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기업열전 [2020/10] 구국항일운동의 구심점 l 상동교회·승동교회·종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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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중추 역할을 한 민족교회
조국해방의 선두에 서서 민족의 혼을 깨우다
글 | 편집부
상동교회 l 헤이그특사 파견·신민회 조직 서울 상동교회는 일제강점기 전덕기 목사가 중심이 되어 상동청년회를 조직하면서 청년들의 민족운동을 주도했다. 안창호, 신채호, 주시경, 구연영, 양기탁, 김구, 이승만, 이동녕, 이동휘, 이준, 이시영, 노백린 등이 민족운동에서 핵심역할을 하여 ‘상동파’로 불렸다. 상동교회는 1888년 한국 감리교 최초의 의료선교사인 목사 스크랜턴(Scranton, W.B.)이 서울 남대문로에 세운 교회다. 1885년 조선에 입국한 스크랜턴은 정동교회 근처에 정동감리교병원을 세우고 가난한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하다가, 지금의 상동교회 자리에 약국과 병원을 차려 의료 선교와 복음 선교를 겸하게 되었다. 1895년 정동병원을 상동병원으로 통합해 상동교회 자리는 병원으로 사용하고, 교회는 지금의 한국은행 자리인 달성궁으로 옮겨 교회와 병원이 분리되었다. 1900년 상동병원이 세브란스병원과 통합되자, 그 자리에 현대식 교회 건물을 세워 이듬해 교회를 옮겼다. 1902년부터 전덕기 목사가 맡게 되었다. 전덕기 목사의 민족운동은 민중 목회와 이어져 있다는 점에서, 상동교회는 민중 선교와 민족 목회가 합류한 지점이었다. 그는 비참한 민중의 현실은 일제에서 독립을 쟁취할 때 비로소 치유가 가능하다고 생각해 적극적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1914년 전덕기가 신민회 사건으로 순직하고 상동청년학원도 폐교되는 불운을 겪게 되었다. 이후 교회에 대한 탄압이 더욱 가혹해져 1944년 3월 마침내 폐쇄되어 일제의 신사참배와 소위 황도정신(皇道精神)의 훈련장인 황도문화관으로 바뀌었다. 8·15광복을 맞아 재건되었으나 6·25전쟁으로 교회 건물이 많이 파괴되었다. 1974년 10월 벽돌 예배당을 헐어 현재의 12층 건물을 신축했다. 7층 이상은 교회로, 지하층과 지상 4층까지는 백화점으로 사용하면서 이윤의 전부를 선교 사업에 충당하고 있다. 미자립교회에 대한 원조사업 등 광범위한 기업 선교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상동교회는 독립운동에 활용되었던 장소로서 보존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서울미래유산에 등재되었다. 승동교회 l 3·1운동이 시작된 역사 현장 3·1운동으로 학생 대표였던 김원벽을 비롯한 많은 교인들이 투옥되자 당시 승동교회 차상진 목사도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12인의 장서’를 과감히 조선총독부에 제출해 옥고를 치렀다. 그 후로 승동교회는 일본 경찰로부터 심한 고초를 겪어야 했다. 당시 학생들은 민족대표 33인보다 더 큰 용기를 내며 3·1운동을 주도했다. 3월 1일 민족대표와 학생대표들은 종로 탑골공원에서 만나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하지만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조선총독부에 자수했고, 일본 헌병과 순사들에 연행되었다. 만세운동이 실패로 돌아갈 수도 있는 찰나, 탑골공원에서 민족대표들을 기다리던 학생들은 포기하지 않고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모여든 군중에게 기미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눠주면서 마침내 3·1운동이 시작됐다. 이러한 역사적 공로를 인정받아 승동교회는 2001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30호로 지정되었다. 승동교회는 1893년 북장로회 선교사 사무엘 포맨 무어(Samuel Foreman Moore)가 지금의 롯데호텔 부근 곤당골에 세운 교회에서 출발했다. 승동교회는 당시 백정교회로 알려졌는데 조선의 신분제도에서 최하층민이었던 백정들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백정 박성춘이 승동교회에 출석하자, 양반들은 함께 예배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1911년 박성춘은 승동교회의 초대장로가 되어 계급타파에 앞장섰고, 만민공동회의 연사로 나서기도 했다. 아들 박양서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해 한인 최초로 양의사가 되었고, 3·1운동 당시 만주 독립군 단체인 대한국민회를 적극 지원했다. 곤당골 교회는 몇 차례 옮긴 뒤 1905년 지금의 인사동에 자리를 잡으면서 중앙교회라는 종전의 이름을 승동교회로 변경했다. 1906년 무어 목사가 사망하고 곽안련(Charles Allen Clark) 목사가 주임 목사가 되었으며, 이때 조선 정치사의 중요 인물로 평가되는 몽양 여운형이 선교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한 1922년 승동교회에서 대한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YWCA)가 창립돼 여성들의 사회활동과 봉사에 일익을 담당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승동교회는 일제강점기에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에 큰 역할을 했다. 종교교회 l 1964년부터 매주 구국기도회 열어 캠벨 부인은 1897년 10월 내한해 경복궁 옆 잣골에 독자적인 여선교 부지를 마련하고, 1898년 8월 배화학당을 시작했다. 그는 1900년 4월 15일 부활주일을 기해 집회를 시작했는데, 당시 배화학당 학생과 교사 외 외부 사람들도 다수 참석했다. ‘잣골교회’라는 이름으로 교실이나 선교사 사택에서 예배드리다가, 1901년 벽돌 예배당을 건축했다. 여성 중심의 학교 교회인 잣골교회에 교인이 계속 증가하자 1908년 4월 도렴동에 새 예배당을 마련하고 교회를 옮겨가면서 이때부터 ‘종교교회’로 부르기 시작했다. 종교교회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윤치호나 유경상 등의 교육운동가들과 남궁억, 차미리사, 김응집 등 민족의식이 강한 배화학당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3·1운동에는 정춘수 전임목사와 오화영 담임목사가 민족대표로 참여해 옥고를 치렀다. 덕성여대의 모체인 근화학원 설립자인 차미리사, 김응집, 배화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해 투옥되기도 했다. 복음전도뿐 아니라 교육활동과 사회선교 등 다양한 사역을 펼치며 대표적인 민족교회로 성장한 종교교회는 일제 치하에서 민족의 혼을 깨우는 역할을 감당했다. 3·1운동 당시, 종교교회의 담임목사였던 오화영 목사가 민족대표로서 구속된 사건은 전교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오화영 목사가 투옥된 3년 2개월간 교인들은 오 목사의 가족을 돌보며 기도회를 열었고, 일부는 민족교육에 투신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썼다. 이러한 종교교회의 나라사랑 정신은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종교교회는 지난 1964년부터 매주 화요일 구국기도회를 열고 있다. 50년 넘게 한 주도 빠짐없이 개최된 구국기도회는 신앙 선배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되돌아보며 오늘날 한국교회의 역할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또 6월 한 달 동안 남북통일을 위한 특별 공과를 만들어 전 교인이 함께 공부하는 등 우리 민족의 중대한 과제인 통일을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