 풍선 같은 영웅심으로 자신의 가족을 버렸었겠는가?

그날 나는 알 수 있었다. 예산 기념관에서 읽었던 문구 중에 “1929년 2월 부흥원 낙성식을 치르면서 윤 의사가 ‘토끼와 여우’라는 아동 학예회 연극을 공연했고, 그것을 계기로 윤 의사가 주재소로 불려가 취조를 당하고 협박을 받기 시작했다는 것을. 일본 제국주의 강압 통치를 비판하는 내용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그 후 윤 의사가 예산에서 벌였던 농촌계몽 운동이나 야학 등의 모든 일은 일제의 간섭과 감시의 도마 위에 있었다. 주재소로 불려가 문초를 당하기 일쑤였다. 자신이 신념을 갖고 하는 일에 누군가의 제재를 당한다면 그것을 반가워할 이가 누가 있겠는가? 윤봉길 의사처럼 감수성이 예민하여 시를 쓰는 올곧은 성정을 갖은 사람에겐 몹시 괴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일제의 총칼이 무서워서 눈치를 보며 자신의 신념을 접었을 것이다. 혹은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내려주는 은사금으로 호의호식하며 함포고복(含哺鼓腹)을 누렸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 윤봉길은 달랐다. 관(官)을 쓰지 않았으나 법관(法官)보다 우위에 이상(理想)을 가진 자, 윤봉길 시인.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고, 옳은 것은 옳다고 할 줄 아는 참 시인 정신을 가진 이가 윤봉길 시인이었다. 그런 윤봉길에게 이흑룡의 상하이행 권유는 그의 운명의 지침을 바꿔놓은 활시위가 되었다.
공원에 나 있는 잡초를 보고도
그냥 지나치지 못한 감수성

며칠 전, 양재동에 있는 ‘매헌 윤봉길 기념관’을 방문했었다. 그날도 영하의 칼바람이 볼을 때려대는 날씨였다. 관람객이 별로 많지 않은 썰렁했던 기념관. 거기서 보았던 사진 몇 장이 우리 일행을 더 춥게 했다. ‘가나자와市 미고우지 육군공병 작업장’에서 총살당하는 모습의 사진. 두 눈을 헝겊으로 가리고 무릎을 꿇린 채 보잘것없는 나무 십자가에 양팔이 묶인 채 당한 총살. 1932년 12월 19일 아침 7시 30분에 울린 총성(銃聲). 최후까지 그에게 고통을 주려고 심장을 쏘는 대신 양미간 중앙을 쏘았고, 윤 의사는 13분간 괴로워하다가 숨을 거두었다는 해설사의 설명이다. ‘가나자와지 공동묘지’ 인근 쓰레기처리장에 봉분도 없이 평장(平葬)으로 암매장되었다. 아니, 일본은 시신을 수습하지도 염도 하지 않은 채 쓰레기를 처리하듯 그렇게 윤봉길 의사를 땅속에 버리고 흙을 덮었다. 십자 나무틀에서 내리지도 신발을 벗기지도 않은 채 버려진 것이다. 해방되어 1946년 3월, 김구 선생이 윤 의사의 유해를 발굴해낼 때까지, 쓰레기를 버리러 오가는 일본인들이 윤 의사를 밟고 지나다녔다. 그의 유해가 1946년 6월 16일 고국 땅으로 운구되어 7월에 국민장으로 장엄하게 장례식이 치러지고 효창공원에 모셔질 때까지는 14년이 걸렸다.
참혹한 고통의 실뭉치
혼자 떠안은 시인
양재동 기념관에서 보았던 또 다른 사진 한 장 - 훙커우 거사가 있던 날, 현장에서 피체되어 폭행과 발길질을 당했던 윤 의사의 피범벅이 된 얼굴, 일경(日警)에 끌려가는 사진…. 그날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윤 의사가 중국 감옥에서 오사카로 후송(11월 18일)되어서도 받았을 모진 고문들이 상상되었다. “누가 시켰느냐?” “시킨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 혼자 한 일이다.”를 반복하면서 그에게 가해졌을 살 찢기는 형벌은 짐작이 되고도 남질 않는가? 참혹한 고통의 실뭉치를 혼자 떠안은 시인 윤봉길.
그러나, 25세 꽃 청년의 헌신으로 중국 정부의 홀대를 받던 임시정부는 중국의 협조와 협찬을 얻게 되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또한, 카이로 회담에서 중국이 미국 등을 설득해 조선의 독립 추진조항을 합의하게 한 것도 윤봉길 의사의 공헌이라고 역사는 말한다.
거사(擧事) 당일, 6원을 주고 샀던 새 시계를 김구 선생의 낡은 2원짜리 시계와 교환하는 윤봉길 시인이었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은 이제 1시간밖에 남지 않았음을 강조하며…. 또한 자신이 갖고 있던 돈을 모두 김구 선생에게 건네준다. “돈을 좀 가져가는 게 좋지 않겠소?”라는 말에 “채비를 하고도 5~6원이 남습니다.”라고 답변했다고 백범일지에서 김구 선생은 회고하고 있다. 그가 소유하고 있던 것은 낡은 지갑에 헐한 지폐 한 장과 동전 몇 개가 전부였다. 그가 소유하고 싶었던 것은 물질이 아니었다. 그가 원한 것은 오직 한 가지였다.
윤봉길 의사는 매화 향기 짙은 메시지를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충남 예산 윤봉길 생가와 기념관, 상해임시정부, 양재동 매헌 기념관에서 보았던 청년의 아름다운 선택. 아닌 것을 아니라고 절규했던 시인의 폭탄이 우리 가슴마다에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연인이 보내는 문자메시지처럼.

서울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나와 교육대학원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했으며, 월간 <시문학>으로 시, <서울문학>에 수필로 등단했다. 한국시문학문회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국제협력위원으로 있다. 문단에 나와 시와 수필, 평론 등을 쓰며 문학의 지평을 넓혀왔던 필자는 최근 역사 유적지 여행을 정리한『독립운동가 숨을 만나다 1, 2, 3권』을 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