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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 역사기행 [2020/09] 민족의 영산 백두산 가는 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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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범산의 만주 항일유적답사기 



글 | 최범산(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역사교육원장)



2020년은 대일독립전쟁(對日獨立戰爭) 35년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승전으로 기록되고 있는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10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이다.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와 월간 『순국』에서는 독립전쟁 100주년을 기념하여 북간도 일대 독립전쟁의 유적지와 함께 백두산 천지를 등반하는 지상특집을 마련하였다. 그 첫 번째 기획으로 만주지역에서 잊혀가고, 왜곡되고 훼손당하고 있는 독립전쟁유적지 현장을 15년 동안 답사하고, 항일유적답사기의 출간과 함께 강연활동을 해온 작가 최범산의 ‘백두산 가는 길’을  연재한다.


백두산 가는 길의 여정은 서울에서 중국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에 도착하여 연길시(延吉市)를 출발하여 모아산을 지나 윤동주 시인의 고향인 용정시 명동촌, 일송정과 평강벌에 서린 역사와 유적을 찾는다. 그리고 두도구, 서성진 진달래조선족 마을을 지나 화룡시 청호촌의  삼종사 묘역, 청산리 전투 유적지, 노령의 고동하를 지나 안도현의 대한독립군 활동 유적지 등을 답사한다. 마지막 여정으로 백두산 자락 이도백하 송림을 지나 하늘 아래 첫 동네로 불리는 내두산 조선족촌을 거쳐서 북파산문을 통해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칠백 리길 대장정이다.



■ 누가 북간도의 눈빛을 보았는가 


용정에서 도착하여 먼저 찾은 곳은 시내를 가로질러 흘러가는 해란강과 용문교였다. 용문교와 해란강은 결코 낯선 이름이 아니었다. 마치 고향마을 강가처럼 느껴지면서 그 이름만 들어도 정겨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용문교 아래 강가를 걸으며 생각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고종밀사로 갔던 서전서숙 설립자 이상설, 명동학교 설립자 김약연,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 저항시인 윤동주, 순국선열 송몽규, 통일운동가 문익환은 이 강변을 거닐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물으나 마나 한 질문을 하는 사람을 싱겁다고 하는 데 내가 지금 싱거운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둠의 시대, 국권상실의 암울한 시대를 온몸으로 겪으며 살아야 했던 용정의 항일열사들, 수많은 애국지사들은 해란강변을 거닐면서 조국의 독립쟁취를 위해 무슨 일을 해야할 것인가를 함께 고민했으리라. 해란강변을 한참 동안 걷다보니 발걸음은 어느새 강변공원에 이르렀다. 조금은 낯설어 보이는 정자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앉아 해란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해란강은 용정사람들의 삶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용정시내를 벗어나 비암산(琵岩山)으로 향했다. 용문교에서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바라보이는 비암산은 북간도 항일지사들이 자주 찾았던 일송정과 용주사가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일송정 앞에는 세 개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었다. 선구자, 고향의 봄, 반갑습니다의 가사가 새겨진 노래비였다. 그런데 2003년 용정시 문화국은 이 노래비의 내용을 다 지워버리고 다른 가사로 바꿔버렸다. 선구자의 노래가사가 새겨 있던 돌에는 용정찬가를, 고향의 봄의 돌에는 비암산 진달래, 반갑습니다에는 한자 용(龍)자를 새겨넣었다. 중국 당국에서 왜 갑자기 노래비의 내용을 바꿔버렸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역사학자들은 이곳에서 한민족의식이 고취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동북공정의 일환이라고 했다. 


 1919년 3월 13일 정오 북간도 용정(龍井) 서전대야(瑞甸大野). 아침에 맑게 개었던 하늘에서 갑자기 황토바람이 일어나더니 모래 흙먼지 거세게 날리며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쏟아져 내릴 듯 검은 구름이 몰려와 광장을 뒤덮었다. 용정시내 서전대야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독립선언식을 알리는 교회당 종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용정에서 이백여 리 거리에 있는 도문(圖們), 훈춘(琿春), 왕청현(旺淸縣)에서 달려온 사람들은 어젯밤부터 출발하여 밤새도록 걸어서 이곳에 도착했고, 연길, 두도구, 동불사, 개산둔 등지에서는 새벽부터 집을 나서 서전벌에 모인 사람들이었다. 명동학교 학생들은 악대를 앞세우고 달려왔고, 두만강변 정동학교생들은 밤늦게 출발하여 새벽에 도착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대회장 분위기를 이끌고 있었다. 서울 탑골공원에서 낭독한 독립선언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로 결정한 북간도 항일지사들은 김약연(金躍淵), 구춘선(具春善), 강구우(姜九禹) 등의 이름으로 조선독립선언서 포고문을 작성하여 북간도 전역에 배포하고 한인들의 참여를 촉구하였던 것이다. 

  

오, 우리 동포들은 마침내 오늘에 이르러 우리 민족의 독립을 선언하노라. 

세계 인도적이고 정의적인 평화를 눈앞에 보노라. 

금일 마음을 다잡고 4천 년 신성하고 장엄한 역사를 되새기며 

2천만 활발하고 용감한 정신으로 당당히 독립을 선언하노라. 

동포여, 들으라. 금일의 독립은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진 것도 아니고 

아울러 타인의 것을 빼앗은 것도 아니다. 

우리가 고유했던 것을 회복하는 것이므로 떳떳이 선양(宣揚)하는 바이다. 


 서전대야(西甸大野)에서 독립선언식을 끝낸 한인들이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거리행진에 나섰다. 깃발을 든 학생대표가 앞장섰고 명동학교 악대가 그 뒤를 따랐다.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던 군중들은 용정 일본총영사관을 향하여 행진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였다. 독립선언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선언식을 지켜보고 있던 중국군 지휘관 맹부덕이 갑자기 발포 명령을 내렸다. 비폭력 평화시위를 벌이던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중국군의 총에 맞은 사람들을 제창병원으로 급히 옮겨 치료를 하였으나 19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수백 명이 피체되었다.



나는 선구자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선구자> 노래의 작곡자 조두남의 친일행각이 마음에 걸리는 것만이 아니다. 작사가 윤해영 역시 자발적이고 철저한 친일파로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독립군의 노래로 널리 알려진 <선구자>에 대해서 항일독립지사의 삶을 노래한 것일까 하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용정의 명동촌에서 태어나고 자란 문익환 목사는 어떤 자리에서도 선구자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오늘날 한국인의 애창곡이 되어버린 선구자 노래.  특별히 그가 사랑한 고향,  용정의 노래였는데 왜 그는 선구자 노래를 부르지 않았던 것일까. 윤해영과 조두남의 친일행각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익환 목사가 1989년 방북했을 때 동행했던 정경모가 선구자 노래를 함께 부르자고 제안했을 때 단호하게 거절했다. 문익환은 ‘마른 잎 살아나’라는 노래를 불렀다. 평소에도 친구 윤동주와 송몽규가 후쿠오카 감옥에서 죽은 이야기를 자주 하였다. 그리고 일제치하 만주국 협화회는 왜왕과 일제를 칭송하였으며, 민족을 배반하고 일제의 식민정책에 동조하는 무리들이 많았다고 비판했다. 선구자 노래 작사가로 알려진 윤해영은 협화회의 고위간부였으니 문익환은 그의 친일행위를 알고 있었고, 선구자라는 노래의 가사가 훗날 조작, 왜곡되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으리라.


 선구자의 작곡가 조두남은, 작사가 윤해영을 1932년 만주에서 만나 가사를 받아 이 노래를 작곡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윤해영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그 이유는 선구자의 노래가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노래한 것이라고 조작한 자신의 행위와 윤해영이 친일파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던 것이다. 윤해영은 친일단체 오족협화회의 간부로 활동하며서 아리랑 만주, 낙토 만주 등 일본제국의 만주 침략으로 세워진 만주국의 건국이념을 찬양하는 다수의 친일시를 발표했다. 이 가운데 〈낙토 만주〉는 만주국에서 정책적으로 널리 보급한 노래이며, 〈아리랑 만주〉는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한 《만선일보》의 공모전에서 당선된 작품이다. 아리랑 만주에 곡을 붙여 발표한 사람이 조두남이었다. 


 조두남은 '선구자'의 작사자 윤해영을 1932년 만난 이후, 줄곧 본적이 없는 '신비감에 쌓인 독립투사'로 회상한 바 있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1992년 한중수교 후 조선족 음악가들과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선구자 노래는 용정의 노래가 원곡이었다는 것과 윤해영의 친일행적들이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비로소 그의 말들이 거짓이었단 것이 세상에 알려졌던 것이다.

 조두남은 평양의 숭실학교에서 작곡과 피아노를 배웠다. 1920년대 가족과 함께 만주로 가서 해방 이전까지 그 곳에서 청년기의 작품 활동을 하였다. 그의 대표곡인 가곡 <선구자>는 만주에서 활동할 때 작곡한 것이다. 해방 후 귀국하여 서울에서 창작활동을 하다가 6ㆍ25가 일어나자 마산으로 피난가서 그 곳에 정착하였다. 마산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동상을 세우고 기념공원을 조성한다고 한다. 일제시대의 친일악령이 다시 살아나려고 남도에서 꿈틀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그 후예와 추종세력들에 대한 역서적 청산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해방 이후 국내에서 활동했던 조두남은 '선구자'의 작사자 윤해영을 줄곧 신비감에 쌓인 독립투사로 회상한 바 있다. 그러나 조두남의 교활한 술수는 오래 갈 수가 없었다. 그는 역사를 멀리 내다보지 못했다. 한-중이 수교하고 자유롭게 왕래하여 연변학자들이 역사의 진실을 이야기하게 될 날이 올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조두남은 여러 가지 거짓말을 했다. 선구자의 원곡이 '용정의 노래'라는 점, 훗날 개작을 했다는 점은 죽기 전 스스로도 인정했지만, 그러나 작곡 시점이 일제가 만주를 점령한 시기라는 점, 작곡 후 윤해영을 만나지 못했다는 점은 사실과 크게 달랐다. 그렇다면 조두남은 왜 윤해영을 신비로운 독립투사로 만들며 거짓말을 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윤해영이 당시 만주에서 명성을 날리던 친일작가였다는 사실을 조두남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독립투사의 노래로 조작한 '선구자'의 작사자가 친일작가였다는 사실을 감추고 싶었던 것이다. 


 윤해영과 조두남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국내 학자들이 이미 연구한 바도 있지만, 연변지역에서는 관련자료와 증언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조두남은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된 친일음악인으로 선구자의 노래를 조작했다는 사실도 여러 논문으로 확인되었다. 그런데 아직도 선구자를 마치 독립투사의 노래인 양 호도하고 있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심보로 그러는 것일까. 하기야 친일 행위도 모자라 독일나치 활동을 했던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를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부끄럼도 스스럼도 없이 국가 행사마다 부르고 있는 현실이니  누가 누굴 탓하랴. 그렇게 75년이 흘렀다. 그저 안타깝고 서글프다. 이제는 분노와 울분조차 메말라 가는 현실, 훗날의 역사는 매우 절망적이다.



북로군정서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


 용정 3.13 만세의거 순국선열의 의사릉과 윤동주 시인의 묘지를 참배한 나는 육도하(六道河)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생각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순국선열, 위대한 영웅들의 묘는 너무나 작고 초라하며 쓸쓸했다. 머나먼 길을 달려와 고개를 숙여 참배할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아도 그저 가슴이 미어져 오는 것은 이곳을 찾은 나 혼자만의 감상(感傷)과 비애만은 아니리라. 


 북간도 용정시는 비록 그들이 태어난 고향이지만, 이곳은 분명 남의 나라, 남의 땅이 돼 버린 지가 오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이곳에 남겨져 초라하고 쓸쓸한 모습의 무덤들이 너무나 안타깝고 슬프다. 3.13 독립투사들과 윤동주 시인이 목숨을 바쳐 사랑했던 조국의 품에 안겨 후손들의 존경과 기림을 받으며 평온한 안식을 취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다웠을까.


 그러나 분단된 조국은 너무나 멀리 있었다. 이념과 무력의 대립을 키우느라 여념이 없는, 무능하고 편벽한 정치지도자들에 의해 70여 년 세월, 서로 대립과 갈등을 고조시키고, 서로 손가락질하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살아가느라 분주하기만 한 조국은 해외에 잠들어 계신 순국선열조차 올바로 돌보지 못하는 나라가 돼버렸다.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대한민국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나는 그렇게 살아온 한 사람으로서 부끄럽고 무능한 가슴을 북간도에 맑은 바람에 씻어내고, 선열의 숭고한 정신을 돌이켜 닮아내려 옹골찬 발걸음으로 육도하를 따라 걷고 또 걸었다. 용정시내에서 명동촌으로 가는 길에 웅장하게 서 있는 선바위를 지나 승지촌(勝地村) 육도하교 방향으로 접어들면 왼쪽 자그마한 산자락에 15만원 탈취의거 기념비가 서 있다. 나는 옷깃을 여미고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화강암에 ‘탈취 15만원 사건 유지’라는 글자가 새겨 있다. 


 항일무장독립전쟁의 무기를 구입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려고 목숨을 걸었던 6명의 독립투사들, 최이붕, 임국정, 윤준희, 한상호, 박웅세, 김준 열사에게 헌화하고 추모하는 묵념을 올렸다.


항일독립자금을 확보하라


 우리가 15만원 탈취사건이라 부르는 항일의거는 1920년 1월 4일 철혈광복단 윤준희, 임국정, 최봉설, 한상호 등 6인의 단원들이 함경북도 회령에서 용정으로 이송되어 오던 용정일본영사관 비밀자금을 탈취하여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북로군정서의 무기를 구입하려다 변절자 엄인섭의 밀고로 일경에 피체되었던 사건을 말한다.


 연해주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며 단지동맹원으로 안중근의 동지였던 엄인섭이 변절하여 일제의 밀정으로 활동하는 줄을 꿈에도 몰랐던 독립지사들이 그에게 무기구입 사실을 알린 것이 화근이 되어 검거열풍이 연해주 한인사회를 휩쓸었다. 철혈광복단은 1914년 이동휘, 정재면 등이 항일투쟁에 몸 바쳐 싸울 것을 맹세한 청년들로 구성한 비밀 결사 단체 광복단과 러시아 연해주에서 결성되었던 철혈단이 1918년 10월 용정에서 통합하여 결성되었고, 1919년 북로군정서에 가입한 단체였다.


 함경북도 경성(鏡城)에서 1899년 태어난 한상호(韓相浩)는 1910년 경술국치 후 부모님을 따라 북간도로 건너가 명동(明東)중학교를 졸업하고 와룡소학교(臥龍小學校) 교사로 근무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항일정신을 일깨우는 교육에 모든 열정을 쏟았다. 1919년 용정에서 일어난 3・13 의거 후 윤준희(尹俊熙)・임국정(林國楨)・최이붕(崔以鵬 : 최봉설) 등과 함께 철혈광복단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당시 왕청현 서대파에 본부를 두고 있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 가입하였다. 


 한상호는 용정 3·13 만세의거에서 희생된 동지들의 원한을 풀어주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무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철혈광복단원 최이붕, 임국정과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결과 러시아로 건너가기로 결정했다. 그들의 강력하고 확고한 조국애를 받아들인 가족들이 애지중지 키우던 송아지를 팔아 여비를 마련해 주었다.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간 세 사람은 물불가리지 않고 돈을 벌기 위해 뛰어다녔다. 막노동을 해가며 번 돈으로 권총 4자루, 장총 2자루와 수류탄을 사서 비밀히 간직하고 돌아왔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와룡동(臥龍洞) 김하석(金河錫)의 집에서 더 많은 무기를 구입하기 위한 군자금을 모금방책을 상의했다. 그때 김하석의 말이 조선은행 회령지점(會寧支店)에서 용정(龍井)출장소로 수시 송금하는 터이니 그 날짜와 시간을 탐지하여 빼앗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여  조선은행용정출장소 전홍석을 영입하고 그의 정보에 따라 행동을 개시하였다.

 1920년 1월 4일 윤준희・한상호・최이붕・김준(金俊)・박웅세(朴雄世) 등과 함께 용정 동량어구(東梁漁溝 : 현재 용정시 승지촌)에서 용정일본 총영사관 비밀자금으로 쓰기 위해 회령에서 용정으로 수송되던 현금 15만원을 탈취하는데 성공하였다. 

 철혈광복단원들은 일본제국주의 만주침략을 위한 자금이었던 15만원을 탈취한 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체코군이 매물로 내놓은 무기 3만여 정을 사서 북로군정서에 넘기려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일본군 밀정으로 활동하던 엄인섭의 밀고를 받고 출동한 일본군에게 임국정, 윤준희, 한상호가 체포되었고, 일본경찰을 때려눕히고 탈출한 최이붕은 러시아로 넘어가 적기단(赤旗團)을 조직하여 중소국경을 넘나들며 항일무장투쟁을 계속 하였다. 


 임국정, 윤준희, 한상호 열사는 청진감옥을 거쳐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끌려가 일제 재판부로부터 사형을 구형받고, 1921년 8월25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이때 윤준희는 30세, 임국정은 27세, 한상호는 23세였다. 한창 피어나야 할 나이, 조국의 영원한 별이 되었다.


이천만의 동포야 일어나거라

일어나서 총을 메고 칼을 잡아라

잃었던 네 자유와 너의 권리를 

원쑤의 손에서 도루 찾도록

나가라 싸워라 대승의 월계관

네게로 오도록 나가라 싸워라


 기념비가 서 있는 승지촌 육도하 너머로 철혈광복단원들이 불렀던 노래가 들려오는 듯하다. 나는 철혈광복단의 위대한 영웅, 6인의 고귀한 희생과 업적이 후대인들의 교훈이 되고 귀감이 되기를 염원하며 다시 옷깃을 여미고 고개를 숙였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산화하신 순국영령들을 추모하지 않는 나라에서 세세년년(세세년년) 민족의 영광을 이끌어갈 위대한 영웅이 탄생할 수 없다. 또한 피와 눈물로 쓴 수난의 역사를 잊어버리고 사는 민족에게 역사는 가혹하게 돌아온다.


 나는 북간도의 교훈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기며 용정시 승지촌 육도하 15만원의거 기념비를 몇 번이나 돌아보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다음에 이곳을 참배할 때는 더 많은 참배객들, 더 높고 원대한 민족기상을 품은 청년들과 함께 할 수 있기를 기원하며 다음 여정을 향해 길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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