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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 역사기행 [2020/11] 안국동 이준 열사 집터에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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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층건물 틈새에 끼어있는 숨은 그림 


우리나라 최초의 검사, 헤이그 특사      

죽음으로 나라의 품격을 되살리다 


글 | 강미경(시인, 여행작가)

      

  이준 열사는 호는 일성(一醒)이며,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났다. 1894년 함흥의 순릉참봉이 되었으며 이듬해 법관양성소에 입학, 1896년 2월 한성재판소 검사보에 임명되었다.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 법과를 졸업한 후 귀국했다.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그해 11월 만민공동회에서 가두연설을 하는 등 계몽활동에 앞장섰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의 독립에 관한 열강의 지원을 요청할 것을 제의하고 고종의 밀서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열강의 냉담한 반응으로 참석의 길이 막히자 순국했다. 

                                                      

 

 1년이면 인사동으로 나들이를 나가는 일이 50번은 넘을 것이다. 독립문역에서 전철을 타면 경복궁역을 지나 바로 안국역이다. 독립문에서 20년을 넘게 살았으니 인사동에는 100번을 넘게 나들이를 나갔을 것이다. 안국역 6번 출구로 나가서 인사동 골목으로 접어들면 기분이 좋아지곤 한다. 인사동에는 갤러리가 많다. 갤러리마다 미술 전시회가 열린다. 그림을 좋아하기에 인사동에 갈 때마다 설레는 마음으로 전시회를 둘러보곤 했다. 문우들을 만나 전통찻집에서 차를 마시기도 하고 식사도 하면서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낭만적인 시간을 갖곤 했다. 고가구, 도자기, 기와지붕과 전통 공예를 보는 것도 좋았다. 한복 옷감으로 만들어진 주머니나 동전 지갑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다. 인사동은 언제 가도 서울 속에 문화 공간, 전통적인 느낌으로 색다른 곳이다. 

 

안국동 짜투리 땅에 남긴 이준 열사의 집터 흔적


   무심코 100번을 넘게 지나다녔던 곳. 그곳에 그가 숨은 그림처럼 조용히 침묵하고 있을 줄은 알지 못했다. 6번 출구에서 인사동 쪽으로 옮기던 발길을 돌려, 신호등만 건너면 그의 집터를 볼 수 있었는데, 그냥 지나치곤 했다. 길 건너 안국우체국 옆으로 2층짜리 빵집이 하나 있다. 그 옆에 해영회관이라는 고층 빌딩이 있다. 그의 집터 표지판은 빵집과 하나 은행(해영회관 1층) 간판 틈새에 끼어 있다. 한 평 정도 되는 공간을 간신히 얻은 것 같은 역사의 한 조각 표지판이다. ‘짜투리’ 라는 낱말이 떠오른다.


 하얀색 화강석으로 만들었다면 눈에 잘 띄었을 지도 모른다. 그의 표지판이 안국동 148번지 해영회관 서편 구석 끝에 세워진 것이 2017년 7월 14일이었으니, 그 한조각 역사의 한 뭉치가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난 게 3년이 넘었다. 그의 집터가 그곳에 있는지도 모르고, 한 번도 쳐다보지도 않은 채 그냥 지나쳤던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손에 쥐어주기 전에는 청맹과니처럼 눈을 감고 지나갔던 그 집 앞.


 검은 색 철판에 ‘이준 집터’라고 쓰여 있다. ‘이준 열사 집터’라고 써놓았으면 좋았을 것 같다.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어 ‘세계만국평화회의’에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만국공법에 호소하려했던 호법신(護法神)의 투혼에 대한 예우가 아닐까 싶다. 


 “이준 열사의 부인 이일정(李一貞)이 1905년 우리나라 처음으로 부인상점을 연 곳이기도 하다”라고 쓰여 있다. 이일정 여사가 돈의동 집을 팔아 이곳 안국동 148번지로 이사를 하여 안현 부인상점을 열었다는 구절을 어느 기록에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전면을 유리로 장식한 현대식 상점에서 바늘, 실, 단추, 머릿기름, 분, 비누, 살림살이를 파는 상점을 2년 정도 계속 열었다는 기록도 있고, 5년 동안 계속했다는 기록도 있다. 어떤 것이 맞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준 열사가 고종황제의 명으로 헤이그를 향해 떠난 곳은 이 집터에서였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검사(劍事), 반일 개혁 구국운동에 앞장


   그 당시 그의 집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이성계의 이복형인 이원계의 후손이었으므로 남루한 집에서 살진 않았을 것이다. 동경 와세다 대학에서 3년 정도 법과공부를 하고 돌아와 우리나라 최초의 검사(劍事)를 지냈으니 이곳 안현동 11통 6호(그 당시의 지명)는 그가 생존에 이 땅에서 머문 마지막 공간이다. 기와지붕에 나무로 된 대문을 가진 집이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왼쪽에 붉은색 벽돌 건물과 오른쪽으로 하나 은행 회색 건물 사이에 50cm 정도 되는 철문이 하나 있다. 지금은 그의 안현동 집의 기와 조각의 눈썹 한 장도 보이지 않는다. 그 당시의 흔적을 조금도 찾을 수가 없다. 나무 문 대신 회색 페인트를 칠한 철문이 보인다. 저 철문을 밀고 들어가면 안쪽에, 113년 전 헤이그를 향해 이 집을 나섰을 이준 열사가 계실 것 같다. 철문 오른쪽, 하나 은행 왼편으로 ㄷ자 모양으로 쑥 들어간 벽에는 설명 판이 걸려있다. 열사의 인물 사진, 만국평화회의보(1907년 7월 5일字 기사를 실은 프랑스 신문), 독립문 사진이 들어있다. 


 「이회영, 내 것을 버려 모두를 구하다」(김은식 지음)에서는 궁에서 나온 고종의 백지위임장에 이회영 선생이 “대한제국 황제의 모든 권한을 특사 이상설 선생에게 위임한다.”고 적었다고 했다. 밀서는 조정구를 통해 이회영 선생에게 전해졌고 이준 열사가 밀서를 갖고 헤이그를 향해 집을 나선 곳이 안국동 집이었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당시 상황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준 열사는 유배, 망명, 투옥 등이 반복되었고, 황족이든 친일파 법무대신이든 고소와 구형을 서슴지 않았던 검사(劍事)였다. 또한 여러 구국단체에 회장으로 추대되어 반일 개혁 구국운동에 앞장섰던 거목이었다. 선생이 고종황제의 특사로 선임되기 전에 이준 열사가 조선 땅에서 벌였던 여러 가지 일들은 막대했다. 해서 고종의 신임을 얻었고 중차대한 일이 그에게 맡겨졌음은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이상설 선생을 만나러 블라디보스토크 행(行) 배를 타러 부산으로 가는 길이 안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정에서 일본의 감시로부터 무사하기 위해서는 안국동 집에서 고종의 밀서를 받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을 것으로 짐작 된다. 「황제의 특사 이준」(임무영 · 한영희 장편소설)에서 그려진 것처럼,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를 통해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고종 황제의 서류(고종의 밀서와 신임장)를 건네받는 것이 안전한 방도였을 것이다. 명성황후 살해 사건(1895년)과 을사늑약(1905년 11월 18일)으로 고종도 일본의 간계와 감시를 알아차렸을 테니까 말이다. 세계만국평화회의에 을사늑약의 부당함과 일본의 침략야욕을 만국공법으로 판결 받아 국권을 되찾고자 했던 고종이었다.  

 

만국평화회의 열리는 헤이그 향해 안국동 집을 떠나다


 고종은 을사늑약이 체결될 당시, 의정부참찬을 지냈던 이상설을 정사로 선택했다. 민영환 선생의 자결 소식 이후 이상설 선생도 울분을 토하며 자결을 시도했던 의기(義氣)를 높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법정신으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법의 칼을 들어 내리치려는 이준 열사를 부사로 선임했다. 대사관인 부친(이범진)을 따라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을 따라다니며 외교관의 기질이 몸에 배어 있으며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에 능한 이위종이 부사로 선임되었다. 고종의 헤이그 특사 세 명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이가 이준 열사였고, 고종의 특사 중 가장 고되고 긴 여정을 떠났던 이도 이준 열사였다.  1907년 4월 22일, 새벽부터 서둘러 집을 나섰을 49세 남자를 상상해 본다. 113년 전, 안국동 집을 나와서 기차로 부산으로 가야했고, 부산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배를 타야했던 긴 여정의 출발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을 만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위종과 합류하여, 파리를 거쳐 헤이그까지 64일의 먼 여정의 첫발을 내디딘 곳이 안국동 집이었다. 길 떠나는 이준 열사를 상상해본다. 집을 나서서 급하게 남대문역 쪽으로 향했을 이준 열사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집. 대문을 여는 순간 그의 험난한 장도(長途)가 기다리고 있을 것을 그도 짐작하며 대문을 나섰을 것이다. 

이준 열사 집터 앞에 작은 흉상이라도 하나 세웠으면…


 며칠째 장맛비가 내린다. 하늘은 흐려있고, 폭우가 쏟아졌다가 개었다가 부슬비가 가랑비로 변했다가 그쳤다가 보슬비가 내리기도 한다. 물난리와 산사태로 온 나라가 어수선하다. 비 피해로 인해 매스컴은 들끓고 있다. 안국역 1번 출구에서 창덕궁 쪽으로 30m 떨어진 곳에서 보고 왔던 이준 열사의 집터가 눈에 아른거린다. 


 그의 집터가 있는 곳을 알고 나서 나는 견딜 수 없는 끌림에 이끌려 다음날 또 다시 그의 집터를 찾아 갔다. 은사님과 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지만, 그곳에 갔으니 한 번 더 보아야 할 것 같은 강한 끌림이 있었다. 그 집터에 갔을 때는 잠시 비가 그쳐 있었다. 다행이었다. 일부러 길 건너에서 그의 집터를 바라보기로 했다. 2020년 8월의 그 집 앞으로는 6차선 도로가 있다. 그 당시에도 길가 집이었다. 전면을 유리로 장식한 이일정의 부인상점이 집 바로 옆에 있었다고 했으니, 길 건너에서도 상점과 집이 건너다 보일테다. 그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서 지나가는 차량들 너머로 구한말의 한 페이지를 머릿속에 떠올려 본다. 


 안국동 길은 버스와 승용차로 늘 혼잡하다. 경복궁 앞에서 창덕궁 쪽으로 가는 차량들, 그의 집 앞에 주유소를 끼고 우회전하여 종로3가 쪽으로 가는 차량들. 브라암스 고전 음악 카페를 끼고 좌회전하여 헌법재판소와 북촌 쪽으로 가는 차량들로 바퀴들과 지나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꼭꼭 숨겨져 있는 숨은 그림처럼, 그 속에 그의 집터가 있었다. 사실 안국동 집에서 이준 열사가 기거한 것은 만 2년 정도였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 전에 11년 정도 살았던 곳은 바로 옆 돈의동이었고, 돈의동에 살기 전에는 김병시 대감집 문객이었다. 그의 고향 함경남도 북청군 북청읍 속후면에서 13세까지 살다가 김병시 집에 머물게 되었던 것이다. 김병시의 아들(김응규)과 마찰로 다시 북청으로 돌아갔었지만, 김병시의 부름으로 다시 한성(서울)으로 와서 돈의동에 정착한 것이 1894년(36세)으로 짐작된다. 


 돈의동은 지금의 낙원상가에서 단성사 쪽 일대다. 근거 사실이나 토지대장 등으로도 확인할 길이 없으니 서울에서 오래 기거했던 돈의동 집은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 집터 표지판이 있는 곳(안국동 148번지)도 1928년에는 중국인 마진림의 소유가 되어 장손루라는 중국집이 들어섰었고, 이후에 덕성학원에서 매입하여 사유지가 되어 있으니, 구한말 역사에 거목의 집터는 안국동 고층 건물과 개인의 소유가 되어버린, 잊어버린 짜투리가 되어있는 것은 아닌지? 그것도 (사)민족문제연구소가 각종 조사와 토지대장 등을 통해 간신히 알아냈다고 한다. 그의 집터에서 길 건너 종로 경찰서 쪽에서 그의 집터를 건너다보았다. 달리는 차량들 속에 언뜻 언뜻 보였다가 시야 속에서 사라지는 작은 퍼즐 한 조각 같다. 그 집터 앞에 흉상이라도 하나 세워서 지나는 사람들마다 한번이라도 쳐다보고 단 1분만이라도 이준 열사의 아픔을 생각하고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정신문화를 위해서 국가 차원에서 이준 열사의 흉상을 설치할 공간 한 평을 얻어내는 게 쉽지 않을 수도 있다.

 

 한참을 길 건너에 서서 건너다보아도, 지나는 사람들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지나간다. 한 쌍의 연인인 듯한 20대 남녀는 팔짱을 끼고 한 손에 테이크아웃(take out) 커피 잔을 들고 지나간다. 어떤 아주머니들 몇몇 사람도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그냥 지나간다. 두 사람의 남자도 급한 걸음으로 옆에 있는 은행 안으로 들어간다. 한 무리의 사람들은 옆에 있는 커피전문점으로 우르르 들어간다. 머리가 허연 아저씨 한분은 이준 열사 집터 바로 옆 빵집 문을 밀고 들어간다. 모두들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표지판 앞에 서서 설명을 읽거나 사진을 찍는 이가 한 사람도 없다. 30여분 동안 서서 관찰해 보아도 이준 열사는 지금 우리들에게 외면당하고 있었다. 1907년 7월 헤이그 세계만국평화회의장에 입장도 못하고, 문 밖에 세워졌던 그 때처럼. 


열강의 파도 앞에 꺼져가는 국운 바로 잡으려 안간힘


   인간의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다는 화폐를 취급하는 은행과 허기를 달래줄 빵집 틈새에 간신히 한 평 공간을 얻은 ‘이준 열사의 집터’ 표지판. 코로나 19로 지구 전체가 어수선하다. 게다가 요즘엔 장마전선으로 인해 홍수 피해로 온 나라가 들썩인다. 햇빛이 그립다. 오늘 우리들은 1907년 헤이그를 향해 집을 나섰다가 그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이준 열사에게는 관심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들 가슴엔 장마가 그치고 태양 볕이 내렸으면 하는 바램뿐인지도 모른다. 코로나 19가 얼른 종식되어 이전의 생활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만 간절하다. 


 한국 경제와 세계 경제가 회복되길 바라는 마음만 간절하다. 사람들 간의 교류가 예전처럼 편안해지고, 안심하고 모임과 행사도 예전처럼 정상화되길 소망하는 마음들뿐일 수도 있다. 갈망의 내용과 종류는 다르지만, 2020년 오늘이라는 안국동 풍경 속에 ‘이준 집터’는 숨은 그림처럼 현재라는 시간 속에 끼어있다. 그 당시 이준 열사가 애타게 몸부림치며 고군분투 했던 일이 안국동 그의 집터에서 사람들 가슴에 울림을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1905년 돈의동에서 안국동으로 이사를 했고, 1906년(48세)에 평리원(平理院) 검사(劍事)에 취임하였고 특별법원 검사를 역임했으니 검사로 출퇴근 한 집도 안국동 바로 이 집터에서였다. 법의 정신이 무엇일까? 한마디로 간단하게 ‘정의 구현’에 있다고 해두자. “만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평등정신에 있다고 해두자. “누구나 법의 보호를 받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갖게 하는 것”에 있다고 해두자. 


 그 당시, 러시아, 청나라, 일본 등 열강이 우리나라의 국권을 빼앗으려고 서로 아귀다툼을 하는 사이에 열강의 파도 앞에 꺼져가는 국운을 바로 잡으려는 안간힘의 마지막 투혼이 불살라 진 곳이 이곳이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은 청나라를 물리쳤고, 1904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를 물리치고 일본은 조선을 삼키는 명분을 얻게 된다. 1904년 가쓰라 태프트 밀약으로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조선을 차지하기로, 미국과 일본 사이에 밀약이 맺어진다. 결국 조선은 일본 손에 들어가는 일만 남은 상황이었다. 

 

그 멀고 외로운 여정, 집 떠난 지 56년 만에 귀국하다


 어릴 때부터 의협심이 강했던 이준이었다. 1896년 ‘조선독립협회 평의장’으로 맹활동하다가 반대파의 미움으로 신변의 위험을 느낀다. 일본으로 망명하여 1896년부터 1898년까지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법과를 졸업하게 된다. 귀국 후, 1906년에 평리원 검사가 되어 우리나라 최초 검사로서 호법신(護法神)이 된 것도 이 집에서였다. 호법신이란 불법을 수호하는 신을 말한다. 억울하게 옥에 갇힌 백성들을 법의 정신으로 보호하고 억울함을 해소시켰기에 백성들로부터 얻은 명예로운 별명과 칭송이었다. 백성들의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법 앞에 평등하게 공평한 일처리를 하는 정의의 사도였던 이준 열사. 그는 세계 만국공법에서도 일본의 부당함을 호소하고 세계공법에 대한제국의 억울함을 호소하려 했으나 그는 문밖에 세워진 약소국의 키 작은 황인종에 불과했다. 


 세계만국평화회의는 말만 평화회의였지, 강대국들이 약소국을 지배하는 지배권을 서로 인정해주는 회의에 불과했다. 일본과의 관계에서 입장이 난처한 러시아 대표단장이었던 넬리도프 백작은 대한제국의 특사 3명을 만나주지도 않았으며, 회의장에 입장도 시키지 않았다. 각 나라 열강들의 대표들을 한사람씩 만나서 설득하여 했으나 강대국 대표들은 모두 면담을 거절했다. “조선의 외교권은 일본에 있으니 일본의 허락이 없으면 참석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고종의 밀서도 위조이며 고종은 세 사람의 특사를 파견한 적도 없다는 모략을 일본이 꾸며내었다.


   세 사람의 특사는 헤이그 낯선 땅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했을까? 안국동 집을 나선지 2개월이 넘게 걸려서 찾아갔던 헤이그에서 절망감에 싸인 이준. 아내가 있는 안국동으로 돌아오고 싶었을까? 이일정을 일컬어 사람들은 이준의 부실(副室)이라고 했다는데 자신보다 17세나 젊고 예쁘고 부유한 아내에게로 돌아오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1907년 7월 14일 이준이 자결하기 하루 전에 헐버트 선교사가 부인의 병을 핑계로 미국으로 떠났고, 하루 전날 이위종이 러시안 부인의 병이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러시아로 떠나버렸다. 


 이준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어여쁘고 나이 어린 아내에게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안국동 집 대문을 나간 지 56년 2개월 12일 만인, 1963년 수유리 묘역으로 돌아왔다. 멀리 헤이그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가 다시 귀환했다. 부인 이일정이 세상을 떠나고 28년 후였다. 지금은 집주인들이 모두 떠나고 그들의 집터라는 표지판만이 빵집과 은행 간판 사이에  끼어있다. 

 갑자기 장대비가 퍼붓기 시작하고, ‘이준 집터’ 표지판도 비를 맞기 시작한다. 비가 그치고 뜨거운 태양이 떠올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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