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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 역사기행 [2020/08] 순국선열 역사기행 - 보재 이상설 선생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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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광복군정부 정통령 보재 이상설 선생을 찾아


정도(正道) 지키며 일제와 끝까지 맞서 싸운

독립운동의 독보적 선구자


글  |  강미경(시인, 여행작가)


코로나19로 인해 외출을 자제하라는 매스컴의 엄명이다. 사람과 사람을 차단하는 바이러스의 공포로 온 세계가 여행 정지다. 외국인들을 입국 정지하며, 빗장을 잠가 버린 나라도 허다하다. 나라간의 여행길이 끊어졌다. 이러다가는 외국 여행의 길이 영영 열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앞선다. 그 동안 외국(일본, 중국, 연해주 등)에 산재해 있는 독립 운동가들의 유적지를 여행 후, 여행기를 써서 책으로 내왔다. 여행이 금지되니 답답하고 안타깝다. 특히, 연해주에 대한 글은 반권 정도의 분량밖에 쓰지 못했으므로 마음이 참담하다. 가고 싶은데 갈 수 없는 현실 상황이 안타깝기만 하다. 이런 상황에서 이상설 선생이 머리에 떠오른 이유가 무엇일까?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올 수 없는 조국 땅. 밟고 싶어도 밟을 수 없는 조국의 흙이 얼마나 그리웠을까?’를 생각하면서 이상설 선생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러시아 우스리스크의 ‘이상설 선생 유허비’를 돌아보며 

2017년, 우수리스크의 9월 햇살은 너무 따가웠다.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우수리스크까지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50분 정도 이동했다. 그곳의 한인학교를 둘러보고 이상설 유허비로 이동할 것이라고 단단히 믿고 있었다. 

그런데 “한인학교에서 시간을 너무 지체했으므로 이상설 유허비는 볼 수 없다”고 했다. 여행사 가이드의 말이었다. 다시 버스로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해야 하며 차가 많이 밀릴 것이고, 예약해 둔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추기도 힘들다는 것이다. 이런 황당한 상황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이상설 유허비를 보기 위해서 이곳까지 왔으며, 저녁 한 끼쯤은 포기해도 좋으니 이상설 유허비를 봐야 한다고 나는 우겼다. 난감해하는 여행사 가이드를 보며, 거기서 물러날 내가 아니었다. 

 협회 이사장님께 나는 다시 주장했다. 


“이상설 선생은 이위종, 이준 열사와 함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황제의 밀서를 갖고 가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주장했던 독립 운동가인데, 선생의 유허비를 둘러볼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저녁을 굶더라도 봐야하지 않을까요?” 

 

“40명 회원들의 저녁을 굶기고라도 봐야지요” 


결국 이사장님은 나의 주장을 들어주셨고, 우리는 저녁식사를 포기하고 이상설 유허비를 보기로 했다. 따가운 가을 햇살 속에 하얀 비석으로 서 계신 이상설 선생. 그는 아무 말이 없었고, 주변에 억새풀만이 가득 피어있던 4년 전의 기억. 어디서 구해왔는지 태극기를 펼쳐들고 협회 회원들 40명은 선생의 유허비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고, 그날 우리들은 저녁을 굶지 않았다. 선생의 혼백이 도와주셨는지, 다행히 차가 막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녁 식사 때,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함께 식사했던 시인들에게 이상설 선생이 왜 고국 땅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서 돌아가셔야 했는지를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우리는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잖아요. 돌아갈 나라가 있고, 가족이 있고. 우리는 참 행복하죠. 뱃길만 평온하면 우리는 무사히 한국에 갈 수 있어요.”

나의 말에 박 시인은

“우리가 내일 한국으로 모셔갑시다. 이 술잔에 선생의 혼을 담아서......”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한국에 돌아와서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우수리스크 최재형 선생이 마지막 거주했던 집, 고려인 마을, 까레이스키들의 애환에 대한 기행문과 선생에 대한 시를 여러 편 썼다. 그리고 몇 년 동안 선생을 잊고 있었다. 아픈 마음을 이미지로 형상화해서 시를 쓰는 일이 내가 선생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2017년에는.  


시인들이여, 바라보라

                                                                            강미경


어깨 위에 떨어지는 

스카이블루 우수리스크 하늘의 고요한 함성을 

그는 지금 가을의 러시아 수이푼 강변에 서 있다


쇠사슬에 묶여있던 그의 기차표며 배표도

수이푼 강가에 하얀 가루로 뿌려졌지


흘러라 그의 혼백이여

금지된 그의 조국은 지금 수이푼 강가에 서 있다

                                                        - 이상설선생을 찾아서

 


이상설 선생의 생가, 진천군 산척리 산직마을을 찾아


코로나 19로 인해 온 세계가 어수선한 시국 속에서 마음을 가라앉혀 본다. 외출 대신, 그 동안 써놓았던 원고를 정리하기로 했다. 2017년에 우수리스크에 다녀와서 써 놓았던 시 10여 편을 읽으면서, 그때 내 마음에 파고 들어왔던 이상설 선생에 대한 기행수필을 써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한국 땅에도 그의 유적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인터넷으로 선생의 평전 두 권을 주문해서 며칠을 읽다보니, 그의 생가가 충북 진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독립 운동가들의 유적지에 들를 때마다, 언제나 관람객은 나와 동행해준 지인뿐이던 기억이 떠오른다. 진천으로 여행을 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러보러 오는 이들이 없을 것이므로, 사람들과 접촉할 확률은 거의 없고 코로나 19도 염려할 문제가 아니었으므로 안심하고 떠날 수 있는 여행이었다. 진천 군청에 확인하니, 관람이 가능하다고 했다. 해설사의 설명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니, 책을 세 권이나 읽었으므로, 가서 둘러보면 이해가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한국 땅에서 선생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서울을 출발하여 2시간 30분여 분만에 충북 진천군 산척리 산직마을에 도착했다. 삼덕리 상덕마을에서 좌회전을 하여 논길을 따라 7분쯤 들어갔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로 양옆으로 매실나무가 가로수로 열병식을 하고 있다. 나무 밑에 매실이 떨어져 있다. 황금색 매실이다. 모내기를 6월초에 한다는 말을 들은 것 같다. 길 양옆으로 모내기 해놓은 논의 모습이 평화롭다. 농촌 시골 마을 한켠에 선생의 생가가 외롭게 앉아 있다. 볏짚으로 이엉을 두른 초라한 초가집이다. 두 二자로 된 가난한 초가집. 그곳에서 고려시대 대학자 이제현의 23대손, 조선 인조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시발의 11대 손으로 이상설 선생은 태어났다. 혈통이 훌륭하지만, 이상설 선생의 할아버지 때부터 생활이 궁핍해졌는지 그의 생가는 구한말 가난한 농부의 집만도 못할 정도로 보였다. 


집 앞에 피어있는 진분홍 접시꽃들이 풍경을 더하고 있다. 초가 왼편으로 이상설 선생의 동상이 서 있다. 오른손을 높이 쳐들고 왼손에는 둘둘 만 서류뭉치가 들려져 있다. 30m 옆에 선생의 유물 전시관이 있다. 관람객은 아무도 없었다. 문이 잠겨있을까 염려했으나, 유리문을 밀어보니 다행히 문이 열리고 선생에 대한 기록과 사진들이 전시관을 매우고 있다. 그러나 의암 류인석 선생의 기념관이나 백범 김구 선생의 기념관과는 사뭇 다르다. 뭔가 미흡해보였다. 대한제국 최초의 망명정부-대한독립군정부의 정통령의 전시관이라고 하기에는 빈약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1919년에 설립한 상해임시정부에서는 김구 선생이 한인애국단을 만들어 윤봉길 의사나 이봉창 의사를 파견하여 의열항쟁을 하는 등 광복 때까지 지속적인 활동이 있었다. 이보다 5년 앞서서 세워진 대한광복군임시정부(1914년)가 일제의 방해로 러시아의 압력에 의해 해체되는 등 활동 기간이 짧았다 해도 선생의 다른 노고를 보아서라도 기념관을 좀 더 확장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모든 유품을 다 불태워버리라”고 했던 선생의 유언으로 남아 있는 자료를 모으기 힘들다고 해도 최선의 무엇을 후손들에게 보여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물전시관을 둘러보고, 계단을 17개쯤 올라가서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는 숭열사(이상설 선생의 사당)에 참배를 했다. 1997년 3월 2일에 지금 자리로 이전했다는 설명도 있다. 사당에는 자주색 커튼 앞에 이상설 선생의 사진이 크게 놓여있다. 사진 앞에 나무로 된 검정색 위패도 놓여 있다. 


 “대한독립군정부정통령보재이선생” 

“참배 후에는 까만 상자로 위패를 덮어놓아야 한다”고 일행은 덧붙인다. “선생의 혼이 어디에 계실까요? 유해를 화장하여 수이푼 강에 뿌렸다고 했는데요”라고 내가 물었다. 김삼웅 씨가 쓴 「보재 이상설 평전」에서 이미 읽었지만, 나는 선생의 혼이 어디에 계실까 다시 확인을 하고 싶었다. 


“광복 후 반세기가 지난 후에야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 쌍성자 수이푼 강변에서 초혼례를 올리고 선생의 혼백을 조국 땅으로 모셔왔다.”는 것을 위의 책(262쪽)에서 읽었지만, 선생의 혼백이라도 조국 땅으로 돌아오셨기를 소망하고 싶은 확인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 위패 속에 계시지요. 다른 데 나갔다가도 누가 와서 위패 뚜껑을 열면 위패로 혼백이 돌아오시지요.” “네, 그렇군요. 헤이그 밀사로 선생이 파견되어 만국평화회의에는 입장도 못하고 여러 나라 언론에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렸다고 책에서 읽었어요. 그것에 대해 일제는 궐석재판을 열어 이상설 선생에게 사형을, 이위종 선생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기 때문에 조국에 돌아올 수 없었던 이상설 선생이었잖아요. 광복이 되었으니, 그의 혼백이라도 조국으로 돌아오셔야지요.”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 방명록에 이름을 기재하는데, 어디서 날아왔는지 갈색 나비 한 마리가 방명록 주변을 날고 있다. ‘선생의 혼백이 나비의 날개에 올라타고 오셨을까?’ 나 혼자만의 상상으로 나비를 따라가려 했더니, 우리 일행 주변을 돌다가 사당 뒤편으로 날아가 버렸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2017년에 우수리스크 수이푼 강변 유허비를 보고 왔는데, 이제야 기행문을 완성하려고 여기를 찾아왔네요. 선생에 대해 기행문을 잘 써서 많은 사람들에게 선생의 행적과 정신을 잘 알릴 수 있게 도와주소서.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책 세 권과 진천 방문으로만 선생에 대한 기행문을 쓰려니 글의 실마리가 잡히질 않습니다. 도와주소서” 


이런 나의 기도를 선생의 혼백이 들으셨을까? 그래서 나비 등을 타고 잠시 나타나신 걸까? 혼자 상상해 본다. 그런 생각을 하며 계단을 내려오다 보니, 사당 왼쪽에 무덤이 하나 보였다. 선생의 부인 달성 서씨의 묘라고 상석에 쓰여 있다. 선생이 타계하기 전, 피를 토하자 비밀리에 고향에 연락하여 부인이 극진히 간호했으나 선생은 부인과 동지들 여러 명이 임종을 지킨 상태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했다. 서씨 부인은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던 남편을 10년 만에 만나서 끝내 임종을 지켰고, 오래도록 수절하며 혼자 지냈다고 선생의 평전에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몇 년 전에 윤봉길 선생의 사당(충남 예산)을 방문했을 때도 사당 왼편에 윤봉길 선생의 부인 배봉순 여사의 묘를 본 적이 있다. ‘독립 운동가들의 부인들은 살아서 남편을 독립운동에 내어주었다가 죽은 후에는 남편의 사당 옆에 영원히 잠드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이상설 선생의 부인도 그랬다. 남편을 독립운동에 내주었던 여인들. 그러나 죽어서는 영원히 옆에 누워있는 여인들. 그 여인들은 행복할까? 라는 생각을 하며 우리 일행은 충북 음성을 지나, 경기도 이천과 양평, 가평을 지나 강원도 춘천에 있는 의암 류인석 선생 기념관으로 차로 몰았다. 거기서는 류인석 선생의 부인 두 명(민씨와 정씨)은 류인석 선생과 합장되어 있었다. 류인석 선생은 연해주에서도 이상설 선생과의 교류와 존중으로 광복을 위한 협력을 하셨으나, 그분에 대한 여행기는 다음 글에서 다루기로 한다.  


기록되어야 할, 하지만 기억조차 못하는 큰 업적들 


다시 이상설 생가 앞마당으로 돌아가 보자. 일곱 살 소년이 앞마당에서 뛰어노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선생은 일곱 살 때 양부를 따라 서울로 왔고, 그의 일족이었던 이용우의 양자로 들어간다. 이시발의 경억(慶億)의 후손이었던 이용우는 동부승지를 지내고 재산도 많았지만 자식이 없었기에 이상설을 양자로 들인 것이다. 이상설 선생이 현재 명동 성모병원 근처인 저동으로 이사하게 되었는데, 이시영 선생과 앞뒷집에서 살게 되는 인연이 된다. 사람의 인연법이란 신기한 모양이다. 이시영 선생과 어린 시절에 함께 뛰어놀며 함께 공부하게 되었던 유년시절은 후에 연해주로 망명한 이시영·이회영 6형제의 독립운동과 협주를 하게 된다.

독립운동은 어느 한사람의 힘과 노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관현학의 협주처럼 그들의 독립운동은 협주였다. 맡은 악기의 연주가 다를 뿐이었지만, 그들의 인연은 의롭고 맹렬하게 연주하는 협업이었다. 사망의 원인과 시기가 달랐지만, 그들의 목표는 오직 한가지 조국 광복이었다. 그런데 「보재 이상설 평전」(이창호 지음)과 「이회영, 내 것을 버려 모두를 구하다」(김은식 지음),「보재 이상설 평전」(김삼웅) 책의 내용에서 공통점을 발견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기자, 이상설 선생을 정사로 하고 이위종과 이준 열사를 부사로 하여 헤이그 특사를 파견했다는 것은 어느 책에서나 말하고 있는 사실이다. 고종황제가 백지 위임장을 내주어 고종의 제가를 받은 것도 세 책의 일치점이다.

그러나 김삼웅 씨와 이창호 씨가 지은 평전에서는 상동교회 지하 청년 회의실에서 전덕기 목사와 이회영 선생의 회의와 도움이 있었고. 미국인 헐버트 선교사와 김상궁(고종의 침전상궁)의 도움이 컸으며 고종황제께서 20만원의 내탕금을 내어주었고 한인회(블라디보스토크 한인회장 김학만, 정순만 등 교포들의 모금 1만 8천원)의 후원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김은식 씨가 쓴 책에서는 헤이그 밀사를 전적으로 계획하고 준비한 것은 이회영 선생이며 도운 사람은 조정구(대원군의 사위)라고 쓰여 있다. 이회영 선생의 공로라고 적고 있다.

1905년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민영환·조병세 선생이 자결했고, 이상설 선생도 자결하려다 미수로 그쳤던 비장한 울분이 있던 터였다. 1906년 미리 간도 용정으로 건너가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열어 간도로 이주한 동포들을 대상으로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신학문인 역사, 지리, 법학, 수학, 헌법, 한문 등을 가르치며 반일 민족교육에 힘썼지만 실상은 독립군양성소와 다름없었고, 22명에서 70명 정도의 학생을 가르치는 서당과 같은 규모였다. 이상설 선생은 고종 황제의 밀서를 기다리는 1년여 동안, 사재를 털어 서전서숙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이준 열사가 고종황제의 밀서를 갖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 선생과 만나 헤이그를 향해 떠나면서, 서전서숙은 문을 닫게 되었다. 재정난이 큰 문제였다. 서전서숙은 민족교육의 효시였다. 한인들이 많이 모인 곳마다 학교를 세워서 항일구국의 일념으로 인재를 길러내고자 용정 명동학교가 세워졌다. ‘이회영 선생의 6형제 일가에 의해 신흥무관학교가 세워진 것도 이상설 선생의 서전서숙의 정신적 영향력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선생은 20여일의 긴 장도(長途)를 거쳐서 헤이그에 고종황제의 밀사로 갔다가 만국평화회의에 입장도 하지 못했다는 것. 의회장이었던 러시아측의 답변은 “조선의 외교권은 일본에 있고, 조선의 참석을 연락받지 못했으니 회의장에 입장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고종황제의 친서를 접수하는 것조차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거절과 좌절 앞에서 이상설, 이준, 이위종 3명의 애국심은 주저앉지 않았다. 


이위종은 러시아 주재 한국공사관에 외교관을 지낸 인물이므로 유창한 러시아어로 회의장 앞에서 세계 기자들을 모아 기자회견을 가졌다. 억울한 울분과 을사늑약의 무효를 토로하여, 세계 언론인들만이 동정심과 공명심으로 각자의 나라에 언론화시켰다. 각국 특파원들은 미국, 유럽 등에 각종 매체를 통해 보도하였으나 언론은 정치가들의 결정을 뒤집지는 못했다. 제국주의 야욕에 불탄 열국의 잇권 앞에 언론도 힘을 쓰지 못했다.    


이준 열사가 병으로 헤이그 숙소(융스호텔)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3명 중 2명만 남은 이상설 정사와 이위종 부사는 영국과 파리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 1907년 8월 1일~9월초, 1908년 2월~1909년 4월 두 차례나 미국에 머물면서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고종황제의 밀서를 보이며 조선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지원을 요청했으나, 루즈벨트 대통령은 두 사람의 조선인을 만나주지 않았다. 선생은 헤이그 밀사로 파견될 때부터, 닫힌 문 밖에서, 억울한 호소를 받아들이지 않는 제국주의 열강 앞에서 절망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비통한 일이다. 힘없는 나라, 국권을 빼앗긴 나라의 비운이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미국이 필리핀을 차지하는 대신 일본이 조선을 차지하는 것을 묵인하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정책에서부터 조선은 열강의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먹잇감으로 던져졌다.


먼 여정과 고단한 몇 년 간의 그들의 노력은 이루지 못한 절망이 되었고, 오히려 고종황제를 퇴위시키려는 일본에게 빌미만 제공하고 말았다. 힘없는 군주와 외교관의 좌절이었다. 

미국을 떠나 3개월의 길고도 고단한 여정을 마치고, 이상설 선생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했다. 연해주 지역의 회무 총괄을 맡아달라는 국민회의 결의에 의한 것이었으나, 실상은 일제가 이상설 선생에게 사형선고를 내렸기 때문에 조선 땅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가지 못하던 이상설 선생의 절망의 나날들. 48세의 젊은 나이로 선생은 생을 마감했다.



망국 후 최초로 세운 대한광복군정부의 정통령이 되다

나라를 위해서 뭔가를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이상설 선생. 양아버지에게서 받은 유산을 나라를 위해서 사용하다가 결국 사망하기 수년전에는 러시아 콘지다스지 총독에게 매달 100원씩 생활비를 받으며 그의 고문이 되어주기도 했다. 


1914년, 이상설 선생은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했다. 러시아 콘지다스지 총독과 우호적인 관계로 시베리아 레나강 상류의 넓은 군영지를 무상으로 빌릴 수 있었고, 군대의 막사와 교관까지 러시아 당국에서 제공해주기로 했다. 소총 등의 무기류는 무상으로 지원하는 대신 100원씩의 생활비를 지원받는 임시정부 정통령이었다. 군대편성과 훈련을 중점 사업으로 하려 했으나 러시아 정부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는 비운을 맞아야 했다. 세계 1차 대전의 발발로 인한 것이었다. 


이상설 선생은 조국 광복을 위해 끊임없이 일을 시도하려 했다. 그러나 열강 앞에 약소국 조선의 비운만큼, 선생의 시도는 좌절되는 경우가 많았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러시아 땅에서 도모했던 여러 가지 일들-신흥촌 건설, 문화계몽사업, 13도의군 편성, 고종의 연해주 망명 꾀함, 성명회 조직, 권업회 창설, 권업신문 창간, 대한광복군정부 수립, 신한혁명당 창설 등은 일제가 러시아에게 넣은 압력에 의해서 저지되거나 무산되기 일쑤였다.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도 일본의 압력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조선의 협조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경술국치 후, 이상설 선생은 1910년 8월 18일 성명회를 조직했다. ‘탄서약이 무효임’을 공표하기 위한 성명서(1만여 명의 서명을 받음)를 각국 정부와 신문사에 보내어 국권을 회복하려 했다. 러시아 정부의 탄압 속에서도 활동을 계속했으나, 러시아는 42명의 독립 운동가들과 함께 이상설 선생을 니콜리스크에 유폐시겼다. 러시아 경찰에 일본의 압박이 있었을 것이다. 

 1년 후 풀려나온 이상설 선생은 좌절하지 않고, 1911년, 5월 20일에 권업회를 창설하고, 1912년에는 <권업신문>을 만들어 시베리아 구석구석에 있는 한인마을, 북간도, 국내까지 민족의식을 고취하려 했다. 1913년 10월 6일에는 이상설 선생이 사장 겸 주필이 되고, 일제의 탄압에서 보호받기 위해 러시아인 주고프를 발행인으로 두었으나 러시아 정부의 저지에 의해 폐간되었다(1914년 30일). 일제의 압력에 의한 것이었다.  


이상설 선생은 광복을 위한 마지막 몸부림으로 ‘신한혁명당’을 창설하여 본부장이 되어 활동하였으나, ‘보안법위반사건’으로 모두 검거되어 선생의 계획은 다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선생이 시도하는 항일운동마다 탄압했던 일본. 어쩌면 이상설 선생께서 구국운동에 번번이 실패할 때마다 받은 절망감이 피를 토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라고 말했던 키에르케고르 철학자의 말이 생각나는 시간이다. 이상설 선생을 이해하기 위해서 세권의 책을 며칠 동안 읽었다. 밑줄을 그어가면서 읽는 내내 선생이 시도했던 모든 일들은 오직 구국운동이었으나, 일제의 방해로 좌절되었고 끝내 선생은 망국의 한을 안은 채 이국땅에서 절명했다.


망국 후 최초로 세운 대한광복군정부의 정통령 이상설 선생. 선생의 혼백을 우리 국민들은 진정으로 받아주고 있는가? 그의 혼백이 계실 곳은 어디일까? 태어나신 초가집 안마당에 계실까? 며칠 동안 밑줄을 그어 가며 읽은 세 권의 책 728쪽의 내용은 오직 두 문장이다. 


“이상설 선생은 광복을 위해 투혼을 불살랐다.” 

“우리나라에 국권 회복할 기회가 올 것이니 모두들 낙망 말고 분발하라.”


독립운동을 위해 혼신을 다했던 이상설 선생이 그의 생가 앞에 피어있는 진분홍 접시꽃 속에서 밝게 웃고 계셨으면 좋겠다. 선생은 1917년, 48세에 피를 토하며 고생하다가 사망했다. 선생이 “저술하던 저서와 육신과 모든 유품을 태워서 수이푼 강에 뿌려 달라.”해서 그의 뼛가루는 수이푼 강에 뿌려졌고, 2001년 10월 18일에 수이푼 강가에 선생의 유허비가 세워졌다. 러시아 정부의 협조도 있었다. 선생의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이 후손들에게 그렇게 러시아 땅에서도 기려졌다. 


수이푼 강

                             강미경    


연해주로 가는 가을 바다의 

감청빛 노을

은빛 물소리


물에도 혼이 있다면

아득히 멀어져 간 

이상설의 두 주먹 외로움이 

눈부신 억새풀 잎으로 

수이푼 강가에 하얗게 부서졌다


낙타빛 그리움

안으로 안으로 삭히는 

쥐난 종아리처럼 


햇살 따가운 갈대 잎 위에 

우수리스크 

들리지 않는 

하얀 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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