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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 역사기행 [2020/07] 순국선열 역사기행 - 민영환을 찾아떠나는 시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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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Inside | 길 따라 얼 따라


양심과 자존심을 지킨 의로운 죽음 

조국 독립항쟁 기폭제가 되다


글 | 강미경(시인, 여행작가)


민명환 선생은 민겸호의 아들로, 명성황후의 조카가 된다. 17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 성균관 대사성·한성부윤·예조판서·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문과 출신임에도 군제개혁에 많은 관심을 가져 근대적 해군양성에 주력하였다. 1896년 특명 전권 공사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특파되어 <해천추범(海天秋帆)>을, 1897년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축하 사절단으로 참석해 <사구속초(使歐續草)>를 남겼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 폐기를 상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국민과 각국 공사에게 고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민영환 선생을 찾아 인사동 길을 헤매다

여름 햇볕이 무겁다. 종로 3가에서 낙원상가 쪽으로 걸어 인사동 길로 들어갔다. 쌈지길 골목으로 들어가면 ‘민영환 선생 자결터’를 볼 수 있다고 해서 찾아나선 길이다. 주소대로 찾아갔으나, 한창 공사 중인지 주변이 어수선하다. 

  “공사하느라 유적물을 옮긴 게 아닐까?” 라며 친구는 포기하자고 한다. SM 면세점 건물 경비인에게 물어도 모르겠다고 한다. 

 “면세점 안내데스크에 문의하라”고 한다. 

 데스크 직원도 “모른다”고 한다. 

 여름 햇살에 목이 바짝바짝 탄다. 그 건물에 있는 작은 커피집에서 까페라떼를 주문하여 들고 나왔다. 한 바퀴 더 돌아봐야겠다는 심산이었다. 왼쪽으로 공사장을 끼고 크게 한 바퀴 돌아본다. 순화궁터 표지석만 보인다. 낙망하는 맘이 든다. 역사는 뒤안길로 넘긴 채, 인사동 번화가로 다시 들어선다. 걷다 보니, 관광 상품점이 보인다. 쇼 윈도우 물건들이 다채롭다. 인사동은 언제나 화려하다. 물건 구경 보다 햇볕을 피해 시원한 실내로 들어가 보고 싶어진다.

 자개로 만든 보석함이며 가방들이며 자수정 팔찌와 목걸이 등…. 다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물건에 맘을 빼앗긴 채 민영환 선생을 잠시 잊어버렸다. 결국 작은 찻잔 몇 개를 사들고 나와 다시 따가운 햇살 속을 걸었다. 인사동은 상점들마다 혼을 빼놓는 것 같다. 오른쪽 골목에 ‘쌈지’라는 간판이 보인다. 다시 그 골목으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더위를 먹더라도 골목을 한 번 더 뒤져봐야 후회가 없을 것 같다. 저만치 기와지붕이 보인다. ‘인사동관광안내소’라고 되어있다. 그곳에서 일러준 대로 건물 몇 개를 지나니 몇 시간 전에 카페라테를 샀던 카페 앞에 ‘민영환 선생 자결터’가 명징하게 건재하고 있다. 아무도 치우지 않은 채.    

 커피를 주문하면서도 커피집 청년에게 물었었다. 그 청년은 모른다고 했던 바로 그 커피집 앞에 ‘민영환 선생 자결터’는 있었다. 투명 유리문 바로 앞이다. 대리석 기단 위에 한옥 격자문양 문짝처럼 생긴 기념물이 서있다. 대나무 문양이 문짝 아래 부분에 부조로 장식되어있다. 민영환 선생이 자결할 때 입고 계셨던 옷, 견장의 수술과 모자, 긴 칼 등이 문짝 앞에 누워있다. 빛바랜 청색 주조물이다. 언뜻 보면 뼈만 앙상한 시신으로 보이지만, 충정공의 의관이다. 바로 앞에 두고도 그 옆으로 지나쳐 엉뚱한 곳을 찾아 헤매었다. 인사동을 몇 바퀴 돌고 나서야 겨우 발견했다. 눈앞에 보물도 마음으로 보아야 보물이 된다는 생각이 든다. 백 년 만에 만난 애인만큼 반가웠다.


을사늑약의 무효 주장하고 자정순국한 민영환

민영환 선생. 1905년 11월 17일 일사늑약이 체결되자 백관들과 고종께 상소를 올리며,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했다. 일본 헌병에게 끌려나와 투옥 되었다가 11월 29일에 풀려난다. 조약을 파기하고 무효라는 칙령을 고종이 발표해야 하는데, 일본의 강압으로 쉽지 않다. 

 1905년 11월 30일 오전 6시에 자결한다. 자신의 명함에 유서 3통을 남긴 채. 고종, 외교사절, 백성에게 한문으로 남긴 글. 그 중에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글은 백성에게 보내는 사죄문이다. 그의 자결은 일본의 을사늑약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강한 저항–죽음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천명하겠다는 강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긴 것에 대한 강한 반발과 나라를 지켜내지 못한 괴로움. 공직자로서의 자괴감, 백성들 앞에 사과하는 자결. 그 소식과 유서 내용은 각 신문에 보도되었고 나라 안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백성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그의 죽음으로 인해 전국에 의병이 일어나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을사늑약에 서명을 한 을사오적(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들과는 다른 선택, 그 시대 변절한 고관대작들과 차별화된 행동이었다. 그를 따라 조병세, 홍만식, 이상철(학부주사)과 인력거꾼도 자결했다. ‘자결’이라는 단어가 찜통 같은 날씨에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민영환 선생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일어나자마자, 아침 식사를 할 생각도 하지 않고 책상에 앉아 몇 시간째 공부를 했다. 17세에 과거급제를 하여 예조판서와 형조판서, 병조판서, 이조참판을 지냈고,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후원하기도 했다. 명성황후의 친정조카라는 배경과 고종의 신임을 받던 그 시대 실세였다. 백성들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동학 농민들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명성황후의 후광을 입고 빠른 출세와 부귀영화를 누리는 권문세가에 속한 인물이었기…. 

 공부하다 보니, 그가 순절한 지 8개월 후, 그의 피 묻은 의관을 보관하던 마루방 마루 틈에서 대나무가 자라났다고 한다. 대나무 잎사귀가 45개인 것이 민영환 선생이 자결할 당시 나이 45세와 일치하여 ‘그의 충절에서 피어난 나무가 아니냐는 설’이 나돌았다. 대나무를 발견한 것은 그의 부인 박수영 씨이다. 그런 신기한 자연현상을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우리 현대인들은 아마도 알에서 나왔다는 박혁거세를 비과학적이라도 보고 있을 것이다. 곰이 변하여 웅녀가 되었다는 것도…. 사람들은 민영환 선생의 마루방에서 자라난 대나무를 혈죽(血竹)이라 부른다. 황현과 같은 시인은 혈죽가를 짓기도 했다. 과학이든 비과학이든 민영환 선생의 자결을 애통해하는 후세인들이 만들어 낸 이야기로 보는 것은 그분의 순절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그 대나무마저 일본인들이 와서 베어버렸다는 것은 민영환 선생의 넋과 정신을 일본이 겁내고 있다고 해석해도 좋을 것 같다. 


조계사 절 마당에서 민영환 선생 동상을 만나다 

 다음날 오후, 전철을 타고 다시 인사동 조계사로 갔다. 공부를 하다 보니, 그의 집터와 동상이 조계사 부근에 있다는 것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오늘도 여름 햇살이 험악하다. 조계사로 들어서는 순간, 작은 분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와 연꽃에 마음이 푸근해진다. 절 마당에는 연꽃이 가득하다. 노란 미색, 연분홍색, 진분홍색 봉우리, 넙적하고 둥근 연잎이 마당을 꽉 메우고 있다. 도심 속에서 이런 자연을 대하니 힐링이 되는 것 같다. 절 마당 오른편으로 ‘우정총국’의 옛 모습이 보인다. 그 뒤뜰 구석에 민영환 선생의 동상이 서 있다. 6각형 기단 위에 옛 관복차림의 동상이다. 기골이 장대한 장군의 모습은 아니다. 꼼꼼하고 세심할 것 같은 인상의 날씬한 얼굴을 갖고 있다. 

 “그래서, 민영환 선생은 고종의 특사로 러시아 니콜라이 2세 대관식을 다녀오기 위해 출정했던 204일의 대장정을 매일매일 일기로 기록했나?”하는 생각을 해본다. 



 “성격이 소탈하고 대충대충 사는 사람들은 일기를 쓰면서 매일 매일을 묘사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며 조계사 경내에 있다는 설명만 믿고 그의 집터를 찾았으나,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경내를 구석구석 돌아보다가 주차장 관리인에게 물었더니, 조계사 정문 길가에 있다는 것이다. 

 그랬다. 오토바이며 버스, 택시 들이 쌩쌩 달리고 있는 아스팔트 길옆에 ‘민영환 집터’가 있었다. ‘전의감 터’와 ‘도화서 터’가 왼편으로 나란히 놓여있다. 전의감이라면, 궁궐에서 쓰는 약재와 의학 재료 등을 다루던 곳이다. 도화서라면 궁궐에서 필요로 하는 그림을 그리고 관장하던 곳이다. 창덕궁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이었다는 뜻이리라. 그만큼 민영환 선생은 궁궐과 밀접한 연관-궁의 영향력을 받는 사람이었다. 태생부터. 민겸호의 장남이었으나 민태호에게 입양되었다고 하는데, 그곳이 민태호의 집터였을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하는 생각이다. 내일은 그가 남겼다는 ‘해천추범’을 구해서 읽어봐야겠다.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일주 기록을 만나다 

일주일 내내 민영환 선생에게 사로잡혀서 그를 공부하고 있다. 그의 기행문집 ‘해천추범(海天秋帆)’을 구하러 교보문고에 갔더니 품절이란다. 구할 수 있는 것은 PDF파일로 읽을 수 있는 이북(e-book)뿐이다. 부푼 마음으로 당장 그것을 구입하여 읽어내려 갔다. 총 6개월 2일(204일) 동안 11개국을 여행했던 대장정을 기록한 기행 일기문이다. 민영환 선생이 문신(文臣)이었지만, 매일매일 일기를 쓸 정도면 세심하고 감수성도 예민하고 꼼꼼한 성품이셨던가 보다. 그의 일기는 한문으로 기록되었으나, 조재곤 교수(경원대)가 번역하여 책으로 내놓았다. 2007년의 일이다. 그 동안 이 책을 찾는 이들이 없어서인지 더 이상 출간되지 않은 채 품절되었다. PDF파일로라도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니 전자파로 인해 눈이 너무 피곤하다. 다시 검색을 해보니, 몇몇 도서관에 종이책이 비치되어 있다. 내일은 도서관에서 빌려 종이책으로 읽고 싶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기를 써서 책으로 엮어놓은 민영환 선생에게 갈채를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로 세계일주 여행자다. 번역본의 문장이 간촐하고 수려하다. 조재곤 교수의 문장이라고 해야 할 테지만, 원본(한문본)의 원작자는 민영환 선생이므로 그의 문장력에 방점을 두어야 한다. 책을 몇 페이지 읽어보고 나니, 민영환 선생의 글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책을 소장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1896년의 세계일주 기행문집, 지금부터 120년 전에 쓴 책이다. 일기를 쓴 것도 훌륭한 일인데, 그것을 책으로 묶어 놓은 것은 민영환 선생의 업적 중에 업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일찍이 신라시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조선 중기 박지원의 ‘열하일기’, 1985년 유길준의 ‘서유견문록’과 같은 기행문이 있었다. 그들이 여행 후 견문록을 남긴 것처럼 민영환 선생도 그랬다. 

 그는 1896년 4월 1일 고종의 특명전권공사로서 러시아를 방문하여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고, 러시아로부터 여러 가지 도움을 요청하는 특명을 받았다. 러시아는 교묘히 회피했고 재정고문과 러시아 교관(군사고문) 몇 명만 파견해 주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일본 국채 상환금 300만 엔 차관 제공, 왕실 수비병 파견, 경비지원, 조선-러시아 간의 전신선 가설 등의 목적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민영환 사절단은 한 달 반(45일) 동안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면서 러시아의 문화와 발전 모습을 보게 된다. 책의 내용이 흥미롭다. 한권의 기행문집으로서의 문학적 가치도 높다는 생각이다. 


해천추범(海天秋帆) :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다

다음날, 마을버스를 타고 종로도서관에 가서, ‘해천추범’을 빌렸다. 책을 손에 넣으니 세계를 손에 넣은 것 같은 느낌이다. 120년 전이라는 시간도 손에 넣은 것 같다. 민영환 선생이 1896년에 러시아로 떠날 때는 윤치호, 김득련, 김도일, 손희영, 스테인 등과 함께 떠났었다. 그 일행 속에 끼어 함께 시간과 공간 여행을 떠나는 기분으로 책장을 넘기기 시작한다. 음력 날짜와 날씨까지 상세히 적어 넣은 일기문. 이렇게 쓰이어진 일기가 120년 후에 여행 작가인 내게 벅찬 감동으로 읽혀질 것을 민영환 선생은 짐작이나 했을까? 민영환 선생의 이 기행문집과 나의 인연은 밤새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할 것 같다. 225쪽까지 읽는데 이틀도 걸리지 않을 것 같다.

 민영환 사절단은 제물포에서 상해로 이동하여 상해에서 러시아로 가는 배를 타려했다. 배 시간을 놓쳐 일본을 거쳐 캐나다 미국, 영국, 아일랜드, 독일, 폴란드를 지나 러시아로 가기로 행로를 바꾼다. 돌아올 때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귀국하며 러시아를 배운다. 그의 기행 일기문 ‘해천추범’은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다”는 뜻을 담고 있다. 조선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도포와 갓을 쓰고 지내던 민영환 선생이 서양의 11개국을 둘러보면서 경이로움과 조선을 생각하는 공직자로서 조급함이 생겼을 것 같다. 

 민영환 사절단이 러시아로 떠날 때는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아관파천이 있은 후였다.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해 달라는 러시아의 초청장에 응한 화답이기도 했다. 외교와 사교는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그가 쓴 일기를 보면, 영국의 풍경을 대단히 극찬하고 있다. 이동하느라 충분히 구경을 하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고 있지만, 그의 풍경묘사와 표현력은 대단하다. 찬찬하게 풍경을 자세히 그려내고 있었고, 들르는 나라마다 교육과 정치 이야기, 군사, 농업 기술, 인구까지 서술하면서 공직자다운 시각으로 기행문을 쓰고 있다. 그는 작가처럼 묘사력이 대단하다. 서양의 발전된 모습에 놀라움과 경이감을 감추지 못한다. 민영환 선생이 이렇게 우리나라 고급 관료로서 최초로 세계 일주를 했던 식견으로, 우리나라의 선진화를 위해서 평생을 힘쓰셨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모든 시설이 런던에 떨어지지 않은데 조금 순박하고 옛 풍치가 있다. 지나는 마을과 들에 밀이 익어가고 나물 꽃이 밭에 가득하다. 절기의 물건과 바람과 빛이 고향 동산을 떠올리게 한다” (55쪽 표현)

 독일 마을을 지나면서 민영환 선생이 기록한 기행 일기문이다. 하나의 문학 작품 같다는 생각이 든다. 폴란드를 거쳐 러시아에 도착하여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는데, 대관식의 화려함과 대관식의 경위를 소상하게 묘사하는 표현력이 놀랍다. 

 민영환 사절단은 대관식이 끝난 후에도, 그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45일간을 체류한다. 외부대신 로바노프와의 협상이 완결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바르샤바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곳에서 백야현상을 목격한다. 러시아의 임업과 농업, 군사제도를 살펴보며 크게 감동한다. 러시아 교도소, 천문관, 의료시설, 박물관, 도서관, 미술관 등…. 특히 민영환 선생은 백성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농사기술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러시아의 수차(水車) 사용을 부러워한다. 9만5천 루블 어치의 농기계를 구입한 것을 보면, 조선의 농업 기술혁신을 꿈꾸는 관료의 마음이 깊음을 알 수 있다. 국가 방위를 위해 병영-군사제도, 러시아의 징병제, 병역의무 등 양병 방식과 러시아의 군함에 막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두 차례 병조 판서를 지낸 왕실의 중심 관료로서 갖는 관심이었을 것이다. 


끝까지 살아남아 고종의 오른팔 되었더러면

귀국 후, 다시 군부대신에 임명되어 근대적 군대양성에 주력한다. 러시아에서 파견해준 교관의 도움을 받으며 조선군의 막강한 군사력을 갖길 기대했다. 그러나 이듬해 1897년 3월 1일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년 축하식에 참석하러 다시 유럽에 가게 된다. 1896년 10월 20일에 러시아에서 귀국했으니 5개월 만에 다시 외국 출장이다. 런던에서 40여 일간 체류하면서 영국을 둘러보게 된다. 그리고 여행기 ‘사구속초(使歐續草)’를 또 펴낸다. 그런 것으로 보면 민영환 선생은 고종의 명으로 해외여행을 두 차례나 하게 되고 그 때마다 여행답사기를 남기니 여행 작가였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민영환 선생은 1899년 6월 육군을 통솔하는 황제 직속 최고 군령기구 ‘원수부’를 설치하게 된다. 오래도록 원수부의 회계국총장을 역임한다. 군악대 창설과 국가(國歌) 제정, 장충단 표석을 지정, 유민원을 설립하여 총재가 된다. 그러나 카츠라-테프트 밀약, 제2창 영일 동맹, 포츠머스조약 등을 통해 일본이 한국의 지배권을 공인받게 되면서 민영환은 시종무관장으로 좌천된다. 친일 각료와 일제로부터 배척을 받게 되고, 을사오적이 을사늑약에 서명함으로써 조선의 외교권은 일본에게 넘어가게 된다. 열강끼리의 이해타산 속에서 나라의 운명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아내지 못한 민영환 선생. 일본의 강세에 밀려나 투옥까지 당해야 했던 왕실의 핵심 외척은 그렇게 배척되었다. 이를 분개한 민영환 선생은 자결을 선택했다. 

 ‘끝까지 살아남아서 고종의 오른팔이 되어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적극적으로 뭔가를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자결을 선택했던 민영환 선생, 총 한방 쏘아보지 않고….’ 아쉬운 마음뿐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민영환 선생의 자결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오히려 양심과 자존심을 지킨 의로운 죽음이라고 그를 기릴 것이다. 그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그에겐 ‘충정공’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2호선과 5호선전철이 교차하는 충정로역을 지날 때에도, 서대문에서 아현동으로 가는 길에 충정로 거리를 지날 때에도 민영환 선생의 시호를 따서 붙여진 거리라는 것을 모르고 지나치곤 했다. 

 “이제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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