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우리땅 [2021/12] 화성 3·1운동만세길 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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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고증으로 재탄생한 3·1운동 역사탐방로
일제의 대학살 아픔 딛고
새로운 평화의 역사 쓰다
글 | 편집부 사진 | 화성시문화재단
‘화성3·1운동만세길’은 철저한 고증을 거쳐 정비된 국내 최초 3·1운동 역사탐방로다. 화성시는 맨몸으로 일본군의 총칼에 맞서며 일제 탄압의 상징이었던 우정면사무소와 장안면사무소, 화수리 주재소를 파괴하고 일본 순사 가와바타까지 처단해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독립운동으로 평가받는 화수리 항쟁을 복원하는 데 집중했다. 총거리 31km에 달하며 독립운동가들의 집터와 생가, 횃불시위 터, 옛 장안면·우정면사무소 터, 화수리주재소 터 등 15개의 항쟁지가 그날의 역사를 오롯이 품고 있다.
화성 만세시위는 마을과 마을이 연합해 약 2500명이 참가한 대규모 항쟁이었다. 이들은 언제 어디선가 날아올지도 모르는 일본군의 총칼에 굴하지 않고 장안면사무소, 우정면사무소, 화수리 경찰관 주재소를 차례로 공격했다. 특히 화수리에서는 가와바타 순사와 격전하다가 시위대 3명이 총격으로 사망하자 격분한 시위대가 가와바타를 처단했다.
마을 곳곳마다 횃불이 타올랐고 만세 함성은 들불 번지듯 빠르게 인근 마을로 퍼져갔다. 조직적이고 공세적인 항일투쟁에 놀란 일제는 대대적인 보복에 나섰다. 1919년 4월 5일 3·1운동의 주모자를 색출한다는 구실로 새벽 3시 반경 수촌리를 급습해 일대를 방화하고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4월 15일에는 군대를 동원해 독립운동의 근거지인 제암리 마을 주민 23명을 교회에 가두고 총살했으며, 독립운동가 김흥렬 선생과 일가족 6명을 처참히 학살했다.
100년이 흐른 지금, 화성시는 선조들의 고귀한 투쟁과 희생이 어린 만세길 31km 전 구간을 정비하고 미래세대를 위한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되살렸다. 2014년부터 시작된 만세길 조성사업은 철저한 역사적 고증을 거쳐 독립운동가 차희식·차병혁·백낙열·김연방·최진성 선생의 유적지와 횃불시위 터, 쌍봉산, 한각리광장 터, 옛 장안면·우정면사무소 터, 화수리주재소 터 등 총 15개의 항쟁지를 하나의 길로 연결했다. 1919년, 만세를 외치며 걸었던 길 위에서 그날의 역사를 되새겨 볼 수 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다
‘화성3·1운동만세길’은 방문자센터에서 시작된다. 이곳은 1919년 4월 13일의 치열했던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공간이자 만세길 스탬프 투어를 시작하는 지점이다. 방문자센터는 우정읍 화수리의 옛 보건소 건물을 리모델링해 선열들의 투쟁을 함축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기획됐다. 첨탑 형태의 외벽에 화성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새긴 벽돌을 활용해 추모의 의미를 더했으며, 내부의 오래된 벽 위로 격자 형태의 구멍이 뚫린 새로운 벽을 쌓아 올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경험을 선사한다. 지난해 2월 독일에서 열린 세계적 권위의 국제디자인공모전인 ‘IF디자인 어워드 2020’에서 금상을 받아, 2019년 아이코닉 어워드 대상에 이어 2관왕의 영예를 안았다.

만세길을 따라가면 ‘개죽산 횃불시위 터’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지금은 그 어떤 흔적도 없이 야산으로 변했지만, 횃불시위 터는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화성 지역민들이 밤마다 산에 올라가 횃불을 피우고 만세를 불렀던 곳이다. 1919년 4월 1일 개죽산을 시작으로 쌍봉산, 남산, 천덕산, 무봉산 등 화성지역의 각 산봉우리에서는 일제히 횃불이 치솟았다고 한다. 산상 횃불시위는 화성 지역민들의 독립 의지를 드높이고 장안면과 우정면 사람들이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화성3·1운동만세길
방문자센터 주소화성시 우정읍 화수동길 163
문의 031-358-0301
이용시간 10:00~18:00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추석 당일 휴무)
마을과 마을이 이어지다

개죽산 횃불시위 터에서 1km쯤 가면, 초가집 형태의 교회가 눈에 띈다. 수촌교회다. 1919년 4월 3일,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새벽녘에 마을 시위대는 수촌교회에 집결했다. 수촌리는 장안·우정면 만세운동에서 가장 많은 수의 주민들이 참여했던 곳이다. 일본군은 1919년 4월 5일, 3·1운동의 주모자를 색출한다는 구실로 새벽 3시 반경 수촌리를 급습해 일대를 방화하고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당시 42호 중 38호가 불에 탔다. 수촌리 학살사건이다. 이때 수촌교회 예배당도 불탔으며, 지금의 초가집 형태는 1922년 선교사 아펜젤러가 다시 건립한 것이다.
만세길은 옛 장안면사무소 터를 지나 산상 횃불시위를 벌였던 쌍봉산로 이어진다. 두 개의 봉우리가 솟아 있어 이름 붙여진 쌍봉산은 우정읍과 장안면 사이에 있는 해발 117.7m의 산으로, 정상에 서면 우정·장안 두 지역의 전체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당시 쌍봉산은 흩어져 있던 각 마을 주민들이 집결한 장소였고, 집결한 인원은 초반 300명에서 1500명까지 늘어났다고 한다. 우정·장안 지역 주민들이 연대해 만세시위와 산상 횃불시위를 벌였던 이곳은 오늘날에도 화성지역 만세운동을 상징하는 장소로 기억되고 있다.
산길은 다시 이어져 우정·장안지역 주민들의 생활 중심지였던 조암리, 김연방 선생 묘소, 옛 우정면사무소 터, 한각리광장 터, 가와바타 순사를 처단한 화수리주재소 터를 돌아 다시 방문자센터에 다다른다. 첨탑 형태의 외벽에 새겨진 화성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하나하나 읽어본다.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그저 평범하게 살고 있었을 그들의 생을 앗아간 역사가 한스럽고, 그들이 지켜낸 이 땅이 더없이 자랑스럽다.
기억을 새기고 선열을 추모하다

1919년 4월 15일 일제는 제암리 주민 약 20명을 교회당에 모이게 한 후, 출입문과 창문을 모두 잠근 뒤 집중사격을 가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인근 고주리로 달려가 김흥렬 선생과 일가족 6명을 만세 주모자로 몰아 총살했으며, 증거 인멸을 위해 교회당에 불을 지르는 등 만행을 자행했다. 제암리 학살사건은 기독교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로 인해 전 세계로 알려졌지만, 일제는 형법에 규정된 범죄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그로부터 약 63년이 지난 1982년 제암리 학살사건의 목격자인 최응식 선생이 지목한 장소에서 유해와 유품이 발견되면서 유해발굴이 진행, 현재 29인이 발굴됐다.
기념관 밖에는 3·1운동 순국기념탑이 있다. 기념관 뒤편에서는 순국 묘지와 스코필드의 동상을 찾아볼 수 있다. 스코필드는 한국 땅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담기고 81세의 나이로 영면해, 외국인 최초로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