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기업열전 [2021/02] 애국계몽운동의 산 역사 흥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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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례없는 108년 역사의 최장수 독립운동단체
민족독립·민주화운동·평화통일
백 년 동안 이어온 도산정신
글 | 편집부
민족의 각성과 계몽운동을 전개하다 1912년 미국으로 돌아간 도산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에 취임해 교포들의 결속을 다지는 한편, 독립운동의 핵심 인물을 기를 새로운 단체 조직에 착수했다. 1913년 5월 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홍언(경기도), 염만석(강원도), 조병옥(충청도), 민찬호(황해도), 송종익(경상도), 강영소(평안도), 김종림(함경도), 정원도(전라도) 등 8도 대표를 포함해 25명의 창립위원을 중심으로 ‘흥사단(興士團)’이 창립됐다. 이어 1920년 9월에는 상해 흥사단 원동위원부가 정식 설립됐다. 1921년 귀국한 이광수는 박현환·김태진·김항주 등 뜻있는 동지들을 규합해 이듬해 2월 12일 서울에서 수양동맹회를 창립했다. 흥사단과 같은 단체였으나, 일제 감시를 피하기 위해 ‘수양동맹’이라는 표현을 썼다. 1923년 1월 16일에는 평양에서 대성학교 동창생이 주축이 되어 ‘동우구락부’를 설립, 국내에 두 개의 흥사단 조직이 탄생했다. 1925년 12월 두 단체는 ‘수양동우회’로 통합했다가 ‘동우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1926년 5월에는 <동광> 잡지를 창간해 흥사단주의를 통한 민족의 각성과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937년 중일전쟁을 앞두고 일제는 독립운동가들을 말살하기 위해 민족지도자들에 대한 일제 검거령을 내렸다. 전국에서 500여 명이 검거되고, 흥사단우도 약 70명 투옥되었다. 8월 6일 흥사단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 당했고, 설상가상 도산은 연이은 옥고로 인해 1938년 3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제의 탄압과 회유가 더욱 심해졌고, 반민족적 해단 행위를 한 변절자도 생겨났다. 그럼에도 많은 흥사단우들은 미주와 원동에서 굳건히 동맹수련과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이승만 정권 독재에 반대한 유일한 민간단체 1945년 11월 11일 송종익·한시대·김병연 등의 재미 단우와 유진동·김붕준 등의 원동 단우들의 귀국을 환영하는 모임에서 흥사단 운동의 국내 재건을 결의했고, 12월 27일 국내 위원 12인을 선출함으로써 국내에서의 흥사단 운동이 재개되었다. 이 무렵 한국 사회에는 새로운 국가 건설을 앞두고 정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던 때라, 흥사단의 이런 움직임을 정치 활동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에 1946년 6월 21일 “흥사단은 결코 정치 단체가 아니며, 따라서 어느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지지 또는 반대하는 일은 없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국내 위원부와 미주 본부와의 긴밀한 연락과 협조 하에 본부 이전을 위한 준비를 하는 한편, 1946년 9월 28일 해방된 조국에서 최초 국내 대회가 서울 종로의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렸다. 이날 선언문·행동강령·훈련요강과 ‘동포에게 격함’이라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새로 입단하는 단우가 급격히 늘어나고 부산·대전·춘천·수원·인천·연백 등지에 지방 조직도 창설되었다. 1948년 3월에는 청년부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6·25전쟁으로 인해 흥사단은 가슴 아픈 손실을 입었다. 조영후를 비롯한 5명의 단우가 피살되고, 백인제·이광수·김동원·김여식 등을 비롯한 24명의 단우가 납북되었다. 도산 선생 언행록 원고와 창단 때부터의 단보 등 많은 사료들이 압수당하거나 소실되었다. 그럼에도 1951년 11월 25일 부산시 중구 부평동에 흥사단 임시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고 단보를 속간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조인되고, 9월에 서울로 복귀한 본부는 서둘러 전쟁의 상처를 복구하고 조직을 정비해 나갔다. 이승만 정부로부터 단보의 발행금지 처분을 받고, 편지 성격을 띤 부정기적 소식지 형식의 <공함>으로 바꾸어 발행했으며, 대회와 각종 수련 활동과 대외 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흥사단은 자유당 정권의 부정과 부패에 맞서서 강좌와 언론 혹은 청년운동을 통해 당시로서는 정치단체를 제외하고는 거의 유일한 비판적 세력으로 존재해왔다. 금요강좌를 통한 국민계몽, <새벽>을 통한 언론 활동은 직·간접으로 민주화 과정에 기여했으며, 특히 4·19 직전에 발행된 새벽 3월·4월·5월호의 내용을 보면 ‘지상 데모’라고 일컬을 만하다. 흥사단 청년부, 민주화운동 주축 세력으로 성장하다 1963년 9월 1일에 제정된 ‘세포의 조직과 운영요강’에 따라 각 지역 분회 조직과 청년 아카데미, 대학생 아카데미, 고등학생 아카데미, 중학생 아카데미, 소년 아카데미를 창립했다. 이로 인해 전국적인 아카데미 운동 시대가 열렸다.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학생운동 중심에는 대학 아카데미가 있었다. 흥사단 출신 민주화 운동가도 다수 배출되었다. 1964년 4월 15일에는 동광, 단보, 공함, 새벽의 맥을 이어서 새로운 기관지 <기러기> 창간호를 발행하고, 1965년부터 1970년까지 수백 회에 걸친 전국적인 순회강연을 통해 도산사상과 흥사단주의를 전파했다. 1977년 본부를 명동에서 동숭동으로 옮겼다. 흥사단 강당은 민주화 운동 인사들의 집회장소로 유명했는데, 1984년 5월 민청련에서 주최한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 추도식이 열리기도 했다. 이는 1980년 민주화운동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최초의 집회였다. 다양한 시민운동과 연대하며 도산정신 계승 흥사단은 1989년에 부설기관으로 ‘도산아카데미연구원’을 발족해 사회발전을 위한 정책연구를 담당하고 사회지도층의 재교육을 위해 노력했다. 또한 1993년 시민실천위원회를 발족해 교육과 환경 등 여러 분야의 시민운동단체와 연대하면서 시민운동의 여러 영역으로 넓혀 나갔다. 청소년 운동 분야에서도 주요한 변화가 있었다. 서울지부의 청소년상담실 개설(1987)과 청소년 대학로 축제(1991) 실시, 본부의 제1회 통일꾼 수련대회(1991) 및 제1회 통일백일장(1992) 개최, 본부와 지부가 공동으로 추진한 ‘나라사랑 대행진’과 여러 지부의 다양한 ‘역사탐방’, ‘119 캠프’ 등 일반 청소년들이 참여할 수 있는 사회교육 프로그램을 확대 실시했다. 1990년대 시민운동의 전성기를 거치면서 흥사단은 공명선거, 사회, 교육, 환경, 교통 등 다양한 분야 시민운동에 참여했다.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민족통일운동본부와 투명사회운동본부, 교육운동본부를 중심으로 한 흥사단 3대 시민운동을 적극 펼쳐나갔다. 무엇보다 흥사단은 참된 나라사랑을 실천한 독립유공자와 그들의 후손을 국가·사회적으로 예우해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고, 이를 통해 미래 세대에게 진정한 나라사랑 정신을 전하기 위해 2005년 ‘독립유공자후손돕기본부’를 발족했다. 독립유공자후손돕기본부는 2005년부터 2019년까지 600여 명의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총 29회, 5억 3,900여만 원의 장학금을 후원했다. 아울러 상해와 중경의 임시정부 탐방, 독도 방문 등 리더십 함양 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우리 사회에서 존중받을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