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선열 역사기행 [2020/05] 최범산의 만주 항일유적답사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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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요녕성 단동시
독립투쟁 첫 관문이며 중심지
항일 무장투쟁의 깃발 드높이다.
글 | 최범산(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역사교육원장)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고 잊을 수도 없는 도시가 있다. 압록강 하류 북·중 국경에 위치한 중국 요녕성 단동시이다. 단동시는 1910년 8월, 국권상실의 비통한 심정을 안고 압록강을 건넜던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제일 먼저 독립운동의 거점을 마련했던 도시였으며, 상해, 북경, 서간도, 북간도, 러시아 연해주로 이어지는 독립투쟁의 관문이었다. 그러한 역사적 도시가 망각의 세월에 묻혀 사람들에게 잊혀가고 있는 현실을 매우 안타깝게 느끼고 있던 차에 월간 『순국』의 원고청탁을 받고 단동시의 항일유적 답사기를 먼저 집필하게 되었다.
항일독립전쟁 유적답사기를 연재하며
독립전쟁(獨立戰爭) 50년의 피어린 역사(歷史)는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얼마나 기억되고 있는가.
1895년 을미년에 시작된 의병전쟁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대한의 독립투사들은 단 하루 한 순간도 독립투쟁을 멈춘 적이 없었다. 그 어느 나라 국민이 제국주의 침략자들과 당당하게 맞서 싸우며 50년 동안 끊임없이 독립투쟁을 전개해온 나라가 있는가. 20세기 세계사를 살펴보아도 대한민국의 독립전쟁이 가장 오래 지속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위대한 역사를 이룩한 독립투사들이 그 공로와 희생에 합당한 예우와 존경을 받고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대한독립항쟁의 기간에 목숨을 바친 15만 순국선열은 피와 땀과 눈물, 숭고한 위국헌신으로 독립투쟁의 전선에 섰고, 자주독립의 쟁취와 영광을 위해 가족의 생명과 전 재산까지 아낌없이 바쳤다. 그렇게 일제침략자와 싸웠던 독립투사들은 오늘의 대한민국, 독립된 조국, 경제 번영을 이룩한 나라에서 역사적 공적에 걸맞은 평가를 제대로 받고 있을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영구불후의 업적을 남긴 독립전쟁의 영웅으로서 국가와 국민들의 존경과 추앙을 받으며 민족의 빛과 영광으로 이어지고 있는지 냉철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사진1 서대문독립공원 순국선열 위패 봉안관 독립관 총면적 54평의 좁은 공간에 순국선열 2,835위(位)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나는 지난 15년 동안 잊혀가고 훼손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는 항일무장독립투쟁 유적지를 답사하였다. 고초와 시련의 연속이었던 시간들 속에서 보고, 듣고, 느꼈던 현장의 기록, 서간도 일대 답사기록과 사진들을 묶어서 2012년 7월 『압록강아리랑』 펴냈고, 북간도 일대 역사기록과 유적지 사진을 엮어서 2016년 1월 『두만강아리랑』을 출간하였다. 중국 만주의 광활한 지역에 널리 분포한 항일독립전쟁의 역사와 유적지들이 국민들에게 오래 기억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수만 리 길을 다니며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답사하고 기록하였다. 또한 독립투사들의 숭고한 삶의 발자취, 그 가족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희생, 만리타국에서 망국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한민족의 처절한 삶의 기록들이 많은 독자들에게 배움이 되고 교훈이 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두 권의 책을 집필하여 출간하였던 것이다. 1911년 만주로 망명한 이상룡, 이회영, 김대락, 이동녕, 김동삼 등이 길림성 유하현 삼원포에 최초로 설립한 경학사와 신흥강습소 유적지에는 기념비커녕 안내표지조차 없이 온통 옥수수밭 뿐이다 혹자들은 말한다. 그렇게 오랜 세월 사비를 들여가며 항일유적지를 답사하고, 심혈을 기울여서 책으로 엮어내고 강연을 다니는 동안 항일독립운동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으며, 독립전쟁의 역사와 유적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는가? 나는 그들의 물음이 독립투쟁이나 유적답사에 대한 찬사, 공감의 발로가 아님을 느낄 때마다 야박하고 이기적인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고 서글펐다. 그것은 개인적인 서글픔이 아니라 독립투사들에 대한 고마움과 예우의 도리조차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느껴지는 실망과 안타까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수천 명의 독자가 항일유적답사기를 읽었고, 독립전쟁의 역사와 유적지를 소개하는 강의를 들었다.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았던 독립전쟁의 역사, 그렇게 많은 항일투쟁이 만주에서 전개되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고, 독립투사들의 숭고한 업적과 정신이 너무나 존경스럽다는 독자들, 강연참석자들의 격려와 찬사가 지금도 생생하게 울려온다. 위대한 역사, 위대한 인물의 업적과 정신은 반드시 국민들의 존경과 추모를 받게 된다는 것은 이미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그것은 역사가 주는 교훈이고, 인간사회에 지속되어 온 삶의 진리였다. 영웅은 영웅을 알아주는 시대가 되어야 온누리에 빛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비록 우리사회에 잔존하고 있는 친일잔챙이 학자들의 억설과 준동이 가끔 일어나고 있지만, 머지않아 뿌리째 뽑혀 사라질 것이 자명하기에 독립투사들의 위대한 삶과 정신은 국난극복의 역사로 추앙받으며 영원히 기억되리라고 굳게 믿고 있다. 언즉행(言則行), 말과 약속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정치가의 중요한 덕목이라 생각한다. 항일독립전쟁 100주년을 맞이하는 2020년도 벌써 네 달이 허송으로 흘러갔다. 요즈음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하루 빨리 진정이 되고, 정상회담에서 약속했던 중국내 독립전쟁 유적지의 발굴과 보존 활동이 적극적으로 이뤄지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만주지역의 항일유적답사기를 집필해 가고자 한다. 압록강 국경도시 단동시(丹東市)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고 잊을 수도 없는 도시가 있다. 압록강 하류 북·중 국경에 위치한 중국 요녕성 단동시이다. 단동시는 1910년 8월, 국권상실의 비통한 심정을 안고 압록강을 건넜던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제일 먼저 독립운동의 거점을 마련했던 도시였으며, 상해, 북경, 서간도, 북간도, 러시아 연해주로 이어지는 독립투쟁의 관문이었다. 그러한 역사적 도시가 망각의 세월에 묻혀 사람들에게 잊혀가고 있는 현실을 매우 안타깝게 느끼고 있던 차에 월간 『순국』의 원고청탁을 받고 단동시의 항일유적 답사기를 먼저 집필하게 되었다. 1910년 겨울, 눈보라치는 압록강을 건넜던 석주 이상룡 가족, 우당 이회영 6형제 가족, 석오 이동녕 가족, 백하 김대락 가족, 일송 김동삼 가족 등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처음으로 망명한 곳이 안동현(현 단동시)이었다. 그리고 1919년 4월 좁쌀장수로 변장하고 단동에 도착한 백범 김 구와 15명의 독립투사들, 3.1운동 참가 후 만주로 망명한 김승만, 함석은, 오학수 등의 대한독립청년단원들, 김승학, 김익상, 정정화 등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계림호를 타고 상해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던 곳이 단동 이륭양행의 삼도랑두 부두였다. 단동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관문이며, 출발점이며, 중심지였다고 말할 수 있다. 1910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곧바로 가산을 정리하고 만주로 망명했던 백하 김대락의 『백하일기』, 석주 이상룡의 『석주유고』, 이은숙의 『서간도시종기』, 허은의 『아직도 내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이해동의 『만주생활 77년』 등 수많은 저서들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일제에게 빼앗긴 조국의 독립을 찾기 위해 만주로 망명했던 독립투사들이 처음으로 비밀기지와 연락처를 마련했던 도시가 단동이었다. 1910년 서간도 신흥무관학교 창설의 주역이었던 독립투사들이 단동에 머물다가 유하현으로 갔으며, 임시정부의 요인들이 단동을 거쳐 상해로 갔으며, 청산리 전투의 김좌진, 이장녕, 이범석 등도 단동에서 동지들을 만나 상의한 다음에 서간도, 북간도로 이동했던 것이다. 단동의 이러한 독립기지 역할은 광복이 될 때까지 계속 되었다. 우리민족의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단동은 북한의 신의주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도시로써 압록강을 가로지르는 철교가 두 도시를 이어주고 있다. 현재는 북한과 중국의 국경을 접하고 있는 최대의 무역 도시로써 북·중 무역의 약 70%를 차지할 정도의 중요한 교역도시로 자리 잡고 있다. 단동은 앞에서 기술하였듯이 항일독립운동의 관문이며 중심지로써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였던 지역이다. 그러면 단동에 창설되었던 독립운동 단체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국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교통부 산하 교통국은 국내는 물론 만주 전역과 러시아 연해주 등지와의 통신연락을 위한 상설기구이다. 상해 임시정부가 중심역할을 담당하고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를 연결해주는 곳이 안동(현재 단동시)의 교통국이었다. 1919년 5월 교통부 안동사무국을 설치한 이래 임시정부 교통국의 조직망이 완벽하게 구성된 지역은 평안남북도, 함경남도, 황해도, 경인지방, 만주 등이었고, 가장 활발했던 곳은 안동교통국으로 임시정부와 국내를 연결하여 독립자금, 독립신문, 각종 기밀문서, 독립군 무기 및 탄약 등의 수송을 담당하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1919년 5월 아일랜드계 영국인 조지 쇼(George Lewis Shaw)는 단동시 원보구 흥륭가(興隆街)에 이륭양행을 설립하고, 태고무역선박회사의 대리점을 운영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안동교통국을 비밀리에 지원하였다. 그리고 건물 2층에 대한독립청년단 비밀기지를 설치하여 1920년대 초 서간도 일대 독립항쟁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이륭양행의 건물은 현재 철거되어 아파트 단지로 조성되었으나 1919년부터 단동을 중심으로 활동한 독립투사들의 연락처, 물자지원, 무기구입 등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던 역사적인 유적지이다.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 대한독립청년단은 1919년 4월 안동현에서 조직된 항일청년무장단체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던 청년들이 조선총독부 경찰의 수배를 피해 만주로 피신하여 안동현 팔도구(八道溝)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결성하고 안병찬(安秉瓚)을 총재로 추대하였다. 대한독립청년단 단장에 함석은, 회원으로 조재건, 오학수, 박영우 등이 활동하였다. 대한독립청년단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책을 국내외에 알리는 기관지 반도청년보(半島靑年報)를 발행하고, 독립운동 자금의 모금과 무기, 탄약 구입, 독립단원 모집과 훈련, 상해 임시정부 지원과 통신업무. 국내 진공작전 수행 및 친일밀정 제거 등의 항일투쟁을 적극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