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 Inside

민족기업열전 [2020/05] 민족기업 열전 - LG그룹 (1)

페이지 정보

본문

LGGS그룹 두 가문의 적선 (1)

 

역사 속 순국정신의 산실, 진주

LGGS 두 가문의 이어지는 적선

 

글  이태룡(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

 

진주는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 외에도, 명성왕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에 맞선 1896년 진주의병들은 진주성을 점령하고, 이를 의병의 본거지로 삼아 일제와 관군과 맞서 싸웠으며, 3·1만세의거 때 경상도에서 가장 많은 횟수와 인원이 순국하고 참여한 항일 독립운동의 산 역사를 보여주는 곳이다. 특히 이곳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지사를 도왔던 적선지가가 많았는데, 그 대표적인 가문으로 진주군(현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의 능성 구씨(綾城具氏)와 김해 허씨(金海許氏) 문중을 들 수 있다.

 

진주의병과 진주 3·1만세의거

 

1896219(음력 17), 당시 한성평양대구와 더불어 4대 도시 중의 하나였고, 21군을 관할하던 진주가 의병 수중에 들어갔다. 임진왜란 때 왜군을 상대로 1년 이상 버텼던 진주성은 촉석성으로 불리는 내성과 이를 감싸고 있는 외성으로 구축되어 있어서 과히 난공불락의 성이라고 일컬었고, 불과 1년 전 조선의 13도를 23개 관찰부로 개편되기 전에는 경상우도의 수부(首府)로서 그 위용을 자랑하던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 문루에 의병의 깃발이 꽂힌 것이었다. 그것도 진주로부터 170여 리 떨어진 안의(현 함양군 속면)의 의병들을 이끈 노응규(盧應奎, 1861~1907)가 진주부를 점령했다는 소식은 조선은 물론이고 일본 신문 도쿄아사히신문(東京朝日新聞)에도 날 정도로 깜짝 놀랄 일이었다.

노응규가 거의한 지 나흘째 되던 223(음력 111), 진주에서 정한용(鄭漢鎔, 1866~1935)이 유학자 정재규(鄭載圭), 전 군수 권봉희(權鳳熙), 전 찰방 오종근(吳鍾根)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진주성은 의병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 후 진주사천고성의 의병들이 더욱 모여들어 그 수가 1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또 의병들이 충의의 마음으로 뭉쳤던 까닭에 관군은 물론, 현재 경상남도 일원에는 단 한 명의 일본군경이 발을 붙일 수가 없어서 부왜인들을 정탐꾼으로 보내어 당시 상황을 파악했는데,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진주사천고성 세 고을의 의병수가 1만여 명이며, 구포에 있는 우리 수비대의 습격설은 물론, 부산의 거류민 습격설이 자주 전해져서 우리 측을 크게 당황하게 하였다. 또 김해 등지에서는 수차에 걸쳐 우리 수비대와 전투를 벌여 쌍방이 사상자를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2개월 뒤 국왕은 선유사를 보내어 의병해산을 종용하였다. 국모의 원수를 갚고, 난신적자를 처단한 후 국왕을 대궐로 모시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창의했고, 창의한 지 10여 일만에 밀조 까지 받았지만, 잠시도 지체할 수 없는 것이 어명인지라 의병을 해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진주의병을 자진해산한 날이 419(음력 37)이었으니 의병을 일으켜서 진주부를 점령한 지 꼭 2개월 만이었고, 이는 한말의병사에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진주 3·1만세의거 상황은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 1859~1925) 선생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이 되기 전 임시정부 사료조사위원으로서 3·1만세의거 사료를 정리해서 국제연맹에 보고한 자료를 바탕으로 기록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나타나 있다.

진주에서는 3·1만세의거 때 17차례, 28,000여 명이 참여하여 42명이 순국하고, 150명이 부상했으며, 242명이 투옥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경상남북도에서 가장 많은 횟수와 인원이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순국하자 경남 출신 광복지사들은 조국 광복을 도모하기 위해 중국러시아 등지로 가서 임시정부나 독립군(광복군)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밀양의령진주 출신은 의열단에 가입한 지사들이 많았다.

그리고 3·1만세의거 때 투옥되어 고초를 겪은 다수의 지사들도 국내외에서 조국 광복을 위해 애썼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밀양 출신 김원봉(金元鳳)김대지(金大池)김상윤(金相潤)윤세주(尹世胄)황상규(黃尙奎) 등의 의열단, 박진환(朴進煥)을 비롯한 봉양학교광림학교진주공립농업학교 졸업생들이 신간회 진주지부를 결성하여 반일운동을 펼쳤으며, 의령3·1만세의거 주도자로 2년 옥고를 겪은 후 중국으로 가서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다시 4년 동안 고초를 당한 구여순(具汝淳), 북만주에 발해농장을 건설했던 안희제(安熙濟) 선생도 의령 출신이었다. 이들의 활동을 하는 데 밀양의령진주의 사람들은 일제의 눈을 피해 뒷받침을 해준 사실이 독립운동사에 나타나 있다.

 

진주 지수면 <능성 구씨>, <김해 허씨> 두 가문의 적선 

 

반민특위가 해체된 후 반민족자 관련 서류가 대법원으로 이관된 직후인 19491027, 인민군 복장을 한 불순분자들이 진주법원을 방화하고, 2시간가량 인민군 만세를 외치고 돌아다녔다. 1925년까지 부산울산을 포함한 경상남도 도청이 진주에 있었기에 한말 경남지방재판소가 진주에 있었고, 수많은 의병과 진주를 비롯한 서부경남의 3·1만세의거 관련자 재판기록은 진주법원에 있었는데, 그것이 불타버린 것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진주 출신은 62명이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았다.

진주 3·1만세의거 주도자로 16월 옥고를 겪었던 이강우(李康雨) 지사는 광복 후 진주에서 무소속으로 초대 민의원이 되었고, 밀양의 김상윤 지사의 집안에서 국회의원이 나오기도 했지만,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후손 대부분은 일제강점기에 이어 가난이 대물림되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지사를 도왔던 밀양의령진주의 나라 위한 적선지가는 많았는데, 그 대표적인 가문으로 진주군(현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 능성 구씨(綾城具氏)와 김해 허씨(金海許氏) 문중을 들 수 있다.

경술국치 후 지수면 승산리 상동마을에는 만회(晩悔) 구연호(具然鎬, 1861-1940) 선생이 살고 있었다. 만회 선생은 1883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첫 벼슬이 승정원 가주서(7)를 거쳐 승문원 부정자, 성균관 전적, 홍문관 교리, 1891년 사헌부 장령, 1901년 황태자에게 경서를 강의하는 홍문관 시독(3)을 지낸 유학자이자 고관 출신이었다. 그리고 승산리 하동마을에는 지신정(止愼亭) 허준(許駿, 1844-1932) 선생이 살고 있었다. 지신정 선생은 1891년 진사시를 거쳐 1902년 중추원의관, 1904년 비서원 승(3)을 지낸 분이었다.

김해 허씨 문중은 대대로 부호였는데 비해 구씨 문중은 대과급제를 한 후 20여 년 동안 벼슬은 청요직(淸要職)에 있었고, 대대로 살림살이가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진주에서 만석꾼으로 널리 소문이 났던 지신정 선생의 아들 효주(曉州) 허만정(許萬正, 1897-1952)1920년 진주에 사립중등학교 설립자금 50만원 중, 10만원(1만석 쌀값)을 쾌척한 반면, 만회 구연호 선생의 아들 춘강(春崗) 구재서(具再書, 1886-1956)는 유학을 숭상한 가문이었지만 경술국치 후에는 그의 아들 연암(蓮庵) 구인회(具仁會, 1907-1969)와 함께 진주에서 포목

최신글

  • 글이 없습니다.

순국Inside

순국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