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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우리땅 [2020/08] ‘피란수도’ 부산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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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과 분단이 남긴 흔적, ‘피란수도’ 부산여행

 

피란민의 땀과 눈물 서린 도시의 속살 

산비탈 판잣집에서 희망을 그리다


글  |  편집부  사진 제공 | 한국관광공사


부산 하면 ‘낭만도시’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푸른 바다가 넘실대는 해운대와 광안리, 부산 갈매기와 자갈치시장, 돼지국밥과 밀면, 부산국제영화제 등등 오감을 춤추게 하는 것들이 많다. 하지만 도시의 깊은 속살을 들여다보면, ‘피란수도’의 땀과 눈물이 곳곳에 서려 있다. 광복에서 6·25전쟁을 거쳐 고단한 현대사를 살아온 피란민들의 흔적을 찾아 길을 떠나본다. 



광복의 기쁨과 분단의 아픔이 공존하는 곳


이번 여행의 출발점은 조금 특별하다. 중구 대청산 자락의 중앙공원에 있는 ‘부산광복기념관’이다. 1876년 부산항이 개항한 뒤 1945년 8월 15일 광복될 때까지 일본의 침략에 항거한 부산의 독립운동 역사를 볼 수 있는 곳이다. 부산의 3·1운동, 동래장터 독립만세운동, 구포장터 독립만세운동 등에 대한 기록물이 주제별로 알차게 구성되어 있다.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는 위패봉안실도 있다.


광복기념관에서 부산의 독립운동사 전반을 살펴봤다면, 다음 여행지는 ‘임시수도기념관’이다. 

관저 1층은 대통령이 정부 각료들과 회의하고 외교 업무를 보던 응접실, 대통령 내외가 사용하던 내실, 서재, 거실, 식당과 부엌 등으로 꾸며졌다. 2층은 이승만 대통령이 전방 부대와 훈련소를 시찰하면서 입은 방한복, 프란체스카 여사가 입은 코트 등 부부의 유품과 관련 자료가 있다. 


대통령 관저 뒤편에 자리한 전시관은 1987년 부산고등검찰청의 검사장 관사로 지어진 건물이다. 검찰청사가 이전하면서 2002년 임시수도기념관 전시관이 되었다. 서울과 부산을 오가던 열차 모형, 아들을 전쟁터에 보낸 아버지의 위문편지, 피란민이 생활하던 판잣집, 일거리를 찾아 나선 피란민, 피란 학교의 모습 등을 볼 수 있다. 폐허 속에서 끝끝내 희망을 일궈낸 그들의 삶이 참으로 경이롭다.   


▶부산광복기념관

전화: 051-860-7819

주소: 부산 서구 망양로193번길 167

시간: 하절기 09:00~18:00 동절기 09:00~17:00(월요일 휴무)

요금: 무료


▶임시수도기념관

전화: 051-244-6345

주소: 부산 서구 임시수도기념로 45

시간: 09:00~18:00(1월 1일 휴관, 월요일 휴무)

요금: 무료


산복도로를 쉼 없이 오르내린 고달픈 인생들


 

부산은 평지가 좁고 산이 많은 지형이다. 일제강점기에 일자리를 찾아 전국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살 집이 없어 산으로 올라갔고, 산에는 무허가 판자촌이 하나둘 생겼다. 6·25전쟁 때는 피란민들이 봇짐을 지고 부산으로 모여들었다. 광복 당시 28만 명이던 부산 인구는 전쟁을 거치며 100만 명이 훌쩍 넘었다. 비좁은 산비탈은 그야말로 판잣집으로 뒤덮였다. 고달프고 힘겨운 시절이었지만, 비탈에 선 산동네는 피란민들에게 희망의 안식처였다.


1964년 10월 산동네를 연결하는 첫 산복도로가 개통됐다. 중구 대청동 메리놀병원 앞에서 동구 초량동 입구까지 1820m 구간을 잇는 ‘망양로’다. 산복(山腹)은 산허리를 뜻하며, 산복도로는 경사지를 개발하면서 맨 위쪽에 자리한 도로다. 이후 구봉산과 천마산을 비롯해 부산 곳곳에 산복도로가 만들어졌고, 부산은 ‘산복도로의 도시’가 되었다.

망양로의 랜드마크는 ‘유치환우체통’이다. 빨간 우체통이 푸른 바다를 등지고 섰다. 빨강과 파랑의 대비가 선명해 포토존으로 인기가 좋다. 유치환우체통은 부산과 인연이 깊은 유치환 선생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으로, 편지를 넣으면 1년 뒤에 배달된다.


바다를 향해 뻗은 ‘168계단’에도 피란민들의 애환이 서려 있다. 하늘에 맞닿은 듯 가파른 168계단은 산복도로에서 부산항까지 이어주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부산항에서 일하던 부두 노동자들의 출근길이자 우물에 물을 길러가는 아낙네들이 지나다녔던 길이다. 숨을 고르며 수없이 오르내렸을 가파른 계단에는 이제 모노레일이 들어섰다. 모노레일을 타고 비탈을 오르자면, 정겨운 마을 풍경 넘어 파란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달동네


 

 산복도로를 이야기할 때 빠뜨리면 안 되는 곳이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불리는 감천문화마을이다. 감천문화마을도 6·25전쟁과 인연이 깊다. 부산은 전국에서 몰려든 피란민으로 가득 찼고, 집 한 칸 없는 피란민들은 산기슭에 빽빽하게 집을 지었다. 감천문화마을도 이때 생겨났다. 1950년 태극도 교주 조철제가 피란한 신도들과 함께 옥녀봉 아래 집단 거주지를 형성한 것이 감천문화마을이다. 산비탈을 개간하면서 슬래브 지붕을 얹은 계단식 주택을 지었고, 앞집이 뒷집의 조망을 가로막지 않으며, 모든 골목이 이어져 소통할 수 있도록 했다.


반세기가 흘렀어도 달동네는 옛 모습을 간직했고, 지붕은 파란색과 분홍색 등으로 알록달록하게 칠해져 아기자기한 풍경을 만들어냈다. 여기에 마을의 특색을 살리기 위해 지역 예술인과 마을 주민이 ‘마을 미술 프로젝트’를 진행,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달동네가 탄생했다. 


꼬불꼬불 미로 같은 골목은 시간여행을 떠나는 듯 흥미진진한 공간으로 되살아났고, 낡고 허름한 집들은 현대사의 굴곡을 담아낸 거대한 생활사 박물관처럼 다가왔다. 거기에 구석구석 멋진 미술작품이 더해져 감천문화마을은 지붕 없는 미술관이 되었다.


감천문화마을에서 고개를 넘으면, 산복도로 주민들의 삶을 보여주는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이 나온다.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공동묘지가 있던 마을이다. 집 지을 자리와 자재가 절실했던 피란민들은 묘지 위에 집을 짓고, 묘비를 주춧돌로 활용했다. 마을을 걷다 보면 담장으로 사용된 묘비가 자주 눈에 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집이라니, 참 특별하다.   


짠물 쓴물 다 쏟아내도 인생은 아름답다 


산복도로를 둘러본 다음에는 과거 부산 시민들의 삶의 자취가 물씬한 자갈치시장과 국제시장을 둘러보자. 자갈치시장은 해방과 6·25전쟁 후 살길이 막막해진 사람들이 모여 수산물을 팔기 시작한 곳이다. 싱싱한 회와 고소한 생선구이가 발길을 붙든다.


자갈치시장에서 길을 건너면 국제시장이다. 국제시장은 무역을 통해 신문물을 접하는 통로이자, 문화 교류의 장이었다. 광복 이후에 일본인이 남기고 간 물건을 거래하면서 1948년에 상가 건물을 세웠고, 1950년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군용품 등의 물건을 취급하면서 국제시장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서울이나 이북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가재도구를 내다팔기도 했다. 지금은 부산 최대의 전통시장으로 가방과 신발, 잡화, 포목, 안경, 의류, 주방 용품 등 없는 것이 없는 명물 시장이 되었다. 굳이 물건을 구입하지 않아도 재래시장의 분위기를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히 즐겁다. 


문득 영화 <국제시장>에서 주인공 덕수가 남긴 대사가 떠오른다. “내는 그래 생각한다. 힘든 세월에 태어나가 이 힘든 세월에 태어나가 이 힘든 세상 풍파를 우리 자식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 게 참 다행이라고.”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속에서 생사를 넘나들고, 폐허가 된 땅에서 가족들 먹여 살리기 위해 매순간 생의 전쟁터에 서야 했던 가난한 인생들은 땀과 눈물로 역사를 써내려갔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 그들은 말했다. 짠물 쓴물 다 쏟아내도 인생은 그저 아름답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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