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우리 것들 [2020/10] 자연과 공존하는 건축 ‘한옥’
페이지 정보
본문
포스트 코로나 시대 지속가능한 주거문화를 생각하다
모든 공간이 通하니 몸도 마음도 건강
글 | 편집부 사진 제공 | 한국관광공사
2020년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대자연의 역습’이 아닐까. 인간의 탐욕에 의한 무분별한 자연훼손으로 동물 서식지가 파괴되어 치명적인 코로나 바이러스가 탄생했고,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상이변이 하루가 멀다 하고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상상을 초월한 대재앙 앞에서 인간은 무력한 존재일 뿐이다. 더 늦기 전에 자연과 공존하며 살아가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자연친화적 건축으로 손꼽히는 ‘한옥’에서 지속가능한 주거문화의 해법을 찾아봐도 좋으리라.
여름엔 바람을 들이고 겨울엔 햇볕을 보듬고
한옥은 생태적 구조를 자랑한다. 바람과 햇빛을 받아들여 이용하는 데 매우 뛰어나다. 집 밖에서는 자연 지세(地勢)에 맞춰 집을 짓는 풍수지리를 중시했고, 집 안에서는 통(通)을 최대한 살려 각 공간을 배치했다. 통을 살린 배치구조는 물 흐르듯 막힘이 없다. 덕분에 겨울에는 바람을 피해 따뜻하고 여름에는 햇볕을 피해 시원하다. 에너지효율 측면에서 가히 으뜸이다.
순환 공간은 전체 구성에 잘 나타난다. 한옥의 실내 구성은 돌고 돈다. 외부에서 창과 방을 지난다고 끝이 아니라 다시 외부로 나올 수 있다. 그랬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며 또 다시 외부로 나갈 수 있다. 각 방들은 크기와 위치가 다르지만 창을 모두 열면 각목으로 짠 상자 뼈대처럼 일직선 축이 형성된다. 이 축은 곧 바람이 통하는 길이다. 우리나라는 여름에는 남동풍이, 겨울에는 북서풍이 부는데 우리 선조들은 남동 방향으로 바람 길을 만들어 여름에 시원한 바람을 얻었다.
통(通)은 ‘자연현상 가운데 음양이 협조하고 정기가 유창하여 아름다움에 이른 상태’로 정의된다. 법가 사상을 집대성한 한비자는 “자연에서는 음양이 작동하고 변화하여 만물을 만들어낸다. 날고 달리기에 나아가며, 아름답기에 좋고, 자라기에 기르며, 지혜롭기에 맑은 상태다. 물을 뚫어 썩음을 막고 병을 쫓아 악을 차단한다”고 말했다.
통(通)은 여름에 바람을 받아들이고 겨울에 햇빛을 받아들이는 열린 자연관이 담겨 있을 뿐 아니라, 이 방과 저 방 사이에 단절이 아닌 소통이 유지된다는 의미도 있다. 자연과 통하니 육체가 건강하고, 사람과 통하니 정신과 마음이 건강하다. 집이 인간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인 셈이다.

정형성·다양성 함께하는 융합과 통섭의 좋은 예
한옥에는 창과 문의 구별이 없다. 그래서 ‘창문’이다. 서양에는 없는 단어다. 사람이 다닐 만하면 문이요, 그렇지 않으면 창인데 딱히 구별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다. 몸을 잔뜩 웅크려야 겨우 통과할 수 있는 문도 많고 문지방을 높여 기어오르듯 통하는 문도 있다. 형식이나 격식에 구애받지 않고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내서 쓰면 그만이라는 노장사상의 ‘대교약졸(大巧若拙)’이 반영된 개념이다.
창은 문살을 통해 주역의 궤를 장식 문양으로 활용한다. 천지 운행의 원리를 기하학적 모양으로 단순화했지만 일정한 변화를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덕분에 안정적이면서도 생동감이 넘친다. 중국처럼 현란하거나 일본처럼 단조롭지 않은, 한국다운 중용과 조화의 균형미를 엿볼 수 있다.
한옥의 창을 살려내는 것은 창호지다. 환기는 물론, 방 안의 온도와 습도까지 자연적으로 조절된다. 또한 반투명 재료이기 때문에 햇빛과 절묘하게 어울린다. 햇빛을 사람의 온기로 바꾸기도 하고 창살에 그림자를 실어 문양에 입체감을 주기도 한다. 동이 틀 때 청회색으로 시작해 한낮에는 뽀얗게 변했다가 해질녘에는 자줏빛을 발한다.
아울러 한옥은 매우 재미있는 구조를 갖고 있다. 문을 하나씩 닫을 때마다 집이 다양하게 변한다. 뚫리고 막히는 방향과 정도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 이쪽을 막고 저쪽을 뚫을 수도 있고 이쪽저쪽 다 막고 요쪽만 뚫을 수도 있다. 세상 어디에도 한옥처럼 자유자재로 변주할 수 있는 가옥은 없다. 그것도 힘들이지 않고 창문 여닫을 힘만 있으면 누구나 가능하다.
이러한 가변성은 한옥에 담긴 사상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한옥은 고려시대 때 융성했던 노장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으며, 유교가 가미되면서 완성되었다. 그리하여 유교의 엄숙하고 정형적인 형식에 자유롭고 변화무쌍한 노장사상과 융합했으며, 여기에 획일적인 것을 싫어하고 개성을 중시하는 민족성이 더해져 정형성과 다양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전례 없는 주거문화가 탄생했다. 21세기의 키워드인 ‘융합과 통섭’의 좋은 예인 셈이다.
처마와 구들에 깃든 우리 선조들의 지혜

빼어난 곡선미를 자랑하는 ‘처마’에는 과학적 원리가 숨어있다. 지구의 자전축은 23.5도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햇빛이 지상에 떨어지는 각도가 계절마다 다르다. 한여름에는 수직으로 꽂히지만, 겨울에는 낮은 각도로 완만하게 비춘다. 이에 따라 여름에는 뜨거운 햇빛을 반사시키고, 반대로 겨울에는 마루 안까지 오랫동안 온기가 들어올 수 있도록 처마의 돌출 각도를 조절해서 설계했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효율성을 자랑하는 ‘구들’은 취사와 난방을 동시에 해결했다. 밥을 짓는 아궁이에 불을 때면 그 열이 방으로 전해지도록 만든 기술이다. 아궁이에서 열이 통하는 길을 살펴보면 유독 좁은 통로를 볼 수 있는데, 좁은 통로를 통해 열기가 더욱 세고 빠르게 지나갈 수 있게 만들어 방의 구석구석까지 뜨거운 열기를 잘 전달하도록 했다.
또한 우리 선조들은 마당에 하얀 모래를 깔아두었다. 하얀 모래는 햇빛을 반사시켜 한옥 내부를 밝고 환하게 밝혀주는 역할을 한다. 햇빛이 마당을 통해 한 번 반사되었기 때문에 눈이 부시지 않고 편안하다. 간접조명의 효과인 셈이다.
한옥을 보면 뒷마당에 나무를 빼곡히 심은 풍경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에도 과학 원리가 숨어있다. 뜨거운 햇빛으로 뜨거워진 안마당과 나무그늘로 시원해진 뒷마당의 공기는 ‘대류현상’에 의해 이동하게 된다. 이러한 공기흐름 덕분에 여름에도 시원한 바람을 즐길 수 있다.
한옥 대청마루에 앉아 사방을 둘러보면, 절로 마음이 편안해진다. 정갈하되 밋밋하지 않고, 멋을 냈으나 요란하지 않은 모습에서 품위와 겸손이 느껴진다. 창과 문을 통하는 순한 바람과 은은한 햇살에 절로 눈이 감긴다. 자연을 닮은, 아니 자연의 일부로 존재하는 한옥에서 ‘오래된 미래’를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