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선열 역사기행 [2020/07] 만주 항일유적답사기 - 백두산 가는 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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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영산, 백두산 가는 길 (1)
2020년은 대일독립전쟁(對日獨立戰爭) 35년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승전으로 기록되고 있는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10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이다.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와 월간 『순국』에서는 독립전쟁 100주년을 기념하여 북간도 일대 독립전쟁의 유적지와 함께 백두산 천지를 등반하는 지상특집을 마련하였다. 그 첫 번째 기획으로 만주지역에서 잊혀가고, 왜곡되고 훼손당하고 있는 독립전쟁유적지 현장을 15년 동안 답사하고, 항일유적답사기의 출간과 함께 강연활동을 해온 작가 최범산의 ‘백두산 가는 길’을 연재한다. 백두산 가는 길의 여정은 서울에서 중국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에 도착하여 연길시(延吉市)를 출발하여 모아산을 지나 윤동주 시인의 고향인 용정시 명동촌, 일송정과 평강벌에 서린 역사와 유적을 찾는다. 그리고 두도구, 서성진 진달래조선족 마을을 지나 화룡시 청호촌의 삼종사 묘역, 청산리 전투 유적지, 노령의 고동하를 지나 안도현의 대한독립군 활동 유적지 등을 답사한다. 마지막 여정으로 백두산 자락 이도백하 송림을 지나 하늘 아래 첫 동네로 불리는 내두산 조선족촌을 거쳐서 북파산문을 통해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칠백 리길 대장정이다. 백두산 가는 길은 우리민족의 발상지, 시원(始原)을 찾아가는 길이며, 한민족의 정신적 본향을 찾는 길이며, 민족정기(民族正氣)와 대한(大韓)의 본류(本流)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러므로 백두산 가는 길은 록키산맥이나 히말라야,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느끼는 감흥과 영감을 훨씬 뛰어넘는 길이며, 우리민족과 함께 수천 년 역사를 이어온 길이기에 오롯이 고유하고 장엄한 길이다. 백두산 가는 길, 그 연재를 시작하며 기다렸다. 서울에서 평양을 거쳐 양강도 삼지연에서 백두산을 자유스럽게 오를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2018년 9월 20일이었다. 남북정상이 백두산 천지에 올랐을 때, ‘드디어 백두산 가는 길이 열리겠구나’ 감격하며 환호했다. 가수 알리의 아리랑이 천지에 울려 퍼질 때 박수로 함께 화답하는 남북정상의 진지한 모습을 보며 천지연 향도역에서 백두산을 등반하게 될 날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러나 오늘도 백두산 가는 길은 열리지 않고 있다. 우리민족의 영산, 백두산 가는 길은 왜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열리지 않고 있는 것일까? 안타깝고 가슴아픈 분단 75년의 세월, 북한정권은 칠천만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가는 길을 도대체 왜? 무슨 연유로 가로막고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이제는 더 높고 더 크게, 그리고 강대한 미래를 생각하자. 만주에서 백두산 오르는 길은 수천 년 동안 우리민족이 걸었던 길이며, 단군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의 역사가 서린 땅이다. 굳이 열리지 않는 천지연 길만을 바라보며 민족의 영산, 백두산을 이대로 내버려둔 채 애써 외면하고 살아갈 수는 없다. 그렇다. 백두산(白頭山)은 태초부터 우리민족의 영산이며 시원이었다. 이름 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곳 백두산 가는 날이면 스스로에게 묻는다. 동방의 빛이며 인류의 광명으로 오천 년을 살아온 우리민족, 그 위대한 역사를 올곧게 기억하고 있는가. 해 뜨는 아침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한민족의 자존과 긍지를 옹골차게 품고 살아왔는가. 백두산(白頭山). 그 이름만으로도 얼마나 가슴이 설레는 이름인가. 우리민족의 발상지, 역사의 시원성지인 백두산을 오르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이며 영광인가. 백두산을 향하는 오늘도 가슴 벅찬 설렘으로 요동치고 있다. 새벽 5시, 연길역에서 백두산행 버스에 올랐다. 여행객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나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잠시 후 버스는 백두산을 향해 출발하였다. 오색불빛으로 휘황찬란하던 도시는 밤샘 피곤에 지쳤는지 어둠에 묻힌 채 아직도 잠들어 있다. 차창으로 스쳐가는 거리모습은 인적이 끊어져 적막하고 오가는 차량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연길시 도심을 벗어난 버스는 서쪽으로 방향을 틀더니 용정시(龍井市) 가는 길로 사뿐히 들어선다. 고요한 새벽 안개가 아스팔트에 내려앉았다가 전조등 불빛에 소스라치게 놀라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거친 숨을 연거푸 몰아쉬며 고갯길을 오르던 버스는 모아산이 바라보이는 등성이를 넘어서자 천천히 속도를 높였다. 해란강과 부르하통하 사이에 우뚝 솟은 모아산 모자같이 생겼다하여 모아산이라 하였던가 연변사람들의 휴식공원으로 사랑을 받고 있는 모아산(帽兒山)을 노래한 가사의 일부이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의 황후였던 완용이 연변으로 유배를 와서 파란의 일생을 마친 곳이다. 그녀의 유골이 산골짜기 어딘가에 묻혀 있다고 한다. 비운의 황후의 이야기를 간직한 해발 517m의 모아산 자락을 지날 무렵에 동녘이 서서히 밝아왔다. 연변의 젖줄 해란강 줄기에 새벽안개가 피어 오르고, 용정의 드넓은 들판, 서전벌이 녹색비단 펼친 듯 차창 가득히 밀려온다. 모아산 자락을 지난 버스가 내리막길로 들어서면서 차츰 속도를 높인다. 새벽안개가 서서히 옅어지며 서전벌 사이로 흘러가는 해란강(海蘭江) 줄기가 눈이 부시도록 하얀 자태를 드러낸다. 버스가 곧게 뻗은 길로 달려 내려가니 용정시(龍井市)의 건물들이 시야로 들어온다. 우리민족 북간도 이주의 중심지였던 용정은 새벽잠에서 막 깨어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용정의 서전벌과 월강곡(越江曲) 그토록 잔혹했던 아픔의 시대, 일제의 가혹한 억압과 수탈에 괴나리봇짐을 짊어지고 두만강을 건너온 가난하고 순박한 사람들. 오로지 살길을 찾아 간도(間島 : 사이섬)로 넘어온 사람들이 야트막한 언덕 위에 흙으로 움막을 짓고, 황무지를 개간하고, 피땀을 흘려가며 씨를 뿌리고 농사짓던 날들을 상상해 본다. 지금으로부터 150여 년 전쯤이었다. 무능하고 나약한 조선왕조와 탐관오리들의 착취와 횡포에 시달리며 살아가느라 고통스럽기만 했던 사람들, 함경도 산비탈 척박한 자갈밭에서 농사를 지으며 먹고 살기가 너무나 힘들어서 목숨을 걸고 숨죽여 두만강을 건넜다. 청나라 관리들에게 잡히면 월강죄로 목이 날아갈 위험을 무릅쓰고 건너온 땅, 사이섬 간도(間島), 청나라 황제 강희의 봉금령으로 수백 년 동안 버려진 땅에 나무뿌리를 걷어내고, 돌을 치우고, 억센 풀들을 뽑아내어 황무지를 비옥한 토지로 만들었다. 월강죄는 두만강을 건너다 잡힌 조선사람들에게 붙여진 죄명이었다. 청나라를 세운 누르하치는 백두산 일대를 조상의 성지로 삼고 몹시 성스럽게 여겼다. 1677년 청나라는 만주족의 성스러운 지역을 보호하고 풍속과 자연을 보존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압록강, 두만강 유역 이천여리의 땅을 일반 백성이나 타민족들이 들어가 거주하거나 땅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는 것을 금했다. 이것이 봉금령이다. 중국 한족들이 만주로 오는 것을 막는 목적도 있었지만,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조선인들이 들어오는 것도 막기 위한 조치였다. 한반도의 북부지방은 대부분이 산악지대였다. 땅이 몹시 척박하고 밭은 대부분이 산비탈에 있어서 가뭄이 되면 작물이 말라서 죽고, 장마가 지면 빗물에 토사가 씻겨 내렸다. 함경도 국경선에 사는 농민들은 늘 가뭄과 홍수로 인한 기아에 허덕였다. 그런데 두만강 건너편에는 산세가 험하지 않아 땅이 비옥하고 넓은 평야가 있었다. 그 당시 함경도민에게 그림의 떡이었던 간도지방이었다. 청나라의 봉금정책으로 이백 년이 지나자 땅은 더욱 비옥해졌으며 농사도 짓지 않아서 그야말로 옥토가 되었던 것이다. 옥토를 눈앞에 두고 배를 곯아야 했던 농민들이니 그대로 앉아 굶어 죽을 수는 없었다. 앉아서 죽으나 강을 건너다 잡혀 죽으나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 생각했다. 농민들은 청나라 관리의 눈을 피해 아침에 두만강을 건너와 잡초와 가시덤불이 우거진 땅을 개간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흰옷 입은 사람들이 간도 들판에서 주위를 살핀다. 괭이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뿌리가 억센 울로초를 뽑아내고 낫으로 가시덤불을 베어낸다. 엄동설한의 눈보라를 맞으며 꽁꽁 언 땅에 부딪치는 괭이소리가 눈물겹다. 함경도 사람들, 몰래 두만강을 건너온 가난한 농민들의 피땀어린 노력으로 황무지는 차츰 밭으로 변하고, 마침내 옥답으로 변하여 조, 콩, 옥수수, 감자 농사가 제법 잘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청나라 관리가 두려워 아침에 강을 건너와 감자나 보리를 심고 해가 지면 어둠을 틈타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침에 건너와 농사를 짓고 저녁에 돌아가는 일이 어려울 때도 있었다. 장마가 져서 두만강 강물이 범람하거나 청나라 관리들이 국경을 순시하러 올 때였다. 월강한 농민들은 봄에 들어와 아예 강 옆 숲속에 야트막한 토막을 짓고 살면서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가을에 추수를 하여 곡식을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야말로 춘경추수(春耕秋收)의 기쁨이었다. 간도이주민들이 열심히 농사를 짓고 있을 때 난데없이 만주인들이 나타나 남의 땅에서 왜 농사를 짓느냐고 달려들었다. 추수를 앞둔 곡식을 마구 짓밟으며 당장 떠나라고 을러메기도 한다. 주인이 없는 땅, 버려진 황무지인줄 알고 개간했더니 점산호(만주인 지주)들이 토지문서를 가지고 있는 땅이었다. 만주 점산호들은 조선사람들이 자기 땅을 개척하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다가 황무지가 옥답으로 변한 다음에 느닷없이 나타나서 주인행세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교활하고 음흉한 만주족 지주들은 간도 이주 농민들의 배고픈 사정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농민들에게 계속 농사짓고 싶으면 소작료를 내라고 요구했다. 땅 없는 설움, 가난이 죄가 되는 세상, 함경도 농민들의 눈물겨운 지팡살이(지주의 땅을 부쳐 먹고 사는 농민들의 처절한 생활)가 시작된 것이다. 간도 이주농민들은 자신이 피땀으로 일군 땅을 어쩔 수 없이 떠나거나 눈물을 머금고 소작농이나 마름신세로 전락하게 되었다. 지팡살이라는 말은 지방(地方)의 중국발음인 띠팡(difang)에서 나온 말로써 간도 농민들이 왕가지팡(王家地方), 조가지팡(趙家地方) 등 지주의 땅을 부르는 데서 생겨난 말이라고 한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간도로 떠난 아들, 남편,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불렀다는 애절한 노래가 월강곡(越江曲)이다. 기러기 갈 때마다 일러야 보내며 꿈길에 그대와는 늘 같이 다녀도 이 몸이 건너면 월강죄란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월강죄 때문에 서로 만날 수 없는 부모와 자식, 아내와 남편, 사랑하는 젊은 남녀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했던 월강곡을 부른 사람들은 모두가 가난한 농민들이었을 것이다.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그리워하는 견우직녀의 심정이 이보다 더 애절했을까. 청나라 말기 봉금령이 해제되어 만주로 넘어왔던 많은 사람들이 내륙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11년 손문의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이 건국된 이후 더욱 이주가 자유롭게 되자, 두만강을 건너 내륙으로 들어온 한인들이 새롭게 개간한 곳 중에 하나가 지금의 용정시 서전벌이다. 만주 땅 넓은 들에 벼가 자라네 벼가 자라 우리가 가는 곳에 벼가 있고 벼가 자라는 곳에 우리가 있네 우리가 가진 것 그 무엇이냐 호미와 바가지 밖에 더 있나 호미로 파고 바가지로 담아 만주벌 거친 땅에 볍씨 뿌려서 우리네 살림 이룩해보세 1860년대 만주로 이주한 한인들이 벼농사를 지으면서 불렀던 벼의 노래이다. 차창으로 스쳐가는 서전벌을 바라보니 초록물결이 넘실대는 것으로 보아 올해도 벼농사는 아주 잘된 것 같다. 우리민족의 피와 땀이 서려 있는 벌판이라 그런지 이곳을 지날 때마다 고향의 들판을 바라보는 착각에 빠질 때가 많았다. 바람에 일렁이는 초록물결이 탐스럽다. 서전벌을 흘러가는 해란강 줄기는 용정 용두레 우물에서 날아오르는 거룡이 마치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처럼 하얀 자태를 뽐내며 흘러가고 있다. 용정에서 만난 조선족 노인의 말이 떠오른다. “용정에는 조선말이 있어 조선족들은 모두가 조선 속에서 삽네다. 조선은 우리의 하늘이고 땅이지요. 비록 지금은 중국 국적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만주는 우리들의 하늘과 땅이 만나는 지평선이 펼쳐지는 곳이기에 우리들은 혼신의 힘으로 가꾸며 살아가디요.” 조선족 노인의 말대로 조선족은 만주에 우리민족의 언어, 곧 민족혼과 빛을 심으며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연길이나 용정, 화룡시내 어디를 가도 한글 간판이 즐비하고 한자 위에 의젓이 드러난 우리글이 살아있는 동네, 연변은 조선족이 일궈낸 한국의 빛이었다. 용정시 용두레 우물 1880년 처음 이주한 장인석과 박인덕이 용두레 우물을 발견하여 마을의 이름을 용정(龍井)이라 지었다고 한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이 두만강을 건너와 형성되기 시작한 룽징시(龍井市·용정시)는 연길시에서 차로 30분밖에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용정시를 품고 있는 길림성(吉林省) ‘옌볜조선족자치주’는 우리민족과 깊은 관련이 있는 지역이다. 용정시내 가운데 있는 우물에는 용이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고, 용두레는 우물이 너무 깊어서 오가는 길손들이 두레박을 자주 빌리러 와서 아예 용두레박을 설치하였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용정은 우리에게 많은 역사를 전해주는 도시이다. 용정에는 3.13 독립만세 운동을 비롯하여 간도국민회, 군무도독부, 철혈단 등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이 활동했던 지역으로서 우리민족의 항일투쟁의 역사가 곳곳에 서려 있는 곳이다. 또한 신교육의 요람으로써 서전서숙, 명동학교, 동흥학교 등 수많은 학교가 설립되었으며, 이곳 출신 독립투사들이 봉오동, 청산리, 대전자령 전투 등에서 일제와 싸웠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용정에서 태어나 은진중학교와 광명학원 중학부를 다닌 윤동주 시인이 일본 동지사대학에서 항일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음을 맞은 도시이기도 하다. 용정은 간도이주농민들의 피땀으로 일군 옥토와 독립투사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곳곳에 남아 있는 우리민족 역사의 도시이다. 용정시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비암산 일송정(一松亭)이었다. 용정시내 서쪽 축구경기장에서 좌회전하자 비포장 길이 나왔다. 도로를 정비하지 않아서 차는 몹시 흔들렸다. 공동묘지 길을 지나 한국인이 건설한 호텔 앞을 지나 산길을 오르니 강경애의 문학비가 보인다. 한국문학의 선구자였던 그녀의 문학비가 도로 옆에 쓸쓸히 서 있다. 고개길을 어렵게 올라간 자동차가 일송정 비석 앞에 멈춘다. 우리 일행은 곧바고 일송정으로 올라갔다. 사방의 시야가 확 트인다. 동쪽으로는 용정시내가 한눈에 들어오고 멀리 연길 모아산 줄기가 보인다. 돌아서 서쪽으로 눈을 돌리니 해란강과 평강벌이 펼쳐진다. 그 사이로 일렁이는 바람결에 초록빛 논에서 벼들이 출렁인다. 일송정 소나무는 초라한 얼굴로 서서 용정시내를 굽어보고 있다. 일송정 소나무 1920년대 용정 일본총영사관에서 바라보면 비암산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소나무가 눈에 거슬려 영사관 경찰이 몇 번이나 말려 죽이려 했으나 소나무는 푸른빛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그 뒤 일본군이 사격 연습용 과녁으로 이용하거나 나무에 구멍을 뚫어 후춧가루를 넣고 쇠못을 박아 고사시킨 뒤 반세기가 넘도록 우리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갔다. 용정시의 사회단체에서 소나무 복원을 위해 1989년과 90년, 91년, 2002년 네 차례 나무를 심었지만 누군가에 의해 잘리거나 말라 죽었고, 일송정 소나무는 현실에서 볼 수 없는 노래말 속의 존재로 남아 있었다. 2003년 3월 용정시와 3.13 기념사업회가 인근 승지촌에서 자라던 수령 20여년생 3m 크기의 소나무를 옮겨와 심었고 현재까지 잘 자라서 용정시와 해란강을 바라보며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비암산 일송정에서 푸른 소나무를 바라보며 일제강점기 조국광복을 염원하며 투쟁했던 사람들을 생각했다. 나라를 빼앗기고, 고향을 빼앗기고, 농토마저 빼앗긴 채 두만강을 건너 이곳으로 왔건만, 일본놈들이 용정까지 따라와 영사관을 설치하고, 독립투사들을 탄압하는 형국이었으니 그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일송정은 독립투사들이 마음을 위로받는 안식처였으며, 조국독립을 염원하는 사람들의 기도터였으며 광장이었다. ■ 북간도 용정에 독립운동 기지 건설 북간도를 중심으로 한인 이주가 본격화되었는데 1899년 2월18일, 김약연, 김영학, 문치정, 강백규 등 함경북도 회령과 종성에서 유학자로 소문 높던 4대 가문 142명이 용정 명동촌으로 이주하였다. 당시 용정의 대지주이며 개간민은 중국 산둥성에서 온 한족 동한이란 사람이었다. 1899년 그가 죽자 자식들은 회령에서 이주해온 김약연 등에게 토지를 통째로 팔아버렸다. 그때부터 광복이 올 때까지 이 명동촌 일대의 논과 밭은 회령 사람들 차지였다. 명동학교는 북간도 최초 신교육기 관이었던 서전서숙(瑞甸書塾)의 설립자 이상설이 1906년 고종특사가 되어 네델란드 헤이그로 떠난 뒤 용정 일본영사관 경찰들의 방해공작과 압박으로 문을 닫게 되자, 그 뒤를 이어 김약연, 김하규 등이 명동서숙을 설립한 것이 출발점이었고, 1909년 신민회 정재면이 부임하여 민족의식과 신학문을 가르치면서 명동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서전서숙 유적지를 찾아서 용정시 실험소학교 운동장 구석에 비술나무 한 그루가 쓸쓸하게 서있다. 비술나무에는 서전서숙기념나무라는 팻말이 걸려있다. 기념나무 뒤에 정자가 있는데 리상설정(李相卨亭)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고, 자연석으로 다듬은 서전서숙 옛터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906년10월 이상설은 이곳에 연변지역 최초의 근대학교요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설립하였다. 1906년 4월 18일 이상설은 일본경찰의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가산을 처리하고 이동녕과 함께 인천항에서 중국 상선을 타고 상해를 거쳐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과 이동녕은 정순만, 황달영, 여준, 박정서, 홍창섭 등을 만나 연변에 나가 교육진흥사업을 펼쳐가기로 협의했다. 그해 10월에 연해주를 떠나 용정촌에 와 자리잡은 후 이상설의 자금으로 용정기독교 회장 최병익의 여덟 칸집을 사들여 서전서숙을 설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서전서숙의 운영은 이상설이 전적으로 지원하였고 학생들은 전액무료로 학교에 다니게 하였다. 서전서숙은 항일민족교육의 요람이었고, 동시에 북간도 독립군 양성을 위한 학교였다. 간도일본총영사관 옛건물 용정시 길안가에 위치한 간도일본총영사관 건물은 1907년 8월 중국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명목을 앞세워 경찰대를 파견하고, 조선통감부 임시파출소를 세워 사이토를 소장으로 파견하였던 곳이다. 1909년 9월 4일 일본과 청나라는 북경에서 두만강중조변무조항, 간도협정을 체결하고 길림으로부터 함경도 회령에 이르는 길회철도 건설권을 얻고, 국자가, 백초구, 용정 등 연변지역에서 영사재판권을 갖게 되었다. 일제는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를 간도일본총영사관으로 개칭하고 활동을 시작한 뒤에 용정을 비롯하여 국자가, 훈춘, 천보산 등 18개소에 경찰서 또는 경찰분소를 설치하였고 항일투사들을 잡아다 고문하고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1920년 10월 2일 훈춘사건을 일으켜 일본군을 만주지역으로 출동하게 하였으며 청산리 전투 이후 경신년 한인대학살을 주도하고 항일세력의 검거와 탄압의 선봉에 섰었다. 윤동주 시인의 고향 명동촌 흰 뫼가 우뚝 솟아 은택이 호대한 한배검이 비치신 이 터에 그 씨앗 크신 덕 넓히고 기르는 나의 명동 명동학교 교가이다. 흰뫼는 백두산을 의미하고 한배검은 국조 단군을 말하는 것으로 홍 익인간, 광명사상이 깃든 단군정신을 이어받고, 그 바탕에서 신교육사 상을 받아들여 더 많은 지식을 넓혀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국사학계는 식민사관의 영향으로 단군이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이 아니라 신화속에나 존재하는 전설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명동학교 교가를 비롯하여 북간도 일대 모든 교육기관 에서 민족정신의 중심으로 단군사상을 가르쳐왔다는 것은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명동학교는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신문명에 대한 학문을 가르치는 신교육의 산실이었다. 그 당시 윤 동주 시인과 명동학교를 함께 다닌 동창생 중에는 고종사촌이며 평생 동지였던 송몽규, 훗날 통일운동가로 활동했던 문익환 목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