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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 역사기행 [2020/10] 제천·문경여행 | 운강 이강년 의병장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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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덕을 겸비한 한말 의병전쟁의 상징 

이 몸 간다 해도 넋마저 사라지랴


글 | 강미경(시인, 여행작가)


운강 이강년은 건국공로훈장 가운데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을 만큼 저명한 의병 지도자이다. 그가 추구했던 투철한 항일의식과 논리, 그리고 제천ㆍ갈평ㆍ재산ㆍ서벽ㆍ영월 등지에서 보여준 뛰어난 활약으로 보아, 이강년은 한말 의병전쟁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강년 선생이 연승을 거듭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역 출신으로 지리에 밝고 식량조달, 현지 정보망 구축과 함께 유림, 선비, 농민 등 다양한 각층에서 지지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08년 6월 장마철에 벌어진 청풍 까치성 전투에서 화승총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퇴로가 막혀 안타깝게 적에게 사로잡히고야 말았다. 재판장에서 끝까지 기개를 굽히지 않았던 이강년 선생은 그해 10월 13일 경성감옥(현 서대문형무소)에서 최초의 사형수로 의기에 찬 51세의 일생을 마친다. 



 여행은 언제나 뜻밖의 선물이 기다리고 있다. 6월 1일은 ‘의병의 날’이다. 소난지도에서 ‘의병의 날 기념행사’가 있다고 충남 당진으로 내려오라는 연락이 왔다. 지난겨울 도비도 선착장까지 갔다가 배 시간을 놓쳐서 소난지도에 들어가지 못했던 아쉬운 기억이 있다. 오래전부터 소난지도 의병항쟁에 대해 공부해오면서 가보고 싶어서 별렀던 여행에 하늘이 길을 내주셨다는 기쁜 마음으로 그곳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행사를 마치고, 일행은 제천으로 가게 되었다. 제천 작성산(鵲城山)에 가서 이강년(李康秊)의병장이 피체된 곳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이강년 의병장?’ 

 ‘일제 때, 독립 운동가들을 피체하여 수감하기 위해서 일제가 세웠다는 경성감옥(현, 서대문형무소)에서 최초의 사형수가 되었다니….’


경성감옥 최초의 사형수, 이강년 의병장의 자취를 찾아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한말(韓末)의 의병장의 흔적을 쫓아가는 길이다. 제천 주변은 산이 깊어 약재가 많이 나는 곳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제천의 의림지와 영화 ‘박하사탕’이 생각나는 곳이다. 몇 년 전에 보았던 영화를 생각하며 제천으로 향했다. 안상맞춤 휴게소를 지나 차창 밖으로 들어오는 산세가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2시간 30분 정도는 차를 탔던 것 같다. 그날 새벽 2시에 기상하여 부산에서부터 차를 몰고 오셨다는 분이 또 제천까지 운전을 해주셨다. 그 노고에 미안한 마음을 안고 차창 밖의 풍경만 마음에 들인다. 6월 뙤약볕의 따가운 햇살도 시들고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우리 일행은 제천 터널 위, 까치성 주변에 도착했다. 


 ‘이강년 의병장이 누구지?’라는 의문을 갖고 주변을 둘러보아도 적송(赤松)과 이름 모를 나무들만 무성하다. 치마를 입었던 탓에 걸을 때마다 여름풀에 맨다리가 긁힌다. 날벌레도 맨다리를 공격한다. 낯선 체험이다. 

 이강년 의병장이 1908년 6월에 피체되었다고 하니 지금부터 112년 전의 일이다. 의병 연구만 30년이 넘게 하셨다는 분이 안내한 곳이니 틀림없을 테지만, 당시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다만 이 부근으로 짐작될 뿐이라고 하시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나온 책자를 꺼내어 보여주신다. 


 “왼쪽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것으로 이강년 의병장인 것을 일본이 알아차렸지요”

 “왼쪽 발목에 총을 맞아 이곳에서 피체되었어요.

 그분은 긍지에 찬 표정으로 설명해주셨지만, 처음 들어보는 이강년 의병장에 대한 이야기는 낯설기만 했다. 낮에 소난지도 최구현 의병장에 대한 충격도 아직 소화가 되지 않은 상태였으니 나의 뇌는 과부화가 걸린 것이라 여기고 귀를 닫고 싶었다. 아니, 달려드는 날벌레들로부터 빨리 도망을 가야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서 웽웽 거렸다. 


 그날 저녁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나는 병이 났고, 응급실에 누워있어야 했다. 해서 이강년 의병장에 대한 설명을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서울에 돌아와 보름이 지나는 동안 내내 아팠다. 아프면서도 이강년 의병장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는 호기심이 생기는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제천에서 설명을 듣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며, 이강년 의병장에 대해 며칠 동안 혼자 공부를 하다가 문경에 그의 기념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경! 문경새재가 있다는 경치 좋은 곳이라고 인터넷은 말해준다. 기차도 닿지 않고, 운전을 하기엔 먼 거리이고…. 그러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대로 문경에 가는 길이 또 거짓말처럼 열렸다. 


 그러나 문경에 가기로 한 날, 아침부터 장대비가 퍼부었으나 문경을 향해서 빗속을 달렸다. 게릴라처럼 빗줄기가 차창을 때려댄다. 무서운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 안성맞춤 휴게소를 지나면서부터 빗줄기가 누그러들자 마음이 가라앉는다. 가는 길에 차창 밖 풍경이 수채화처럼 맑기만 하다. 비에 젖은 경치가 운치를 더한다. 기념관에 도착하니 오후 4시 45분이다. 기념관 주변은 고즈넉하다.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완장길 96번지. 역사 유적지를 찾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관람객들이 거의 없다. 쓸쓸한 기념관에 들어섰을 때, 쓸쓸한 시비(詩碑)가 눈에 들어온다. 3수의 한시(漢詩)가 세로로 새겨져 있다. 그 옆에 번역한 듯한 한글시도 새겨져 있다. 


   총상을 입고

                             이강년


   탄환이여 자못 무정하여라

   복사뼈만 상하게 하단말가

   신복을 꿰뚫었던들 욕됨이나 없을 것을


 아마도 제천 까치성 부근에서 피체되었을 때의 심회를 읊은 시(詩)인가보다. 이강년은 일본과 맞서 싸운 무인(武人)이다. 그는 2세 때 부친을 잃고 백부(이기태) 밑에서 컸다.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이강년 의병장은 무관(武官)이었음에도 시를 지을 만큼의 감수성이 풍부했나 보다. 

 


위기에 빠진 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일어나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사직하고 낙향했던 이강년 무관. 1895년 8월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1896년 1월 11일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문경은 그가 태어난 곳이다. 기념관으로 가는 길에 그의 생가(경상북도 기념물 제90호)를 둘러보았다. 조촐한 ‘ㄱ’字 기와집 한 채와 일자형 초가 별채가 전부다. 대대로 벼슬 없이 지내다가 이강년 의병장은 무과에 급제했다고 했다. 그가 효령대군의 19대 손이라는 것은 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태종 이방원의 네 아들 중  둘째 아들이었던 효령대군은 예성부부인에게서 6남 1녀를 두었다.(측실에게서 1남 1녀) 평생 불교에 심취하여 유교 학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승려들을 모아 교육을 했다고 한다. 권력에 집착하지 않고 절대자의 도를 구하여서 그런지 그는 91세까지 장수하여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까지 여러 왕들을 보게 된다.  


 이강년 의병장이 ‘효령대군의 후손’이라는 후광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이강년이 남달라 보인다는 생각을 해본다. 한말에 의병활동을 했던 무수한 의병들. 신돌석, 유인석, 최구현, 홍일초 등…. 그들 중에 그에게 특별히 방점을 더 찍어주게 되는 것이 왕족의 혈통을 인정하기 때문일까? TV의 ‘복면가왕’처럼, ‘효령대군의 후손’이라는 베일을 벗기고 이강년 의병장 한 사람만을 놓고 보아야할 것 같다. 


 자신의 가산을 정리하여 군자금을 마련, 사촌 이강수에게 2백 냥을 받아 무기를 마련했다. 판서 심상훈(沈相薰)에게 도움을 청하고 인근 유림들과 동지들을 모아 기병(起兵)을 했다. 그 당시 어느 의병장들도 다 그렇게 결단력과 용기가 있었겠지만, 이강년 의병장도 왕족다운 기개가 있었다. 여러 의병장들 중에 그는 ‘대한제국 도체찰사’라는 엄중한 임무에 임명 되었다. 국가가 위급할 때 전시작전권을 위임받은 관리가 도체찰사였다. 임진왜란 때 영의정 유성룡 선생이 도체찰사로 임명되었던 것을 보면, 이강년 의병장에 대한 신뢰가 대단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강년 의병장 기념관이 그가 태어난 경북 문경시에 세워진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만 문경시에서 많은 예산을 들여 건립했겠지만, 그곳을 찾는 이들은 인근 학교에서 현장학습이나 수학여행을 통해 방문하는 소수에 불과한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우리들은 의병(義兵)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의병의 전통이 삼국시대부터 비롯되어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한말에 이르렀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이들도 거의 없다. 한말 의병은 항일독립군의 모태가 되었다는 것도…. 그럼에도 L햄버거집이나, S커피전문점, C영화관 등에는 사람들이 언제나 줄을 선다. 앉을 자리가 없어 미리 예약을 해야 할 정도다. 


 아무 보상이 없어도, 보리쌀 한 자루조차 녹봉으로 받지 못해도, 스스로 일어나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겠다는 것이 의병정신이다. 수많은 의병들이 전국에서 일어났었고 비분강개의 마음으로 그들은 일본과 싸웠다. 특히, 요즘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욱 더 이해되기 힘든 일이다.  


제천의병의 유격장으로 활약, 이후 도창의대장으로 추대


운강 이강년 의병장도 의로움 하나로 일어났던 분이다. 그가 의병을 일으켰던 해에 안동관찰사인 김석중(金奭中) 등 세 명의 목을 베어 농암장터에 운집한 군중 앞에 효수(梟首)했다. 일본앞잡이로 악명 높은 세 사람을 응징했다고 전한다. 무서울 게 없는 의로움을 보인 예라고 하겠다. 


 그 후 제천 의병장 유인석을 찾아가 그의 문하가 된다. 유인석은 이항로 선생의 위정척사 정신을 잇는 화서학파 중에 한 분이었다. 결국 이강년 의병장의 기병(起兵)은 이항로-유중교-유인석으로 이어지는 화서학파의 학맥이라고 할 수 있다. 유인석이 이끌던 제천 의병에 합류하여 유격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유인석 선생이 중국 서간도 랴오둥으로 가자 이강년도 랴오둥으로 건너갔다가, 조국 땅에서 투쟁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생각으로 귀국하여 단양 금채동에서 재기를 도모하였다.


 그가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던 때는 1896년 1월이었다. 1907년에 그는 더 큰 규모의 의병을 일으킨다.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외교권까지 박탈당하고, 한국군대가 해산당한 것에 대한 의분이었다. 민긍호 의병과 합류하여 청주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 후 단양 추천강 일대에서 40여 의진이 집결한 가운데 도창의대장에 추대되었다. 같은 해 12월 전국의병들이 서울을 공격하기 위해 양주에 모여 13도창의군(연합부대)을 편성하자, 호서창의대장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1908년 6월까지 그는 충청도, 경북, 강원도, 경기도 일대에서 약 500명을 이끌고 치열한 의병투쟁을 펼쳤다. 그 지역의 지리에 밝고 엄격한 규율로 의병부대의 기강이 서 있어서  일본이 가장 두려워한 의병 세력이었음은 당연한 사실일 것이다. 남 다른 부대편성(속오작대도)과 포수들을 선발하여 뛰어난 계략(게릴라전법)으로 왜군에 대항했기에 일본은 이강년의 의병부대를 가장 무서워했다.  


유림과 농민 모두의 지지를 받은 의로운 의병장


 이강년 의병부대는 다른 부대와 달랐다. 그 당시 전국에서 일어난 여러 의병부대는 외세를 물리친다는 명분으로 백성들에게 식량 조달을 요구하기도 했다. 의병이 모이면 식량이 필요했고, 이틀이면 헤져버리는 짚신도 제공되어야 했다. 의병들은 그런 물질적인 지원을 지역 백성들에게서 얻어야 했다. 그 당시 백성들도 넉넉하지 않았으니 후원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강년 부대는 “백성에게 절대 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기치로 나아갔으니 지방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결국 군량미와 무기 조달은 이강년의 가산(家産)에서 나온 것이니, 그의 후손의 삶이 얼마나 피폐되었을 지도 짐작이 된다. 그의 증손은 화전민이 되거나 광부로 일하다가 진폐증으로 사망한 이도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가슴 아픈 일이다. 자신 가족의 부귀영화 보다 가산을 털어 구국(救國)을 선택했던 이강년 의병장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일행의 권유로 따라갔던 제천 여행길에서 얻게 된 보물-이강년 의병장에 대한 공부는 문경으로 여행길을 열었다. 그리고 그의 기념관에서 상영하는 동영상을 몇 번씩 반복해서 관람하고, 기념관을 둘러보면서 그저 먹먹하기만 했다. 그에 대해서 연구하여 책을 낸 사람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이강년의 피눈물」, 「의병의 큰 별」, 「운강 이강년」, 「운강 이강년 선생」, 「운강 이강년 장검을 높이 치켜들다」, 「의병대장 운강 이강년」, 「이강년 의병장」이 유리 상자 속에 진열된 그에 대한 서적들이다. 그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그의 생애와 의병 활동을 연구하지도 못할 것이며 책을 내지도 못할 것이다. 


 청풍 작성(까치산)에서 벌어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그는 피체되어 제천-충주를 거쳐 서울 일본군 사령부에 구금된다. 평리원으로 옮겨졌고 끝내 경성감옥으로 이감된 후 1908년 10월 13일 교수형을 받는다. 그가 옥중과 형장에서 남긴 시를 다시 감상해 보자.


   옥중에서

                       이강년

   일평생 이 목숨을 

   아껴본 바 없거늘 

   죽음 앞 둔 지금에사 삶을

   어찌 구하랴만

   오랑캐 쳐부수길

   다시 하기 어렵구나

   이 몸 비록 간다해도

   넋마저 사라지랴


 위의 시에서 읊은 것처럼 운강 이강년의 넋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문경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이끌림에 이끌려 그의 기념관을 찾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의 기념관을 찾는 이들의 발걸음이 더욱 많아지길 기도해 본다.  


   형장에서 

                             이강년

   우리나라 이천만 민족이

   장차 나와 같은

   죽음을 당할 것이니

   이것이

   제일 원통하도다


 그가 경성감옥에서 사형된 것은 그의 나이 51세였다. 그렇게 길지 않은 일생이었다. 그러나, 500년 후에도 5,000년 후에도 또 영원히 후손들의 가슴에 살아 계시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운강 이강년 의병장의 기념관에서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멈추었던 비가 다시 내리고 있었다. 장대비는 보슬비로 변해있었고, 고단한 빗줄기는 기념관 처마 밑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한 손에 큰 칼을 높이 치켜든 그의 동상 앞에서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그의 도포 자락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웅장한 기상이다. 기념관 뒤로 멀리 보이는 산자락이 푸르게 드리우고 있다. 기념관 왼편으로 아담한 기와지붕이 보인다. 관리인에게 물으니 운강 선생의 사당이라는 대답이다. 묵념을 올리고 싶다고 공손히 말씀드리니 퇴근 시간이 지났다고 하시면서도 사당 문을 열어주셨다. 향을 꽂고 묵념과 기도를 올려드렸다. 

 “이강년 의병장님, 저도 의병장님에 대해서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의병장님에 대한 글을 잘 써서 의병장님을 널리 전하게 도와주세요. 그리고 우리 후손들이 당신을 기억하고 더욱 기리게 해주세요.” 


 비를 맞지 않도록 우산을 씌워주시고 안내해 주신 따뜻한 관리인 아저씨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다. 그분의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따뜻한 마음만이 기억난다. 이처럼, 이름을 알 수 없는 의병들 모두에게 감사의 마음을 올린다. 일본의 조총에 맞아 쓰러져 시신도 수습되지 못했던 그들의 의로운 죽음에 감사의 꽃 한 송이 올려준 이들이 누가일까? ‘이강년 의병장이 피체된 후 그를 따르던 의병들은 모두 어떻게 되었을까?’ 끝까지 싸우다가 이름 없이 힘없이 조총에 심장을 태웠을지도 모른다. 그분들에게도 꽃 한바구니 바쳐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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