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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기업열전 [2020/11] 독립운동가가 설립한 대학 - 단국대·덕성여대·국민대·건국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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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지도자 육성을 위한 구국교육운동에 나서다 

인재 키우는 것이 곧 나라 일으키는 일


글 | 편집부  


  일제강점기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던 애국지사들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려면 인재양성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국으로 돌아온 후 대학 설립에 매진했다. 이시영은 만주 신흥무관학교의 전통을 이은 신흥대(현 경희대)를 설립했고, 김창숙은 조선 성균관의 학통을 계승한 성균관대를 재건했다. 신익희의 국민대와 경남대, 장형·조희재의 단국대, 차미리사의 덕성여대, 유일한의 유한대, 유석창의 건국대 등도 독립운동가가 세운 대학이다. 



단국대학교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정신 계승하다


  단국대의 설립자인 장형 선생은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인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한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국운이 기울어가는 것을 보고 더는 가만히 앉아 학업에 몰두할 수 없어 학업을 중단했다. 그 후 신민회의 비밀회원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1912년 105인 사건으로 만주로 망명길을 떠났던 장형은 임시정부 이시영에게 군자금을 조달하는 등 끊임없는 활동을 전개했으며, 수차례 투옥되고 모진 고문을 겪었다.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1947년 설립된 단체인 ‘건국실천원양성소’를 김구와 함께 운영했고, ‘전국통일학생총연맹’의 직접지도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해방 후에도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과 계몽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장형은 백범 김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정신을 계승한 대학을 세우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김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통일정부 수립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선 우리 민족을 하나로 모아야 하고, 하나로 모으기 위해선 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정점으로 해야 한다며 교명을 ‘단국’으로 결정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1947년 11월 3일 단국대학이 탄생했다. 장형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덕성여자대학교 

순수 민족자본으로 세운 최초 여성교육기관


  덕성여대는 여성 독립운동가인 차미리사 여사의 3·1운동 독립정신을 이어받아 설립됐으며, 순수 민족자본으로 세운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여러 가지 할 일이 많이 있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허다하지만 교육 문제처럼 큰 문제는 없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교육 문제에서도 가장 급한 것은 여자 교육으로 생각합니다.…수레 두 바퀴와 같은 남녀의 관계가 종래와 현재에는 한쪽으로 기울어졌으니까 이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 곧 여자 교육의 필요로 생각합니다.”


여성 선각자 차미리사는 1920년 4월 19일 조선여자교육회와 부인야학강습소를 설립해 여성 교육에 투신했다. 그는 여자강연대를 꾸려 1921년 6월부터 10월까지 전국 73곳에서 순회강연을 펼쳤는데, 가는 곳마다 여성은 물론 남성들에게도 관심을 끌어 건물 밖 마당까지 청중이 몰려들었다. 1923년에는 야학강습소 주간반을 신설, 이름을 ‘근화학원’이라고 짓고 2년 뒤 ‘근화여학교’ 인가를 받았다. 차미리사가 내건 창학 이념은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였다.


1935년에는 근화여학교를 근화여자실업학교로 개편했다가 1938년 덕성여자실업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일제가 교명에 근화(무궁화)를 못 쓰게 했기 때문이다. 일제의 간섭은 학교 이름에서 끝나지 않았다. 차미리사가 민족교육을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총독부 학무국은 압력을 넣어 교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광복 후 1948년 통일정부 수립을 호소하는 문화인 108인 성명에 동참하는 등 사회활동을 이어가다가 1955년 6월 1일 눈을 감았다. 별세한 지 47년 만인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국민대학교

임정 각료 합의로 설립된 민족지도자 양성소

  독립 후 김구, 조소앙, 신익희 등 임시정부 각료들은 긴 시야에서 민족지도자를 길러낼 필요가 있다는 데 합의했고 그것이 곧 국민대학교의 가치가 되었다. 국민대 설립의 주요인물 중 한 사람이었던 신익희 선생이 초대 학장으로 취임했으며, 1956년 5월 서거까지 해방 후 최초의 사립대학인 국민대의 기반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신익희는 1908년 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를 졸업하고 일본의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들어가 한국 유학생들과 학우회를 조직, 총무·평의회장·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기관지인 <학지광>을 발간하며 학생운동을 했다. 특히 1913년에는 동지들과 단지(斷指)해 피를 나누어 마시면서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1913년 졸업과 동시에 귀국해 고향에 동명강습소를 열었으며, 서울 중동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7년 보성법률상업학교 교수가 되었다. 3·1운동을 목격한 후 상해로 망명해 임시정부 수립과 동시에 내무차장·외무차장 등을 역임했다. 특히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임되어 이시영, 조소앙 등과 함께 임시헌장 제정 기초위원으로 활약했다.


광복 후 귀국해 김구 주석을 도와 반탁운동을 선도했으며, 1946년 국민대학을 설립해 민족국가 건설의 동량을 육성하는 한편, <자유신문>을 발행해 민족 자주성 함양에 힘을 보탰다.


1948년 5월 제헌의원 선거에서 경기도 광주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이후 초대 국회 부의장과 이승만의 후임으로 국회의장에 선출되어 활동하면서 대한민국 건국에 크게 공헌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건국대학교

진정한 독립은 교육 통한 인재 양성에

  건국대는 독립운동가 유석창 박사가 1931년 건국대병원의 전신 ‘중앙실비진료원’ 설립을 시작으로 1946년 ‘조선정치학관’을 설립하며 개교했다. 


유석창은 11세 때 독립투사인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망명해 장백현·간도성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21세에 귀국, 서울 경신학교를 거쳐 1928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 


1931년 5월에는 가난으로 인해 병마에 시달리는 민중을 위해 대규모 실비진료기관을 설립하겠다는 큰 뜻을 세우고 오하영과 이대위를 만나 동지들을 모았다. 강연회에서 유석창은 “경제적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실비로,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무료로 진료해드릴 것입니다”라며 민중을 위한 진료소 건립에 굳은 의지를 보였다. 마침내 1931년 건국대학교병원 전신인 ‘사회영 중앙실비진료원’이 설립됐다. 


1932년에는 <보건신문>을 창간하는 등 일제치하에서 어려운 민중들을 위한 시료와 보건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1939년 조선보건협회 회장으로 활약했으나, 민중병원장직을 사임함과 동시에 회장도 그만두었다. 

1945년 8월 한국국민당 창당발기인이 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사설강습소인 건국의숙 인가를 얻는 등 정치·교육 등의 분야에서 많은 공적을 남겼다. 건국의숙은 서울 종로구 낙원동에 있었으며, 훗날 정규대학인 건국대학교로 발전해 초대총장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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