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기업열전 [2020/05] 민족기업 열전 - LG그룹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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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GS그룹 두 가문의 적선 (2)
역사 속 순국정신의 산실, 진주
LG⋅GS 두 가문의 이어지는 적선
글 | 이태룡(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
당할 때 당하더라도, 나라 찾는 지사에 힘 보탤 것
처음에는 연암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종자돈 2,000원과 자신이 동아일보 지국장을 하며 번 돈, 큰집 양자로 간 동생 철회(哲會)가 보탠 것을 합쳐 당시 진주의 번화가였던 식산은행 근처에 포목점을 차린 것이 1931년 7월이었고, 일손이 부족해질 정도로 장사가 잘되자 아버지 구재서도 가게에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듬해 뜻밖의 손님이 찾아들었다. 먼 친척인 일정(一丁) 구여순(具汝淳, 1892~1946) 선생이었다. 그는 의령 3·1만세의거를 주도한 혐의로 피체되어 2년여 옥고를 치렀고, 출옥 후 1922년 상해로 가서 의열단장 김원봉과 만나, 이듬해 8월 입단하고 12월에 조선총독부 요인 암살과 중요 관서를 파괴할 목적으로 동지들과 국내에 잠입하여 제3차 의열단 의거를 꾀하다가 피체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4년여 고초를 겪고 1928년 출옥하여 의령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소문은 들은 터였다. 당시 ‘이봉창・윤봉길 의거’로 인하여 임시정부의 양대 의열투쟁은 민족적 쾌거로 여기고 있던 터였는데, 일정 선생은 임시정부 지원금을 요청하였다. 춘강 선생은 부친 만회 선생께 이를 고하고, 거금 5,000원(약 500석 쌀값)을 내놓았다. (구여순은) 1922년 형기를 마치고 상하이로 망명하고 그 후 무력에 의한 항일투쟁 기도하여 의열단을 가입하였다. 1924년 의열단의 일인 요인 암살계획이 탄로되자 평양에서 검거되어 주동 인물로 최고형인 4년을 언도 받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1928년 형기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체류하던 중, 김용호(金鎔浩)의 애국심에 감동하여 다시 반제국지방단부(反帝國地方團部)를 조치하여 위원이 되었다. 이후 지방 부호들을 만나 군자금 모집에 힘쓰는 한편, 진주 지수면 구재서(具再書, 구인회 부친) 등으로부터 일화(日貨) 5천원을 받아 김구 선생에게 전달하기도 하였다.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3권. 312쪽 20여 년 만에 불쑥 나타난 백산이 발해농장과 대종교 계열의 학교 운영에 필요한 자금이 부족함을 호소하자 연암은 ‘당할 때 당하더라도, 풍찬노숙을 하며 겨레를 살리고, 나라를 되찾는 지사들에게 힘을 보태는 것은 당연하다’며 1만원을 선뜻 내놓았다. 물가가 다소 올랐지만 10여 년 전 부친이 일정 선생을 통하여 임시정부에 보내준 500석치 쌀값에 해당하는 거금이었으니, 구씨 가문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은 금전은 드러난 것만 1000석치 쌀값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독립군 단체를 돕기 위해 광복지사들이 비밀리 모금하다가 그 사실이 드러난 경우 적은 돈을 제공한 사람까지 고초를 겪고 옥살이를 했던 터여서 임시정부에 거금을 제공한다는 것은 자신의 투옥은 물론 가문의 몰락까지 각오해야 할 정도로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광복 후에도 계속 이어지는 구씨, 허씨 두 가문의 적선 1919년 3·1만세의거 후 민족지도자를 기르기로 결심한 효주 허만정 선생은 논 3만 3000평, 밭 470평, 대지 등을 매각하여 10만원을 마련하고, 뜻을 같이하는 10여 명의 동지들과 진주고등보통학교(진주고보) 설립을 위해 노력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사립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진주여자고등학교 전신) 설립으로 변경되어 1925년 개교할 수 있었고, 가난한 이웃을 돕고, 지역사회를 위해 선행을 계속해 옴에 지수면 승내리에는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에 그 공덕을 기리는 불망비가 두 번이나 세워졌다. 효주 선생의 다섯째 아들인 승산(勝山) 허완구(許完九, 1936~2017) 회장은 선대의 유지를 이어 진주여고를 발전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승산 선생은 1986년부터 매년 장학생을 선발해 34년 동안 1000여 명에게 장학금 약 11억 원을 주었고, 선친의 호를 딴 ‘효주기념관’을 건립하여 생활관교육과 음악교육 등 다양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도록 했으며, 1991년에는 사비 100억 원을 들여 지금의 진주여고 교사를 신축했다. LG 가문은 인재육성과 과학기술 진흥이라는 연암 구인회 선생의 뜻을 받들어 1973년 그의 아들 구자경(具滋暻, 1925~2019) 회장이 학교법인 연암학원을 설립하고, 진주에 연암공과대학을 설립하여 많은 인재를 길러오고 있고, 진주시민을 위해 연암도서관을 세웠다. 그리고 LG 가문의 독립운동정신의 특징은 현재까지도 그 얼을 잇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현충시설 개보수 사업이다. LG하우시스는 구씨 가문의 정신을 이어 받아 2015년부터 현충시설 개보수 사업을 펼치고 있다. 지금까지 충칭 임시정부 청사, 매헌윤봉길기념관, 우당이회영기념관, 안중근의사기념관, 만해기념관, 도산안창호기념관 등을 개보수 했다. 또 2016년부터는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독립유공자 및 국가유공자의 희생에 보답하기 위해 주거환경 개선 활동도 진행하고 있다. 올해까지 독립유공자(후손 포함) 8명과 국가유공자 19명을 선정해 주거환경 개선을 지원했다. LG하우시스는 3‧1만세시위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에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위치한 심산 김창숙기념관 개보수 지원을 포함한 독립운동 관련 시설 2곳 시설 개보수, 국가유공자 6명 자택 주거환경 개선등을 지원하고 있다. . 검소함으로 집안을 다스리고 공경함으로 몸을 닦아라. . 두려워해서 스스로 조심함이 깊은 못을 만난 듯, 엷은 얼음을 밟듯 하라. LG 가문은 ‘모춘당’을 지어 춘강 구재서 선생을 기리고 있는데, 선생이 남긴 유훈은 12가지 중 2가지다.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 어찌 있지 않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