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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우리땅 [2021/08] 역사와 자연이 공존하는 제주 한라산둘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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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근현대사 흔적 곳곳에 남아  


제주 푸른 숲길 걸으며 

민중의 아픈 역사를 만나다 


글 | 편집부  사진 | 한국관광공사·제주관광공사(Visitjeju.net)


한라산둘레길은 역사와 만나는 길이다. 먼 과거부터 일제강점기와 근현대사까지 가슴 아린 역사의 장면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숲은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존재했고, 그 후에도 역사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성장해왔다. 켜켜이 쌓인 시간과 역사, 그리고 자연이 만들어내는 장엄한 대서사시 앞에서 우리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경이로움을 경험한다. 무오항일운동이 일어난 법정사 입구에서 시작해 제주 4·3사건 현장으로 이어지는 한라산 ‘동백길’은 그래서 더 소중하다.  



제주도 해안을 따라 한 바퀴 도는 ‘제주올레길’은 다채로운 풍광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다. 돌담길, 밭길, 숲길, 하천길, 고운 모래사장 길, 마을길 등이 차례로 나타나 지루할 틈이 없다. 제주의 푸른 바다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하다. 이에 반해 ‘한라산둘레길’은 한라산 중턱에 있는 트레킹 코스다. 내내 울창한 숲길이라 온전히 숲에 몰입할 수 있어 피톤치드를 듬뿍 마시며 지친 심신을 달래기에 더없이 좋다. 초록빛 숲속을 걷는 것만으로 힐링이 된다. 


현재 한라산둘레길은 제주도 서쪽에서부터 남쪽을 돌아 동쪽까지 천아숲길, 돌오름길, 동백길, 수악길, 목장길, 사려니숲길까지 6코스가 개발되어 있다. 이 가운데 무오법정사 입구에서 돈내코 코스 입구까지 잇는 13.5km의 ‘동백길’은 아주 특별한 장소다. 제주도 내 최초·최대의 항일운동인 무오항일운동에 일어난 법정사에서 시작해 4·3사건의 비극을 엿볼 수 있는 돌담을 지나간다. 숲길을 걷노라면, 일제강점기와 근현대사까지 역사의 장면들이 곳곳에 남아있어 켜켜이 쌓인 시간과 역사, 그리고 대자연이 만들어내는 장엄한 서사시를 감상할 수 있다.


무오법정사 입구에서 시작하는 

‘동백길’


동백길이 시작하는 초입에는 무오년 법정사 항일운동을 기리는 탑이 서 있다. 항일운동의 발상지인 법정사는 면적 87.3㎡의 작은 절로 ‘법정악’ 능선 해발 680m 지점에 있다. 사찰 법당은 우진각 지붕으로 된 초당이었으나, 당시 일본순사들이 항일지사들을 체포하면서 불태웠고 지금은 축대 등 건물의 흔적만 남아 있다. 인근에 무오법정사항일운동기념탑과 당시 항일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신위를 모신 사당인 의열사가 있다. 


무오법정사 항일운동은 무오년인 1918년 10월 17일, 3·1운동 1년 전에 일어났다. 조직적으로 무장한 법정사 스님들과 지역주민 700여 명은 중문 경찰관 주재소를 불태웠다. 일제의 혹독한 탄압이 이어졌고 66명이 검거되고 5명이 옥사했다. 무오법정사 항일운동은 제주도 내 최초·최대의 항일운동이자, 1910년대 종교계에서 주도한 전국 최대 규모의 무장운동으로 1919년의 3·1운동을 비롯한 민족항일의식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동백길의 가장 멋진 구경거리는 나무다. 어린 동백나무가 곳곳에서 빽빽하게 자라고, 곳곳에서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활엽 고목들의 뿌리가 큰 바위와 어우러져 한몸이 되어있다. 우리도 그들처럼 서로를 보듬고 공존하면 얼마나 좋을까. 울창한 활엽수 군락지 속에 몇몇 소나무들이 웅장하고 근엄한 자태를 뽐내며 중심을 잡고 있는 듯하다. 소나무는 하늘을 향해 쭉 뻗어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에 존재하면서 인간들의 삶을 내려다보았을까. 잠시 나무를 보듬고 지친 마음을 기대어 본다. 바람소리, 새소리, 물소리, 나무의 고요한 숨결이 어우러져 마음 깊이 파고든다.  


일제 병참도로와 4·3유적지


동백길을 걷기 시작해 4.5km쯤 가면 ‘하치마키도로’라는 생소한 이름의 안내 표지를 만난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군사용 도로라 씌어있다. 바위를 깨 평탄한 길을 만들었는데 곳곳에 바위에 구멍을 뚫은 흔적이 남아있다. 군산, 목포, 인천에 남아있는 병참도로가 주로 일제의 수탈을 보여주는 자취라면, 제주에 남아있는 건 노역과 전쟁의 흔적이다. 


제주도는 지리적으로 동북아시아의 요충지라는 특성 때문에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군 6만여 명이 주둔한 전략적 기지였다. 나라 잃은 힘없는 민중은 매일매일 일제의 전쟁 야욕에 희생되면서 끔찍한 생을 견뎌야 했다. 


조금 더 가면 4·3유적지가 나온다. 안내 표지판이 없다면 그냥 돌무더기로 보일 수도 있을 정도로 많이 무너져 있다. 이승만 정부는 해안에서 5km 이상 산간지역에 대해 입산금지 명령을 내리고 강경진압작전으로 중산간마을을 모두 초토화했다. 마을의 95% 이상이 불에 타 없어졌고 수많은 희생이 뒤따랐다. 지금 눈앞에 있는 돌담들은 토벌대 주둔소의 흔적이다. 힘없는 주민은 강제부역에 동원돼 이중 삼중으로 돌을 쌓아야 했다. 아픈 역사의 흔적이 푸른 숲과 공명하며 현재와 미래로 이어지고 있다. 


대자연이 건네는 위로와 평화


동백길에는 여전히 표고버섯재배장이 있고, 오래 전 사용했던 숯가마터와 이러한 생업 현장을 드나들던 길이 남아있다. 우리가 흔히 제주 하면 감귤이나 옥돔을 떠올리는데 더 오랜 역사가 제주의 표고버섯 재배다. 세종실록에도 언급될 정도로 제주 표고는 맛과 향이 일품이었다. 참나무나 서어나무가 풍부한 데다 한라산과 화산 지형의 독특한 특성으로 습도가 잘 유지되기 때문이다. 


초록빛 대자연이 건네는 깊은 위로와 온전한 평화를 온몸으로 느끼며 길을 걷다보니 해가 중천에 떠있다. 어느덧 4시간 남짓 흘렀다. 동백길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을 ‘최후의 만찬’을 생각하니 설렌다. 주인공은 바로 돈내코 계곡이다.  


예부터 제주에선 백중날(음력 7월 15일) 닭을 잡아먹고 물맞이를 하는 풍습이 있다. 제주사람들은 이날 물을 맞으면 신경통이 사라진다고 믿었는데 백중날 가장 붐비는 곳이 바로 돈내코였다. 돈내코는 여름에도 한라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얼음처럼 차다. 계곡 양쪽은 난대 상록수림으로 덮여 있어 경치가 아름답다. 한라산이 가장 웅장하게 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나무 산책로를 따라가면 시원한 물줄기를 내뿜는 원앙폭포를 만난다. 금슬 좋은 원앙 한 쌍이 살았다고 하여 원앙폭포라는 이름을 붙였다.


바로 앞에서 바라다본 원앙폭포는 신이 만든 예술작품 같다. 색감과 구도, 그 모든 것이 너무도 완벽하다. 두 갈래로 쏟아지는 폭포수가 원앙처럼 사이좋게 떨어진다. 웅덩이에 떨어진 물은 에메랄드빛이다. 바닥까지 훤히 보일 정도로 투명하다. 햇빛의 방향에 따라 파란 잉크 색으로도 변한다. 무더운 여름에는 가족들과 함께 물놀이와 스노클링을 즐겨도 좋다. 


아픈 역사를 보듬고 시간은 흐른다. 나무가 자라고 숲은 더 울창해지고, 인간도 세대가 바뀐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대자연 속에서 더 나은 미래를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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