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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우리땅 [2021/01] 애국선열 혼이 잠든 곳 - 서울 용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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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한 독립투쟁에서 변치 않았던 그들   

솔아,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느냐


글 | 편집부


  말끔히 차려입은 정장 코트와 멋스럽게 넘겨 빗은 머리, 비뚤비뚤한 치아와 광대뼈가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는 흑백사진 한 장. 그 속에서 웃고 있는 그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려온다. 인생의 가시밭길을 처절하게 뒹굴며 살아온 연약한 인간의 고독하고 쓸쓸한 내면을 엿본 듯해서…. 한없이 차갑고 또 따스한, 극한의 양면성을 품고 있는 겨울햇살 속에서 문득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침 서울 용산구 효창동에 그의 이름으로 지어진 기념관이 들어섰다 하여 주저 없이 지하철에 올라탔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략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서른한 살의 청년이 김구에게 말했다. 


“군은 무엇인가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사건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김구는 청년에게 되물었다. 1931년 1월, 중국 상해는 유독 추웠고 항일독립투쟁은 활로를 찾지 못해 침체돼 있었다. 그로부터 1년 후 청년은 약속을 지켰다. 1932년 1월 8일 도쿄 한복판에서 일왕을 향해 폭탄을 던지는 거사를 단행했다. 비록 폭탄은 일왕의 목숨을 빼앗지 못했지만, 김구의 질문처럼 청년은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일본 제국주의가 신격화해 놓은 일본 왕의 행차에, 그것도 일본의 수도인 도쿄에서 폭탄을 던지다니! 


청년의 대범한 행동은 한국의 강인한 독립의지와 저항의식을 세계에 알린 신호탄이었다. 임시정부를 비롯한 항일운동에 새로운 용기와 활력을 불어넣었고, 같은 해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홍커우공원 의거의 기폭제가 되었다. 현장에서 붙잡힌 청년은 그해 10월 10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몹시도 짧고 강렬한 생이었다.  


효창동에서 청년 이봉창과 

백범 김구를 만나다


  서울 용산구가 지난 2020년 10월 21일 ‘이봉창 의사 역사울림관’을 개관했다. 효창동에 자리한 이봉창 의사 역사울림관은 지상 1층, 연면적 70㎡ 규모다. 전통 목재구조에 기와지붕을 올렸다. 전시실, 사무실, 툇마루를 갖췄다. 건물 외부는 이봉창 역사공원으로 꾸몄다. 의자 몇 개와 나무가 어우러진 아담한 마당이다.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무료로 개방한다.  


전시실에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장을 지낸 김영원 작가가 만든 흉상이 있고, 흉상을 기준으로 왼쪽부터 전시실을 둘러보면 의사의 생애에 맞춰 ‘용산구 효창동에서 이봉창과 마주하다’, ‘거사를 준비하며’, ‘다시 타오르는 불꽃이 되어’를 주제로 한 전시를 볼 수 있다.


단순히 지도와 그래픽만 전시하는 게 아니라 무인 종합정보안내시스템인 키오스크, 증강현실(VR) 등 최신 전시기법을 도입했다. 이 의사가 직접 쓴 ‘한인애국단 가입 선서문’, ‘의거자금 요청 편지’ 등의 사료는 복제본으로 전시하고 있다.


무엇보다 전시실 앞, 도시락 폭탄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아있는 이봉창 의사와 백범 김구의 설치물이 시선을 붙들었다. 1931년 12월 15일, 이봉창 의사는 김구 선생과의 식사자리에서 신문지에 싼 폭탄 2개를 전달받았다. 생의 절대절명의 순간에 선 자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청년의 얼굴을 차마 마주할 수 없었던지 김구 선생은 등을 돌리고 있다. 그 고뇌와 아픔이 전이되어 한동안 가슴이 저려왔다.  


묘소 지키는 소나무는 

이토록 푸른데…  


  겨울햇살 아래서 한참을 서성이다 효창공원으로 향했다. 도심 중심부에 당당히 위치해 있었으나, 오랜 세월 도시화에서 밀려났던 효창동과 청파동에 재개발 바람이 한창이다. 그럼에도 아직은 옛 정서가 남아서 어르신들의 발길이 많고, 오래된 밥집에선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두 개의 시간과 공간이 평화롭게 공존하길 바라본다. 


훈훈했던 마음은 효창운동장을 지나면서 분노로 바뀌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자신의 정적이었던 백범 김구의 묘역을 훼손하기 위해 1960년 효창운동장을 지었단다. 그로 인해 약 15만 그루의 나무와 숲속의 연못·섬 등이 사라졌고, 현재 효창공원 안에 마련된 애국선열들의 묘역은 효창운동장에 가로막혀 있다.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효창공원 정문인 창열문(彰烈門) 안으로 들어갔다. 효창공원은 1989년에 사적 제330호로 지정되어 있는 국가문화재다. 조선시대에 왕실의 무덤이 있던 ‘효창원’은 대일항쟁기에 공원 시설로 격하된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해방 후에는 독립운동가의 묘역이 자리를 잡았다. 백범 선생이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3의사(義士) 유해와 임정요인 이동녕, 조성환, 차리석의 유해를 이곳에 모셨다. 안중근 의사 허묘(墟墓)도 함께 마련했다. 김구 선생 또한 1949년 우익 테러로 살해돼 효창공원에 묻혔다.  

이곳에는 백범기념관과 백범김구의 묘역, 8위 선열의 위패를 모신 의열사(義烈祠), 삼의사 묘역, 임정요인 묘역, 이봉창 의사 동상 등 대일항쟁기에 조국독립에 목숨을 바친 위대한 선열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토록 거룩한 곳을 아직 ‘공원’이라 부른다니…. 다행히 서울시가 지난 10월 백범 김구 선생 등 독립운동가 묘역이 위치한 효창공원 일대를 독립운동 기념공간으로 조성하기 위해 공원의 새 이름과 슬로건을 공모했다고 하니, 미약하나마 위안으로 삼아본다.   


돌담을 따라 왼쪽 길로 쭉 가면 이봉창 의사가 말끔히 정장을 차려입은 모습으로 폭탄을 던지고 있다. 흑백사진 속 순박한 미소 대신 결연한 표정이다. 이봉창 의사 동상 뒤편에는 백범기념관과 백범 선생의 묘역이 있다. 폭탄을 건넨 자와 폭탄을 받은 자, 빼앗긴 조국에서 만나 광복을 위해 함께 싸웠던 두 사람이 해방된 조국에서 영혼이나마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쪽이 따뜻해진다. 이봉창 의사 역사울림관에서 등을 돌리고 앉아있던 김구 선생은 이제 영원히 그를 지켜보고 있다. 

백범 선생 묘역으로 올라가는 길, 양옆을 지키고 늘어선 소나무들이 눈이 부시게 푸르렀다. 그 초록빛이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끝끝내 변치 않았던 선생의 조국독립·남북통일에의 소망을 닮은 듯해 절로 숙연해졌다. 


안중근 유해가 

동지들과 함께할 날 기다리며


  백범 선생 묘역 옆으로 ‘의열사’가 보였다. 효창공원 내에 묘역이 있는 애국선열 일곱 분들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1989년 6월 8일에 문화재사적 제330호로 지정되었고, 1990년 11월 준공되어 1991년 11월 7위 선열들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했다. 지난해 말에는 안중근 의사 영정과 위패를 함께 모시면서 ‘8위 선열’이 되었다. 


의열사를 지나 삼의사 묘역으로 올라갔다. 백범 선생의 묘역처럼 푸르른 소나무가 즐비했다. 삼의사 묘역에 다다르니 이름 모를 산새들의 지저귐이 명랑했다. 푸른 소나무와 청명한 새소리가 어우러져 겨울이 아닌, 봄날인 듯 마음이 따뜻해져왔다. 


묘역에는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안중근 의사 네 분의 묘가 나란히 있었다. 안중근 의사 묘는 아직 유해가 없다. 하루 빨리 고국으로 돌아와 동지들과 함께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눌 날을 간절히 손꼽아 본다.


  돌아 나오는 길에 페인트칠이 벗겨진 시퍼런 조형물이 있어 다가가보니 ‘점지(點指)’라는 작품명이 붙어있다. “선열의 묘역이 모셔져 있는 효창근린공원의 환경적 분위기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성역의 현대적 해석이 가능하도록 계획된 조형물”이며 “수직적인 구조는 선열들의 정기가 이곳에 깃들어 있다는 성스러운 장소임을 의미한다”고 쓰여 있었다. 그런데 동행한 사진기자도 나도 이 조형물이 선열들의 정기를 누르는 ‘말뚝’처럼 보였다. 너무 예민한 탓인가. 아니면 세상을 너무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탓인가. 


씁쓸한 마음으로 창열문을 나서는데 이번에는 효창운동장 글씨가 떡 버티고 있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터벅터벅 효창동 언덕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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