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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우리땅 [2022/01] 근대사 역사교육의 명소 망우리 역사문화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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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조국독립에 헌신한 애국지사의 길      


‘치유’와 ‘역사’ 속을 거닐며

인생의 참 의미를 사색하다   


글 | 편집부 사진 | 중랑구청 


‘공동묘지’라는 이름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녀서였을까. ‘망우리’는 오랫동안 기억 속에서 어둡고 스산한 공간으로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얼마 전 『망우리공원 인물열전』이라는 책을 읽으며 그간 얼마나 무심하고 무지했는지 부끄러웠다. 1933년 일제강점기 조성된 망우리공동묘지는 1998년부터 ‘망우리공원’으로 불리다가 2021년 10월 ‘망우리역사문화공원’으로 바꾸었다. 역사문화공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울창한 숲과 산책로 그리고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이끌어간 인물들이 ‘치유’와 ‘역사’의 시간을 선물하고 있다. 2022년 임인년 새 아침, 선열들의 묘역을 거닐며 인생의 참 의미를 사색하면 좋으리라. 


한용운, 안창호, 박찬익, 오세창, 문일평, 조봉암, 유관순 등 애국지사를 비롯해 근대 의학의 선구자 지석영, 화가 이중섭, 시인 박인환·김상용, 아동문학가 방정환, 극작가 함세덕 등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이끌어간 60여 명의 위인들이 이곳 망우리공원에 잠들어 있다. 


‘망우’의 어원은 태조 이성계에서 비롯되었다. 태조는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종묘사직을 마련한 후, 선왕들의 능지(能地)를 정하기 위해 대신들과 함께 현재의 동구릉을 답사했다. 그런데 무학대사가 권하길, 그 자리가 선왕의 능지보다는 태조의 신후지지(身後支地)로 더 적합하다고 했다. 태조는 그 권고를 받아들여 자신의 능지로 결정한다. 기쁜 마음으로 환궁하던 중 지금의 망우고개 위에서 잠시 발길을 멈추고 자신의 능지를 바라보니 과연 명당이었다. 이에 태조가 “이제는 근심을 잊게 됐다”라고 경탄한 데서 ‘망우(忘憂)’라는 이름이 붙게 됐다.


일제강점기 공동묘지에서 

근현대 인문학의 보고로


망우리에 공동묘지가 들어선 것은 일제강점기다. 1910년대 경성부에 미아리, 이문동, 이태원, 만리동, 여의도, 연희동 등 모두 19개 소의 공동묘지가 있었으나 도시가 개발되면서 없어졌다. 대신 망우리공동묘지가 1933년부터 서울시 공동묘지의 자리를 지키게 됐다. 


1977년 망우리공동묘지에서 망우묘지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90년대 망우리공원에 묻힌 위인들의 얼을 기리자는 움직임이 이어지면서 1992년과 1998년 두 번에 걸쳐 독립운동가와 문학인 등 열다섯 분의 무덤 주변과 사색의 길 가장자리에 연보비가 세워졌다.


1998년 망우리공원으로 명칭이 변경되면서부터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거듭났다. 2012년 한용운, 2017년 오세창, 문일평, 오기만, 방정환, 서동일, 오재영, 서광조, 유상규 등 애국지사 여덟 분이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었으며 2013년에는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한 곳에서 체험할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라는 점에서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2016년에는 ‘역사문화코스’, ‘인문학길’, ‘서울 둘레길 2코스’ 등이 조성되어 대한민국 근현대 인문학의 보고(寶庫)로서 가치를 더했다.


오솔길마다 깃든 절절한 애국심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를 깨닫다


일제강점기 국내·외에서 조국독립을 위해 희생했던 애국지사 묘역을 둘러보는 ‘애국지사의 길’은 총길이 6.26km로 1시간 50분 정도 걸린다. 길 사이사이에 독립운동가의 넋을 기리는 연보비가 눈에 띈다. 돌에 새긴 절절한 문구를 읽다 보면 선열들이 남긴 뜨거운 애국심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공원 입구에서 왼쪽 길에 들어서 걷다 보면 ‘이태원묘지 합장비’ 표지판이 나온다. 유관순 열사를 추모하는 곳이다. 유관순 열사는 순국 후 이태원공동묘지에 안장됐지만 일제가 공동묘지로 개발하는 과정에서 유해를 분실했고 당시 연고가 없는 무덤 2만 8000기의 유해를 화장한 뒤 합장했다고 한다. 당시 유관순 열사 묘지가 무연고 처리됐기 때문에 이 묘지에 합장됐으리라 추정, 2018년 9월 ‘유관순열사 분묘합장표지비’가 세워졌다.


길을 따라 올라가면 도산 안창호 선생의 묘터가 나온다. 도산은 망우리공원에 있는 유상규 묘 옆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겼으나, 도산공원으로 이장되어 터만 남아있다. 상해임시정부에서 도산의 비서로 일했던 유상규 선생은 도산의 정신적 아들이었으며,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 의사이자 독립운동가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21년 ‘어린이’라는 단어를 공식화하며 1923년 5월 1일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날’을 만든 소파 방정환 선생의 묘소도 이곳에 있다. 그는 어린이는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우리 사회에 가르친 ‘어린이들의 영원한 대부’다. 연보비에는 “어린이의 생활을 항상 즐겁게 해주십시오. 어린이는 항상 칭찬해가며 기르십시오. 어린이의 몸을 자주 주의해 살펴 주십시오. 어린이에게 책을 늘 읽히십시오. 희망을 위하여. 내일을 위하여 어린이를 다 같이 잘 키웁시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가슴이 뭉클해져 온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자 독립운동가·서예가·언론인으로 명성이 높았던 오세창 선생의 연보비에는 “글과 그림이 대대로 일어나 끝내 사람에게서 없어지지 않은 것은 사람이 본디 가지고 있는 성품이 서로 비슷하고 사물의 근원이 있었던 까닭이다. 이에 솔거 이하 근래 사람에 이르기까지 서화를 밝혀놓고 높고 낮음을 품평하였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선생은 서화(書畫)계의 정신적 지도자로 활약했으며, 우리나라 옛 서화를 수집·정리한 공이 크다고 알려졌다.


조금 더 걸어가면 만해 한용운 선생 연보비와 만날 수 있다. “한민족이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는 것은 인류가 공통으로 가진 본성으로써 이 같은 본성은 남이 꺾을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스스로 자기 민족의 자존성을 억제하려 하여도 되지 않는 것이다.” 일제의 서슬 퍼런 총칼 앞에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던 만해의 기개가 느껴진다. 만해의 묘는 등록문화재 519호이며 장정환, 오세창 등 독립운동가 아홉 분의 무덤도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이중섭·박인환이 잠든 곳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한국 근대 서양화의 대표 화가인 대향 이중섭의 묘지도 망우리공원에서 만날 수 있다. 작은 그림 하나가 그려진 묘비가 인상적이다. ‘소’, ‘가족’ 등 향토적이면서 자전적이며 동화적인 느낌이 드는 이중섭의 그림 세계가 연상된다. 이중섭의 유해는 화장된 후 절반은 망우리공원에, 나머지는 일본의 처가 묘에 합장되었다고 한다.


‘목마와 숙녀’로 유명한 시인 박인환 선생의 묘도 이곳에 있다. 묘비에는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다’는 시구(詩句)가 새겨져 있다.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에 지은 마지막 작품 ‘세월이 가면’의 한 구절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했던가. 시인이 남긴 언어들은 여전히 우리 가슴속에 스며들어 깊은 여운을 남긴다. 



바야흐로 2022년 임인년이다. 인생의 의미는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생의 중심을 잡아야 할 때다. 망우리역사문화공원에서 선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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