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우리땅 [2021/07] 노블레스 오블리주 최부잣집 경주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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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자금·민족자본 키운 만석꾼의 진심
겸양의 미덕 지키며 더불어 살았던
진정한 부자(富者)의 품격
글 | 편집부 사진 | 한국관광공사·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경주에 가면 모든 것이 예스럽고, 그래서 더 멋스럽다. 이십여 년 전 취재차 경주에 갔다가 벚꽃 아래 어여쁜 기와로 장식된 건물이 있어 사진을 찍었더니, 공중화장실이어서 웃었던 기억이 난다. 왕릉으로 이어진 푸르른 숲길을 걷노라면 뭔가 충만함이 샘솟아, 여기에 움막 하나 짓고 살고 싶다는 공상에 빠지곤 했다. 불국사, 석굴암, 천마총, 첨성대, 황룡사지, 대릉원, 동궁과 월지, 황리단길… 모든 곳이 너무 좋아서, 어딜 먼저 가야 하나 오랫동안 망설였던 기억도 생생하다. 다행히 오늘은 ‘행복한 선택장애’를 겪지 않아도 된다. 여행의 시작을 경주 최부잣집으로 정했으니까.
경주 여행의 필수코스로 사랑받는 최부잣집은 ‘경주교동 최씨 고택’이 정식 명칭이다. 조선시대 양반가옥의 정석적 형태이며 지어질 당시 99칸이었으나 현재는 큰 사랑채와 안채, 솟을대문과 곳간 등이 남아있다. 예전 부지가 2천여 평, 후원이 1만 평, 하인이 1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400년 동안 부를 이어온 비결 경주 최부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랫동안 부를 지켜온 가문이다. 400년 동안 9대 진사와 12대 만석꾼을 배출했다. 변화무쌍한 인간사에서, 게다가 파란만장한 우리 근현대사에서 어찌 이토록 한결같았을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최부잣집 육훈(六訓)과 육연(六然)에서 찾을 수 있다. 더 위대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이다. 11대 최현식 선생은 경주의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다. 2018년 최부잣집 창고에서 국채보상운동에 관한 문서들이 다량 발견되기도 했다. 경주 최부잣집은 구한말 의병과 일제 때 독립운동가의 은신처가 되었다. 최익현, 신돌석, 박상진, 최시형, 손병희 등 이 집을 거쳐 간 인사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12대 최준 선생은 독립운동가 안희제 선생과 함께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재산을 일본 식산은행에 담보로 잡아가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댔다. 그로 인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조선국권회복단과 광복회에 참여하고 경주 광명리에서 우편마차를 습격해 탈취한 자금을 관리하는 등 위험한 일에도 나섰으며, 동아일보·경성방직과 대구은행 등의 발기인으로 참가하는 등 민족자본을 키우는 데도 힘썼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됐다. 솟을대문을 지나면 사랑채가 나온다. 화려하진 않지만, 세련된 기품이 넘친다. 안채에 들어서면 정겨운 장독대와 유난히 높다란 굴뚝이 눈에 띈다. 역시 이곳도 소박하다. 만석꾼의 부(富)를 그마나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은 곳간이다. 쌀 700~800석을 보관할 수 있는 크기이며, 국내 최대 규모의 목조 곳간이라고 한다. 이 곳간이 백리 안에 굶주린 이들을 먹여 살렸다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하다. 경주의 여름은 매혹적인 연꽃 향으로 가득 발걸음을 재촉해 연꽃단지로 향했다. 7월의 경주 여행에서 놓치면 절대 안 되는 코스다. 동궁과 월지 연꽃단지부터 서출지, 보문정, 양동마을까지 경주 전체가 연꽃 향기로 가득하다. 그중 동궁과 월지 연꽃단지가 가장 넓고 아름답다. 동궁과 월지 매표소에서 300m 정도 가면 무려 4만 8,000여㎡ 넓이에 백련과 홍련, 황련 등 다양한 연꽃이 한꺼번에 피어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지그재그로 이어진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면 카메라 셔터를 수십 수백 번 자동으로 누르게 된다. 우아한 연꽃의 자태에 취하고, 은은한 향기에 취하는 황홀경을 경험한다. 연꽃 하면 양동마을도 빼놓을 수 없다. 기와지붕과 초가집이 연꽃과 어우러져 정겨운 느낌을 더한다. 경주 밤은 단연 동궁과 월지에서 맞아야 제 맛이다. 동궁은 신라의 왕자가 머물던 곳이며, 흔히 안압지로 불리는 월지는 신라 최고의 정원이다. 반듯하지 않고 굴곡이 많은 연못은 끝이 없는 바다를 연상시킨다. ‘바다를 바라보는 궁전’이란 뜻을 가진 임해전의 옛 터 위에 드리우는 전각들의 야경은 신라의 역사를 잘 몰라도, 신라시대에 온 듯 묘한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