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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 역사기행 [2020/05] 순국선열 역사기행 - 일송 김동삼 선생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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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에서 만주를 생각하다  


독립투사들 모두 손꼽아 존경한 인물

만주벌 호랑이 김동삼 선생


글 | 강미경(시인, 여행작가)


여행엔 언제나 뜻밖의 보물이 숨어있다. 경북 안동으로 여행을 떠났다. 나는 이곳에서 엄청난 사실을 얻었다. 기념관 앞마당 오석(烏石)에 적힌 안동 독립운동가 1,000인의 이름이었다. 1,000명이 넘는 독립운동가를 배출해낸 안동 땅. 놀라운 발견이었다. 우리나라 어디를 둘러보아도 독립운동을 하지 않은 지역은 없지만 안동이 1,000명을 넘게 배출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퇴계 학맥의 정신적인 영향 때문일까?’ ‘안동은 독립운동의 요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여행의 구슬을 꿰어본다. 


안동 모두 둘러보는 데는 한 달도 넘게 걸리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내게 허락된 하루라는 시간에 보물을 담느라 분주했다. 먼저 경북독립운동기념관 앞, 내앞마을을 먼저 둘러보기로 했다. 내앞마을도 독립유공자를 20명이 넘게 배출했다. 1910년대 만주로 망명한 사람들만 150명이 넘을 정도였다. 이곳에는 여러 볼거리가 있었지만, 김동삼 선생과 관련된 백하구려와 김동삼 생가(生家)를 둘러보았다. 기념관에서 건네준 책자 <史蹟에서 만나는 안동독립운동>을 넘기다 보니, 김동삼 선생이 눈길을 끌었다. 

 ‘김동삼 선생은 독립운동에 큰 별인데, 안동 사람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 중2국어 교과서에서 한용운 선생의 ‘심우장’을 가르쳤던 기억이 있다. “한용운 선생이 김동삼 선생의 장례를 심우장에서 치러주었으며, 눈물을 흘리며 크게 통곡했었다”는 구절이 생각났다.  생가를 둘러본 후, 안동댐 공원에 있는 김동삼 어록비를 보러갔다. 안동댐의 초록빛 물줄기가 잔잔히 흐르고 있다. 귀한 보물을 발견한 마음으로 그의 어록비를 보러 달려가 본다. 머리를 들어 어록비에 새겨진 구절을 읽어본다. 끈적끈적한 햇살 아래 그가 생전에 남긴 유언은 마음을 서늘하게 하는 것 같다. 


 나라 없는 몸 / 무덤은 있어 무엇하느냐 /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 왜적이 망하고 /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 지켜보리라 

                                                                                   - 서대문감옥 옥중 유언에서


  조국독립 의해 온 몸 바쳐 희생한 독립군의 거성, 김동삼 김동삼 선생은 1931년 하얼빈에서 일본 앞잡이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신의주를 거쳐 서대문형무소에서 병 옥사한다. 순국이다. 10년형을 받고 복역하던 중 옥고를 치른 지 6년만인 1937년 4월 13일이었다. 그가 죽기 전에 남긴 유언대로 그의 유해는 화장하여 한강에 뿌려졌다. 그런데 동작동 국립현충원 임시정부 묘역에 그의 묘지가 있다. 비석도 있다. 한강에 이미 뼛가루 뿌려진 지 오래지만, 우리 후손들은 그를 바람에 날려 보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우리 독립운동사에 남긴 그의 커다란 족적을 가묘(假墓)라도 만들어 기억하며 기리고 싶은 것이다. 임은 떠났지만, 님이 선물해준 머리핀 하나도 버리지 못하는 여인의 마음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만주의 칼바람과 험난한 날씨와 굶주림. 그리고 독립을 위해서 각고의 노력을 아끼지 않은 그분들의 고통을 겪어보지 못했기에 조금도 헤아리지 못할는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그러나 안동에서 보았던 그의 흔적–생가, 백하구려, 어록비 세 곳을 보고 그를 생각하며 만주를 상상해 본다. 한 달이 넘도록 그에 대해 공부를 하고 책을 읽고 상상을 해본다. 일송 김동삼 선생이 품었던 마음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본다. 안동댐에서 보았던 녹빛 물줄기의 잔잔한 물여울처럼, 만주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을 거라고 상상해본다. 

 생가(生家)로 잠시 돌아가 보자. 김동삼 선생이 태어나신 곳이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279번지(내앞길 7-7)였다. 6월 뙤약볕이 양산을 뚫고, 살갗을 파고들었다. 한낮의 햇살은 테러와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래도 김동삼 선생과 관련된 곳을 둘러보고 사진을 찍는 게 옳다는 생각에 붙들려 김동삼 선생의 흔적을 더듬어 나갔다. 그의 생가(生家) 앞에는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다. ‘일송 김동삼 선생 생가터’라는 설명 표지판과 표지석도 집 앞에 놓여있다. 표지석 앞에는 키 낮은 노랑, 빨강색 꽃이 피어있다. 꽃 이름은 모르지만 검은 대리석과 잘 어울리는 풍경이 평화롭게 보였다. 거기엔 그의 후손들은 살지 않는다. 1911년 3월에 집과 논밭을 모두 팔아 만주로 망명길을 떠났으니, 그곳 주인은 다른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의 후손 중 손녀 둘이 영등포 어느 동네에서 노인연금 20여만을 받으며 힘겹게 살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던 기억도 머리를 스쳐간다. 



춥고 척박한 땅, 만주 땅에 독립군 기지를 구축하다

 따뜻한 남쪽 지방, 안동을 떠나 칼바람 부는 만주 벌판에서 김동삼 선생은 삶을 불살랐다. 그가 만주로 가는 길은 안동 일대의 유림들(이상룡, 김대락) 가족들과 함께 떠나는 집단 망명이었다. 따뜻한 남쪽 나라, 부모님 품 같은 고향을 떠나는 것은 아픔이고 슬픔이었을 것이다. 안동에서 추풍령까지 걷고, 추풍령에서 신의주까지 기차를 타고, 신의주에서 압록강을 걸어서 건너고 만주까지는 마차를 타고 갔다고 전한다. 그 멀고 험한 망명길은 그가 걸어갈 독립운동가로서의 대장정에 서막이었다. 

 만주의 기온은 거의 영하의 날씨라고 한다. 광활하고 춥고 척박한 땅, 남만주 유하현 삼원포. 그곳에서 그는 우당 이회영 선생과 만난다. 삼한갑족인 이회영 6형제가 6,500억 재산을 팔아 만주로 망명하여 김동삼 선생과 만난 것은 두 거성(巨星)이 나라를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지 내다보이는 일이었다. 두 거성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여는 것이었다. 경학사(耕學社)는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될 자치 기구였다. 경학사는 이시영, 이동녕, 이상룡, 윤기섭, 김창환도 함께 했다. 그리고 삼원포 추가가 마을 허름한 옥수수 창고에서 신흥강습소를 열었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나중은 창대한 것처럼, 후에 신흥무관학교에서 배출된 군사들이 청산리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될 것은 하늘만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1912년 봄에는 추가가에서 동남쪽으로 90리 떨어진 합니하(哈泥河)로 이주하여 1백 여 명의 대원들을 데리고 신흥무관학교를 연다. 학교 주변은 360도 물이 휘돌아 흐르는 해자처럼 되어있어 천연 요새의 역할을 해주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독립군들은 낮에는 농사지으며 군사훈련을 받았고 밤에는 추위와 허기를 이겨냈다. 그곳에서 강훈련을 받은 대원들은 졸업 후에 백서농장에서 맹훈련을 받았다. 백서농장은 백두산 서쪽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중국과 일본의 눈을 피해 농장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나 대규모 병영시설, 군사 훈련 부대였다. 통화현 제8구 팔리초(八里哨) 오관하(五菅下) 소백차(小白岔) 깊은 밀림이었다. 원병상이 쓴 회고록 <신흥무관학교에서>의 구절을 살펴보자.


 “이곳은 사람의 발자취가 닿지 않은 밀림지대로써 곰, 멧돼지, 오소리 등 산짐승이 득실거리는 깊은 산골짜기다. 이곳에 막사를 짓고 큰 뜻을 품은 동지들이 모여들어 새와 짐승을 벗 삼아 스스로 밭 갈고 나무하는 농사꾼이 되어 도원결의(桃園結義)의 굳은 맹세를 방불케 하였다.”


이처럼, 인적이 없는 깊은 산속에서 독립투쟁을 위해 군사훈련을 하며, 일제와 무력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하려는 일념 하나로 뭉쳐있었다. 하지만 물자부족, 질병, 굶주림과도 싸워야했다. 그러면서 더욱 더 강인하게 단련되어졌으리라. 1919년 3・1 운동 이후 한족회의 지시로 문을 닫을 때까지 385명의 독립군을 양성했다. 

 김긍식(金肯植)의 본명을 갖고 있던 일송(一松)이 자신의 이름을 김동삼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도 만주시절부터였다. 혹독한 추위와 사람의 발길 하나 없는 백서농장에서 4년 동안 훈련받은 독립군은 서로군정서로 편입된다. 서로군정서(서간도의 군정부)에서 김동삼은 참모장이 되어 대원들을 지휘한다. 서로군정서 대원들은 1920년 5월부터 활동을 본격화했다. 10~20명씩 유격대가 되어 압록강을 건너 평북 경찰분소와 면사무소를 공격했다. 무장투쟁을 시작한 것이다. 이후 서로군정서는 북로군정서에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을 파견하여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게 된다. 

 홍범도 부대의 대한의용군으로 편성시켜서 청산리전투에서 공을 세운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김동삼 선생은 신흥무관학교, 백서농장에서 맹훈련으로 길러낸 군사들을 무장 항쟁에 투입하는 엄청난 공을 세웠던 것이다. 서로군정서와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피신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산리전투에서 대패한 일본이 보복을 해왔기 때문이다. 독립군 가족을 살해하고 조선인들을 모두 학살하는 경신참변, 간도대학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지정천과 김동삼이 이끄는 4백 여 명의 교성대(신흥무관학교 졸업생 무장부대)만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게 된다. 호랑이다운 기개였다. 


청산리전투 대승의 숨은 공로자…독립을 위해 하나가 되자 

낯설고 물 설은 만주 땅에서 그의 일념은 오직 한가지였을 것이다. 한 그루 소나무라는 그의 호를 잠시 생각해 본다. 독립운동에 뛰어들지 않고 평범한 백성으로 살았더라면, 칼날 같이 험난한 삶은 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는 가시밭길을 선택했다. 청소년 시기에 스승인 김흥락의 영향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1895년 12월 을미의병 당시 안동의병을 일으켰던 의병장의 삶을 보면서 그는 스승의 뒤를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꽃이 만발해있는 공원에 가면, 꽃향기가 어느새 내 안에 스며드는 것 같다. 그러나 진흙 밭에 가면 밟지 않으려 해도 발에 흙이 묻게 마련일 것이다. 김흥락과 같은 의병장의 영향이 있었기에 김동삼 선생은 만주벌 호랑이가 되어 무력 항쟁으로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열정을 불태웠을 지도 모른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8년 후에 광복이 찾아왔다. 얄타 회담이나 포츠담 회담과 같은 열강들의 세계사적 이권의

 흐름 속에서 우리에게 해방이 운 좋게 주어진 것일까? 연합국 승전의 부산물로 해방이 된 것일까? 

 김동삼 선생의 서로군정서,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광복군, 대한독립단, 김원봉의 의열단, 김구 선생의 한인애국단과 같은 의혈 쟁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자.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하고 목숨을 바친 독립군들의 생명과 피가 있었다. 안동댐 공원에서 김동삼 어록비를 둘러보고 차를 타기 위해 주차해 둔 곳으로 길을 건너왔다. 무심코 눈에 들어온 앉은뱅이 꽃 한 송이. 돌 틈에서 말없이 피어 있다. 꽃분홍 진한 빛이다. 마치 역경을 뚫고 눈보라 속에 피어난 꽃만큼이나 처절해 보였다. 잠시 스쳐가는 생각 하나 - 김동삼 선생이 이끌었던 백서농장이나 서로군정서의 독립군들도 저처럼 강인하고 투철한 정신 하나로 무장된 용사들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글을 마무리하며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이회영 선생과 김동삼 선생이 만주에서 만나서 의기투합하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뜻을 같이 하는 동지가 뭉쳤기 때문에, 신흥강습소, 신흥무관학교, 백서농장에서 오랜 준비가 있었기에 청산리전투의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청산리전투의 성공에는 김동삼 선생이 있었다. 김좌진 장군과 홍범석 장군의 빛나는 이름 뒤에는 서로군정서의 부원들의 지원이 있었다. 하지만, 이름을 얻으려 김동삼 선생은 다투지 않았고 오히려 통합을 애썼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멋진 협주곡은 어느 악기 하나의 소리가 튀어서는 아니 되는 법이다. 그것을 아는 겸손한 호랑이 김동삼 선생을 오늘 나는 기억하고 싶다. 안동 여행에서 내 마음바구니에 담은 소중한 보물 – 김동삼 선생을 생각한다. 뜻을 같이 하는 좋은 친구를 발견했으나 교차로에서 죄회전과 우회전으로 친구를 잃어본 사람은 안다. 뜻을 모은다는 것은 찬란하게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을. 만주벌 호랑이 김동삼 선생은 만주에서 협주를 꿈꾸었던 멋진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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