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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 역사기행 [2020/08] 만주 항일유적답사기 - 백두산 가는 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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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영산 백두산 가는 길 (2)

윤동주 시인의 발자취를 찾아서 

 

 

                              

글  |  최범산(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역사교육원장)


2020년은 대일독립전쟁(對日獨立戰爭) 35년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승전으로 기록되고 있는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10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이다.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와 월간 『순국』에서는 독립전쟁 100주년을 기념하여 북간도 일대 독립전쟁의 유적지와 함께 백두산 천지를 등반하는 지상특집을 마련하였다. 그 첫 번째 기획으로 만주지역에서 잊혀가고, 왜곡되고 훼손당하고 있는 독립전쟁유적지 현장을 15년 동안 답사하고, 항일유적답사기의 출간과 함께 강연활동을 해온 작가 최범산의 ‘백두산 가는 길’을  연재한다.


백두산 가는 길의 여정은 서울에서 중국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에 도착하여 연길시(延吉市)를 출발하여 모아산을 지나 윤동주 시인의 고향인 용정시 명동촌, 일송정과 평강벌에 서린 역사와 유적을 찾는다. 그리고 두도구, 서성진 진달래조선족 마을을 지나 화룡시 청호촌의  삼종사 묘역, 청산리 전투 유적지, 노령의 고동하를 지나 안도현의 대한독립군 활동 유적지 등을 답사한다. 마지막 여정으로 백두산 자락 이도백하 송림을 지나 하늘 아래 첫 동네로 불리는 내두산 조선족촌을 거쳐서 북파산문을 통해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칠백 리길 대장정이다.


윤동주 시인은 용정시에서 동남쪽으로 이십여 리 떨어진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다. 1931년에 명동(明東)학교를 졸업하고, 용정에 있는 은진(恩眞)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35년 봄, 고종사촌인 송몽규가 낙양군관학교 입학을 위해 북경으로 떠나고, 동급생 문익환이 평양 숭실중학교로 편입해 용정을 떠나자, 윤동주는 부모님을 설득하여 1935년 9월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을 갔다. 숭실중학에 편입한 후 숭실중학청년회에서 발행하는 『숭실활천』에 〈공상〉, 〈조개껍질〉 등 동시를 발표하며 문학에의 꿈을 키워간다. 


기독교계 학교였던 숭실학교 교장이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강제로 파면을 당하자, 이에 항의하는 학생들 시위가 일어나게 되었고, 그 사건으로 숭실중학교는 무기한 휴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운동주는 용정으로 돌아와 일본인이 경영하던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하여 연길(延吉)에서 간행되고 있는 가톨릭 소년(少年)에 1936년 11월부터 동시(童詩) 병아리, 빗자루, 오줌싸개지도, 고향집 등을 발표했다.


헌 짚신 끄을고 나 여기 왜 왔노

두만강 건너서 쓸쓸한 이 땅에

남쪽 하늘 저 밑에 따뜻한 내 고향

내 어머니 계신 곳 그리운 내 고향


1936년 1월에 썼던 고향집의 전문이다. 그가 명동촌과 어머니를 얼마나 그리워하면서 지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동시였다. 중학교 졸업이 가까워지자 윤동주는 진학문제로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자신의 뜻과는 달리 아버지가 의과대학에 지망하기를 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문학에의 열망으로 문학청년이 되어버린 자신의 신념을 꺾을 수는 없었다. 윤동주는 단식투쟁까지 벌리면서 부친과 극한 대립을 한 끝에 1938년 4월 9일 송몽규와 함께 꿈에도 그리던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연희전문학교에 온 윤동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문학작품을 탐독했고, 릴케, 워즈워스, 바이런 등의 시를 읽으며 문학에 대한 열정을 더욱 불태우게 되었다. 윤동주는 교내 문학활동에도 활발하게 참여하면서 틈틈이 창작한 작품들을 조선일보 학생란에 발표했고, 연희전문학교 문우(文友)에 〈자화상〉, 〈새로운 길〉등을 발표하였다. 


약소민족의 절망적 현실과 감정, 시정(詩情)으로 승화

1938년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조선총독부가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고 총동원령을 내리게 되자, 많은 사람들이 윤동주는 극한으로 치닫고 있는 시대상황에 대한 회의와 분노, 일제의 억압과 착취를 겪어야 하는 약소민족의 절망적 현실을 온몸으로 느끼며 괴롭고 힘든 나날 속에서도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녹여 시정(詩情)으로 승화시켜 나갔다.


1941년 12월 일본 폭격기들이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 연희전문학교에도 태평양 전쟁의 회오리가 몰아쳤다. 많은 학생들이 전쟁터로 끌려갔고, 전쟁물자 징발로 인해 온 사회가 급격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 졸업을 앞둔 윤동주는 학도병 징발, 진학문제 등으로 괴롭고 힘든 날들을 보내야 했다. 미래 불확실에서 오는 불안감, 민족적 양심과 식민지 현실의 상황에서 오는 갈등, 극악으로 치닫고 있는 일본의 탄압과 착취, 태평양 전쟁에 끌려가는 사람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윤동주는 시적 정서로 승화시키며 자신만의 시적 세계를 펼쳐나갔다. 1941년 5월 이후는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많은 작품들이 창작되었던 시기였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중략 –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볕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이다. 벌레 우는 밤, 곧 암울한 식민지 시대를 살았고, 일본유학을 위해 창씨개명을 했던 윤동주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며 살았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봄, 조국의 광복이 반드시 올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어머니와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한 윤동주의 마음속에는 조국광복의 염원이 언제나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연희전문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던 윤동주는 무언가 뜻 깊은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만들게 된 것이 그동안 써놨던 시를 묶어서 만든 자필시집이었다. 


연희전문을 졸업한 윤동주는 졸업기념으로 19편의 자작시를 묶어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을 짓고 이양하 교수를 찾아갔다. 그러나 시를 읽어본 이양하 교수가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만류하자, 그는 시집의 출간을 포기했다. 윤동주가 시집의 서문에 올리기 위해 1940년 11월 20일에 심혈을 기울여가며 쓴 작품이 오늘날 한국인 사이에서 최고의 애송시가 된 서시(序詩)였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겠다는 서시는 어둠과 빛, 하늘과 땅으로 대표되는 시어 속에 조국의 현실을 괴로워하는 윤동주의 자아(自我)가 녹아있다. 그리고 어둠에서 찾아낸 빛, 곧 밤하늘의 별을 본다는 것은 빛을 보는 것이요, 빛은 광명이며 동시에 희망이다. 그러므로 암흑시대에 있어서의 별의 의미는 빛과 희망을 의미하는 것이다.


윤동주는 일본으로 떠나기 전에 자필로 쓴 시집 3부를 만들었다. 그리고 시집 세 권을 영문과 교수였던 이양하 교수와 후배였던 정병욱, 그리고 자신이 나눠가졌다. 그동안 문학에 정진하며 비교적 순탄한 학창생활을 보낸 윤동주는 태평양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문학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며 일본 유학을 준비했다. 그는 일본 유학 수속을 밟기 위해서 평소동주(平沼東柱)라는 일본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했다. 그 무렵 쓴 시가 참회록이며, 이는 윤동주가 한국에서 쓴 마지막 시가 되었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암울한 현실 극복, 참된 자아 통한 미래 희망 노래


윤동주는 일제치하를 살아가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욕된 것인가를 가슴 깊이 새기고 있었다. 더구나 창씨개명을 하면서까지 유학을 떠나야 하는 심정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윤동주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자아성찰을 위해 번뇌했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일제치하 암울한 밤에 현실과 타협하는 삶이 아니라 밤마다 거울을 닦는 자아성찰의 삶이 나타나 있다. 그러한 삶을 통해 윤동주는 끊임없이 자신과의 대화를 했으며 그러한 마음들이 시어로 표출되어 나타난 것이 참된 자아를 통한 미래에 대한 희망이었을 것이다.


참회록은 윤동주가 창씨개명을 한 날보다 일주일 앞서 쓴 시였다. 그는 참혹한 식민지 현실에서 욕된 삶을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참회록은 만 이십사 년 일개월 동안 아무런 기쁨도 없이 살아온 자신에 대한 참회이며, 식민지 현실을 살아가는 자신의 참담한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도 마음대로 쓸 수 없는 암담한 현실에서 그는 일본인의 성과 이름으로 살아야 하는 부끄러운 현실을 참회하고 반성한다. 그러나 그러한 윤동주의 참회는 좌절과 절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일이나 모레 그 어느 즐거운 날, 조국광복을 기약하는 강한 다짐을 동반한다. 이것이 윤동주의 내면세계이며 밝은 미래에 대한 염원이 이 시속에 강렬하게 표출되어 나타난다. 


윤동주의 시에 나타난 민족의식과 저항정신은 현실도피적 성향을 가졌던 1930년대 김영랑으로 대표되는 순수시나 김광균의 모더니즘의 시와는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일제시대 식민지 시대의 억압과 차별, 비극적 삶의 현실을 통찰하고, 밝은 미래에 대한 열렬한 동경을 나타내었다. 일제의 탄압과 수탈에 굴복하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시정신은 그를 저항시인으로 부르게 한다. 그의 시의 저항성은 후반의 시부터 점차 내면화하기 시작하는데 태평양 전쟁 이후 내려진 총동원령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징병과 징용으로 끌려가는 현실에서 날로 가혹해지는 일본제국주의의 악랄한 억압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 내면을 일관되게 흐르는 저항성은 이육사, 한용운과 더불어 일제치하에서 가장 투철한 저항시를 남긴 시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013년 여름이었다. 조선족자치주 창립 60주년을 맞이하여 윤동주 생가를 새롭게 단장했다는 말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명동촌을 향했다. 용정버스터미널에서 곧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20여분 만에 윤동주 시인 생가 앞에 도착했다. 그동안 연변지역 항일유적을 답사할 때마다 윤동주 생가를 여러 번 찾았지만 거의 변한 모습이 없었는데 이번에 새롭게 확장공사를 하였다니 한걸음에 달려왔던 것이다.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中國 朝鮮族 愛國詩人 尹東柱 生家)’ 대문 옆으로 커다란 표지석이 서 있는데 그곳에 이렇게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갑자기 다리 힘을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윤동주 시인이 조선족이라니 도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일이란 말인가. 그동안 이곳을 여러 번 찾아왔었지만, 오늘처럼 충격을 받은 적은 없었다. 이곳을 새롭게 단장한다는 것이 윤동주 시인을 조선족으로 만드는 일이었단 말인가. 


윤동주는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입교대학(立敎大學)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암울한 시대 식민지 조선인으로서 일본대학에서 학문을 탐구한다는 것은 너무나 힘겹고 고통스러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일본인들로부터 견딜 수 없는 차별과 냉대를 받아야 했기에 내면에서 울려오는 자책과 회한에 빠져 고독한 번민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일본인들의 차별과 냉대, 모욕과 조롱의 굴욕적 삶을 살아가면서도 그는 결코 창작의 붓을 놓지 않았다. 일본인들의 민족 차별에 대한 분노를 시심에 담았고, 차별을 받으면 받을수록 민족적 자각이 더욱 강렬하게 일어났다. 그의 일본 유학시절의 심정이 가장 잘 나타난 있는 시로 평가되는 '쉽게 씌여진 시'가 이때에 창작되었다.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 중략-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민족의 등불을 밝히고, 어둠으로 가득한 현실을 타파하여 다가오는 아침, 곧 광복을 기다리는 마음이 잘 나타난 시이다. 내적 자아와 외적 자아의 갈등을 조국광복의 염원으로 화해시키며 자신을 위로했던 시였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을

담 저 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길이란 시에서 그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잃어버린 자아이며, 빼앗긴 이름이며, 조국이었을 것이다. 그는 일본 유학생활에서 느낀 민족 차별과 망국의 아픔을 하늘과 바람으로 노래하며 오로지 시 창작에 매달렸다. 북간도에서나 서울에서 학교를 다닐 때 느꼈던 시대상황보다 더 잔혹하게 다가온 일본의 생활이 그에게 잃어버린 것을 찾아야 한다는 자각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태평양 전쟁의 불길은 미국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더욱 격화되었고, 전사자와 부상자들을 실은 군용차들이 거리를 질주하는 상황을 목격한 윤동주는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전쟁에 휩싸인 일본인들의 불안감을 피부로 느꼈을 것이다. 당시 일본의 상황은 풀 한포기 없는 길이었으며 어둡고 긴 터널에 멈춰있는 것처럼 공포가 덮힌 도시였을 것이다. 전쟁의 시대에 윤동주는 불안과 고독, 자책과 회의에 연속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미국의 공격으로 다급해진 일본은 각종 징병제와 징용, 학도병 제도를 실시하여 40여만 명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윤동주는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용정으로 돌아왔다. 용정에서 지내는 동안 만주지방에서 발악하는 일본인들을 보았을 것이다. 그 당시 용정은 항일독립투쟁이 약화된 상황이었다. 그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도시샤대학 영문과로 전학했다. 그는 시대상황을 외면한 것이 아니라 시대처럼 올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 다시 떠났던 것이다.

  



조국과 민족 사랑한 시인, 자아성찰 통해 정의로운 삶 선택  


1943년 7월 14일, 동지사 대학에서 첫 학기를 마치고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귀국길에 오르기 직전 윤동주는 조선인민족주의구룹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전격 체포되었다. 송몽규, 백인중, 강처중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의 중심인물이라는 혐의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경찰의 고문과 협박에도 윤동주는 일본인들의 국권강탈과 수탈, 강제징병, 조선인 차별 정책을 비판하면서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윤동주의 당당하고 대범한 논박에 당황한 일본 검사가 모든 혐의를 인정하고 함께 활동했던 학생들의 이름을 말하면 선처해주겠다는 회유했지만 윤동주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화가 난 검사는 윤동주의 작품들을 불온한 반일정서가 담겨 있다며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사국에 송치한 뒤 1944년 2월 22일에 재판에 넘기고 말았다. 


조선인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의 의지를 꺾기 위해 무리하게 진행된 재판은 한 달도 되지 않아 모든 심문을 종결하고 선고를 내렸다. 윤동주는 후쿠오카 재판정에서 징역 2년을 선고되었다. 일본제국주의 억압과 차별에 분노하는 한국인 유학생이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저항과 투쟁, 비폭력적인 항일활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비열하고 치졸한 일본판사는 반일활동(反日活動)하는 학생들은 일벌백계로 다스려야 한다며 중형을 선고했던 것이다. 나라를 빼앗기고 언어를 빼앗기고 이름마저 빼앗겼던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펜을 들고 저항시를 썼고, 민족적 자각과 양심에 따라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했기에 악랄하기 그지없는 일제의 법에 의해 처벌된 것이다.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일본인들의 협박과 회유, 견딜 수 없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기 위해 매일 악귀처럼 달려드는 간수들의 매질을 견뎌냈고, 협박에 굴하지 않았으며 전향을 권하는 회유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끔은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라고 하는 말을 듣게 된다. 모난 돌이 정(釘) 맞는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윤동주는 현실에 적당히 타협하고 제국주의에 순응하며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자아성찰을 통해 무엇이 정의로운 삶인가를 깨달았고, 그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며 시인이 가야 할 정의를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1910년 경술국치 후에 왜왕의 은사금을 받았던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자식들이 일본유학을 많이 갔던 시절이었다. 그렇기에 일본에서의 항일활동은 일본인들이나 친일파 자식들에게 오히려 웃음꺼리가 되는 어이없는 시대였다. 그 당시 유학생 대부분이 일본을 찬양하고 협조하면서 현실에 적응하였고, 심지어 대동아공영에 앞장서 스스로 아부하며 굽실거리는 파렴치한 유학생들이 많았다. 그러한 한국인들만 보아왔던 일본인들은 윤동주와 송몽규의 행위가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에 윤동주가 일본 검사들의 회유를 받아들였다면, 최남선, 이광수, 김동환, 모윤숙, 서정주 등과 같이 일본인의 개가 되어 친일로 돌아섰다면, 그는 쉽게 풀려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윤동주는 끝내 그들의 협박과 회유에 굴복하지 않았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선택했던 것이다.


조국광복을 6개월 앞둔 1945년 2월 16일, 29세의 젊은 나이로 후쿠오카 형무소 싸늘한 감방에서 저항적이고 민족적이었던 생애를 마감했다. 그의 사인에 대하여 일제의 생체실험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이 양심을 가진 일본인 학자에 의해 밝혀져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비인간적이고 잔악한 행위가 다시 한 번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1945년 광복 후에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와 후배였던 정병욱이 다른 유고를 묶어서 194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시집을 발간하였다. 윤동주 시인의 유해는 고향 용정으로 옮겨 장례식을 치르고 안장되었으며, 그가 그토록 염원했던 광복된 조국에서는 1990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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