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우리 것들 [2022/01] 천년 가는 우리 종이 한지의 무한 매력
페이지 정보
본문
세계에서 인정받은 대체불가 최고의 종이
비잔틴 복음서·다빈치 작품 등
위대한 기록문화재 완벽 복원
글 | 편집부 사진 | 한국관광공사·원주한지테마파크
종이는 인류 역사의 진보를 이끈 일등공신이다. 종이를 매개체로 인간은 언어와 기억을 저장했고, 서로 다른 문화와 역사를 연결해 문명을 이루어냈다. 종이의 시대가 가고 디지털 시대가 도래했다고들 하지만, 천년 넘게 보존된 종이의 위대한 지속성을 생각한다면 쉽게 예단할 일도 아니다. 우리나라 전통 종이인 한지가 세계적으로 인기다. 이탈리아에선 ‘대체 불가’ 문화재 보존·복원 용지로 인증받아 성 프란체스코의 친필 기도문, 6세기 비잔틴 시대 복음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등의 복원에 쓰이고 있다. 지난 10월에는 주요 20개국(G20) 정상 배우자 모임에서 김정숙 여사가 한지 가죽으로 만든 ‘비건(vegan·채식) 가방’을 들어 화제가 됐다. 21세기 가장 힙한 아이템으로 떠오른 한지의 무한매력에 빠져보자.
부드럽고
강한 내구성으로 인기
한지를 홍보하기 위해 김 여사는 10월 30일 로마에서 한지전문가 간담회도 가졌다. 김 여사는 “교황 요한 23세의 지구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같은 소중한 인류 유산이 한지로 완벽하게 복원됐다. 한지의 가치를 일찍이 알아본 이탈리아 전문가들에게 감사하다”며 “유연하면서도 강한 한지의 특성은 한국인의 특성이기도 하다. 천년 후에도 한지가 인류의 귀중한 자산으로 전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한지는 문화재 복원기술이 발달한 이탈리아에서 부드러우면서도 잘 찢어지지 않는 강한 내구성 등으로 인기가 있다. 2020년 8월 이탈리아 국립기록유산보존중앙연구소(ICRCPAL)는 전주 한지가 문화재 보존 보수·복원용으로 적합하다고 판정했으며, 주요 문화재 5점을 한지를 이용해 복원했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서도 문화재 복원에 한지를 사용하는 한편 경북 문경과 전북 전주의 한지공장을 직접 견학하기도 했다.
키아라 포르나차리 바티칸 박물관 종이복원실장은 “복원이 까다로운 서적, 건축도면 등에 한지는 대체 불가능한 복원 도구”라며 “내구성이 탁월한 한지를 계속 사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보존성·기능성에서
세계 최고 수준
‘닥종이’로 불리는 한지(韓紙)는 물과 불 등 자연환경의 조화로 만들어낸 훌륭한 완성품이다. 보존성과 기능성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한지의 주재료인 수분을 머금은 닥나무는 벨 때부터 수세(水洗)하고 초지(草紙)하는 공정 동안 물과 항상 공존하게 되며, 원료를 유연하게 하고 건조하는 과정에서는 불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탈수 및 건조공정을 거치면서 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서 비로소 한지가 탄생하게 된다.
물과 불의 상호작용 외에도 한지는 닥나무와 황촉규(黃蜀葵, 아욱과의 한해살이풀)를 주재료로 하여 고도의 숙련된 기술과 장인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완성된다. 닥나무를 베고, 찌고, 삶고, 말리고, 벗기고, 다시 삶고, 두들기고, 고르게 섞고, 뜨고, 말리는 아흔아홉 번의 손길로 만들어져 마지막 만지는 사람이 백 번째라는 뜻에서 한지를 ‘백지(百紙)’라 부르기도 했다. 그만큼 많은 정성이 들어가 내구성이 뛰어나다.
한지의 우수성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 인쇄물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증명하고 있다.

우리의 한지는 질이 좋아 예로부터 국내외에 이름이 높았다. 중국 기록인 『계림지(鷄林志)』, 『고려도경(高麗圖經)』, 『고반여사(考槃餘事)』 등에 고려지(高麗紙)의 우수성을 예찬하는 기록이 많이 있다.
이 중 『고반여사』의 기록을 보면 “고려지는 누에고치로 만들어서 비단같이 희고 질기며 글을 쓰면 먹이 잘 먹어 좋은데, 이것은 중국에 없는 것으로 진품이다”라고 기술했다.
특히 우리의 한지를 세계적인 명품으로 만든 것은 바로 닥나무라는 재료의 사용이었다. 조선 시대 이규경(李圭景)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고려의 종이는 천하에 이름을 떨쳤는데, 그것은 다른 원료를 쓰지 않고 닥나무만을 썼기 때문이다. 그 종이가 매우 부드럽고 질기며 두꺼워서 중국 사람들은 고치종이라고도 했다”라는 기록이 있어 질이 좋은 닥나무의 사용으로 인한 한지의 우수성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창호지부터 스피커까지
무한변신
한지는 문필용뿐 아니라 창호지와 벽지·온돌지 등으로 사용했다. 또 기름을 먹여 비가 올 때 쓰는 갈모를 만들기도 했다. 한지를 여러 장 겹쳐 기름을 먹이고 옻칠을 하면 물에 잘 젖지 않아 바구니·옷장·필통·갓통 등 다양한 생활용품을 만들 수 있는데, 그중에는 요강도 있었다. 한지로 만든 요강은 새색시가 시집갈 때 가마 안에서 사용하는 요긴한 물건이었다.

“오늘날의 급무는 군사를 교련하고 갑옷을 수선하는 일이다. 대개 철갑은 무겁고 차가워 추위에 입을 수 없고 지갑(紙甲)은 가볍고 따스하여 추위를 막기에 충분할 뿐더러 철갑에 비해 공력이나 재료가 십 배나 덜할 뿐만이 아니다. 별조청(別造廳)으로 하여금 각도에서 송지(松脂)를 올려보내기를 기다려 1000여 부를 만들게 하라.”
여기서 언급한 ‘지갑’은 종이, 즉 한지로 만든 갑옷을 뜻한다. 조선시대 지갑은 꽤 흔한 형태의 갑옷이었는데, 제작과정에서 13겹 이상의 한지가 쓰였다고 전해진다.
현대에 들어서는 한지의 쓰임이 더욱 다양해졌다. 한지를 꼬아 만든 한지실에 면·실크 등 다른 섬유를 섞어 옷을 만든다. 한지옷은 가볍고 보온성이 뛰어나며 통풍도 잘된다.
또 식품 포장용지나 의료용 항균지, 절연지 등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스피커의 진동판으로도 훌륭한 역할을 한다.
한지 진동판을 개발한 음향기기 전문업체 소노다인의 허진 대표는 “한지는 다른 소재에 비해 가벼워 보다 빠르게 진동해 소리를 낸다”며 “울림이 좋아 평론가들이 ‘맑은 가을 농촌의 정자 같은 청명한 소리가 난다’고 할 정도”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한지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지난 4월에는 2024년 등재를 목표로 ‘전통한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추진단’ 발대식이 열렸다. 이배용 추진단장은 “한지는 역사성·예술성·과학성 면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이유가 차고 넘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