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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우리땅 [2022/02] 정미의병의 해방구, 임진강 유역 감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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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의병들의 고귀한 충혼(忠魂)


금일에 패하면 명일에 다시 일어나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글 | 최범산(작가, 순국선열교육원장) 


정미의병 당시 경기북부의병의 활동 중심지는 임진강 유역과 감악산 일대였다. 1907년 9월, 정미7조약이 체결되고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는 망국적 치욕을 당하자, 임진강 유역의 적성, 연천, 마전, 삭령 등을 근거지로 허위, 왕회종, 김진묵, 연기우 등은 경기의병진을 창설하고 이인영, 이은찬, 이구채 등의 대한관동창의군, 이강년 호서창의진 등과 통합하여 13도창의군 연합의진을 결성하였다.  


일본침략자가 간계(奸計)로써 삼천리강토를 유린하면, 우리는 의(義)로써 항거하고, 침락자들이 창(槍)과 포(砲)로써 공격한다면 우리는 혈(血)로써 대적하고, 전자(前者)가 넘어지면 후자(後者)가 계속하여 나아가고, 금일(今日)에 패하면 명일(明日)에 다시 일어나 우리 二千萬人 가운데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맹세코 일본오랑캐와 함께 살지 않을 것이다. 

- 정미의병 1907년 7월 3일 동포들에게 고하는 글 중에서


의혈(義血)로 새겨진 의병전쟁


대한의병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최후의 일인까지 일제 침략자와 목숨을 걸고 싸웠던 역사의 영웅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대한민국에서 풍요와 번영을 누리고 사는 우리들은 선열들의 의혈로 새겨진 항일의병전쟁의 역사를 얼마나 기리고 추모하고 있는가.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의병전쟁의 역사를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또한 국가와 국민은 이제라도 의병전쟁에 참전했던 수많은 의병과 가족들에게 그 업적에 합당한 예우와 보상 - 그분들이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할 것이다.


1905년 을미의병과 1907년 정미의병,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1915년 최후의 의병들이 구국의 제단에 목숨을 바치는 순간까지, 이십여 년 동안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일본침략자들에 맞서 총칼을 들고 투쟁했던 30만 의병, 그리고 수많은 가족과 후원자들의 피눈물로 새겨진 희생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렇게 엄혹했던 의병전쟁에 참전한 의병들이 독립된 나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표창과 훈장이 추서된 선열은 2천 7백 14명(2021년 11월 현재)에 불과하다. 의병전쟁 참전유공자의 0.9%만 국가가 공로를 인정한 부끄러운 현실이 오늘도 진행 중인 것이다. 의병전쟁에서 산화(散華)하신 선열들은 말이 없고, 산 자들은 역사적 사실을 축소하면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혹자들은 말한다. 의병전쟁은 이미 100년이 지나 그 당시 역사를 증언할 사람도 없고, 1945년 패망한 일제가 서류를 폐기하거나 불태웠기에 그 당시 자료가 부족하여 공적을 발굴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또한 한국전쟁 와중에 불타거나 폭격에 소실되었기에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변명한다. 그 사실을 얼추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의병전쟁에 참전했던 30만 의병과 가족, 후손들에게 국가는 책임과 의무를 다했다고 할 수가 있는지를 냉철하게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고종황제와 조정은 이미 민족의 의사를 대변할 자격과 능력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일본과 대적할 의사를 갖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그러한 결정을 내릴 용기조차 없었다. 그러한 국난시기에 민족의 의사를 결정하는 주체는 유명무실하고 형식적인 왕실과 관료가 아니라 민중(국권수호 의지를 가진 대다수의 국민)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일제 침략에 항거한 의병활동이 대한제국 시대 국권수호운의 주류를 형성했고, 의병의 의지가 민족의 정의와 애국정신을 대변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 의병투쟁이 민족의지를 가장 강력하게 표출한 성격의 국민항쟁이라고 볼 때 우리는 이제 의병운동 운운하는 것을 걷어치우고 마땅히 ‘의병전쟁’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 시대의 진실은 그곳에 있다


1907년 9월, 정미7조약이 체결되고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는 망국적 치욕을 당하자, 임진강 유역의 적성, 연천, 마전, 삭령 등을 근거지로 허위, 왕회종, 김진묵,연기우 등은 경기의병진을 창설하고 이인영, 이은찬, 이구채 등의 대한관동창의군, 이강년 호서창의진 등과 통합하여 13도창의군 연합의진을 결성하였다.

1907년 9월 25일, 대한매일신보는 서울진공작전에 앞서 대한관동창의대장 이인영이 각국 공사관과 해외동포들에게 보내는 격문(檄文)을 보도하였다. 

일본의 불의(不義)를 성토하는 의병은 순연(純然)한 愛國血團이니 

列强도 차(此)를 國際公法上의 전쟁단체로 認하며 

又 正義人道를 주장하는 國의 同聲應援함을 

바라노라.


당시 13도창의군은 의병봉기의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의병진이 국제공법상 전쟁단체로서 일본과의 전쟁을 선포했던 것이다. 


정미의병 당시 경기북부의병의 활동 중심지는 임진강 유역과 감악산 일대였다. 1907년 10월 허위, 연기우 등은 연천 심원사를 근거지로 항일의병전쟁을 전개하고 있었고, 김수민 의병 300여 명은 11월 17일 장단군 솔량리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1908년 1월 29일, 13도창의군 연합의병은 서울진공작전을 개시하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 양주군 수택리(현재 구리시 수택동)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경남 거창 출신의 양반 유생으로 허위의 친구이자 동지였던 김훈은 1907년 9월 허위 의진에 가담했다가 11월에 이인영 의진에 합류하여 참모장으로 활동하며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했던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군사장은 모든 의진(義陳)에 전령하여 일제히 진군을 재촉해서 동대문 외곽으로 나아가니 대군(大軍)은 장사(長蛇)의 세(勢)로 천천히 진격하게 하고, 허위 군사장이 감사병(敢死兵 ) 3백 명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 진을 치고서 전군의 집결을 기다려 일거에 경성을 공격해 쳐들어가기로 계획하였다. 하지만 전군의 래집(來集)은 시기를 어겼고, 일본군이 졸지에 공격하여 오는지라 여러 시간을 격렬히 사격하다가 후원군(後援軍)이 이르지 않아 퇴진(退陣)하고 말았다. 


13도창의대진소 지도부와 전국에서 집결한 의병부대들과의 연락이나 연합작전이 원활하게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다. 여러 의병부대의 연합작전이 총대장 이인영과 군사장 허위 등의 의도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과정에서 최전선에 투입된 선발대는 후발 의병부대가 약속한 기일 안에 도착하지 않았기에 일본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결국 퇴각하게 된 것이다. 서울진공작전은 이렇게 실패로 끝났지만, 의병전쟁은 결코 끝난 것이 아니었다.


경기북부의병의 해방구, 

적성 감악산


서울진공작전(1907년 11월~1907년 12월:양력 1908년 2월 초순)이 좌절된 후 군사장 허위는 적성 감악산을 근거지로 삼아 임진강 유역에 다시 모인 의병들을 수습하여 1908년 3월 관동창의원수부를 조직하였다. 


원수부의 총대장은 허위 또는 김수민이었고 선봉장은 김교성, 좌군장은 정용대, 우군장은 윤인순, 중군장은 이은찬, 참모장은 홍원유 등이었다. 임진강 유역과 감악산 일대에 활동을 재개한 허위는 왕회종, 연기우, 김진묵, 박종한 등의 의병장들과도 긴밀히 연락하며 의병부대를 재정비하였다. 그리고 감악산 일대에 분산하여 주둔하고 있는 의병들의 민폐를 근절시키는 한편, 지역민들에게 세금을 납부하지 말 것과 미곡의 역외 반출을 금지시켰다. 


1908년 3월부터 임진강과 감악산 일대는 항일의병들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며 납세거부, 방곡령 등 군정(軍政)을 실시했던 경기의병의 해방구(解放區)였다. 그들은 주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군수물자의 공급과 비축에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의병의 모집과 군사훈련, 무기와 화약의 구입, 서울의 정세 파악 등 제2차 서울진공작전을 준비하였다. 


창의원수부 연합의병진이 활동했던 임진강(臨津江)은 함경남도 마식령 산맥에서 발원하여 강원도 북부를 지나 연천군에서 한탄강과 합류하고, 황해도와 경기도 파주시 성동리 사이에서 한강으로 유입되어 서해로 흘러드는 강으로 길이는 254㎞이다. 그리고 의병 주둔지 감악산(紺岳山)은 높이가 674m로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양주시 남면, 연천군 전곡읍에 걸쳐 있으며, 경기 5악(五岳) 중의 하나로 정상에서는 임진강과 개성의 송악산 등이 조망되며, 임꺽정봉의 산세 또한 수려하다. 바위 사이로 검은빛과 푸른빛이 동시에 흘러나온다 하여 감악산이라 불렸으며 이 일대는 광활한 평야지대로 삼국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였다.


제2의 서울진공작전을 준비하다


신용하의 연구논문 ‘허위 의병부대의 항일활동’에 따르면 허위는 엄격한 군율을 정해 민폐가 없도록 했고, 의병전쟁의 군비를 조달할 때에는 군표(軍票)를 발행해 뒷날 보상해 줄 것을 약속했다. 그 결과 주민들은 의병부대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항일의병전쟁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감악산 일대 훈련장에서 군사를 훈련하고, 군기(軍器)를 제조하고, 납세(納稅)를 명하고, 미곡(米穀) 반출하는 것을 금하는 방곡령을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방곡령은 중앙정부나 지방관이 풍흉과 기후의 변화에 따라 곡물이 타 지방이나 외국으로 반출되어 가격이 급등하는 것을 막기 위해 판매와 유통을 통제하던 정책이다. 정미년 당시에 왕실과 조정은 이미 통치력을 상실했고, 일제의 통감부가 조세와 미곡반출 등을 주도하였기에 의병들은 지역주민을 위한 납세거부와 미곡반출 중지 등의 활동을 적극 전개했던 것이다.


임진강 유역에는 허위를 비롯하여  김수민, 김진묵, 연기우, 왕회종, 조인환, 하상태 등이 이끄는 의진이 활약하게 되었고, 경기도 가평, 강원도 인제 방면으로 나아갔던 13도창의진 호서창의대장 이강년 의진, 김연성, 성익현, 정경태 등이 이끈 의진은 본거지였던 강원과 경북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때 관동의진 중군장과 13도창의진 직할대인 창의원수부 중군장을 맡았던 이은찬은 원수부 의진을 이끌고 임진강 유역으로 와서 그곳에서 활약하던 의진들과 연합하여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렇다면 임진강 유역에서 활동했던 수천 명의 의병들이 장기간 지속적으로 의병전쟁을 전개하며 일본군과 전쟁을 치를 수 있도록 적극 지원했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의병은 국가로부터 지원도 없고, 그야말로 스스로 군비를 마련하고, 스스로 생존하며 싸워야 했기에 지역민의 협조와 지원은 생존의 제일요소였던 것이다.


창의원수부 의병진의 군량, 의복, 무기, 탄약 등 조달은 마치 의병들이 강제로 군자금을 모금하거나 물자를 강탈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많은 지역사람들이 의병들을 진심으로 지원했기에 그들의 활동이 가능했던 것이다. 


임진강 동남쪽에 있는 적성군 감악산은 산세가 깊어 의병들이 밀영을 세우고 주둔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그 당시 적성읍내 소재지는 현재의 파주시 적성군 구읍리였다. 지금 향교가 있는 곳의 맞은편에 적성관아가 있었고, 권준 의병이 습격하여 소작문서를 불태웠던 곳으로 현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향교만 덩그렇게 남아 있다.


경상도 구미 임은동 출신인 왕산 허위가 어떻게 경기도 감악산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강력하게 전개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성균관 박사로 재직할 당시 유생들을 함께 지도하며 교분을 쌓았던 경현수, 경문수 형제의 지원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감악산 관동(館洞)은 성균관에서 유생을 지도했던 오암 경현수 집안, 청주 경(慶)씨들이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지역으로 오늘날까지도 후손들이 살고 있다. 


오암 경현수는 고려 무신 경대승의 후예로 1898년 초에 건의소청(建議疏廳), 10월 6일에 성균관도약소를 만들어 상소운동을 통해 반침략, 반외세운동을 주도하였고, 1905년 을사늑약 무효화와 의병투쟁을 전개하여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 독립지사이다. 경현수는 아우 경문수, 경민수와 함께 창의원수부 연합부대 허위 의병, 김수민 의병, 연기우 의병 등에게 감악산 일대 자신들의 소유지 임야와 토지를 주둔지와 훈련장으로 제공하였을 뿐 아니라 13도창의군 막료장으로 참전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경현수 형제들은 적성군 지방 유지들과 유림, 지역주민들을 설득하여 수천 명에 이르는 창의군의 군량미와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1908년 4월, 의병특사로 청국 혁명당에 밀파되어 조선의 국내실정과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고, 의병에 대한 군사원조를 강력하게 요청하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일제에게 재산을 몰수당하고, 몇 백 년을 살아온 고향을 등지고 떠나야 했던 경현수가 지은 가사(歌辭) 관동이별곡(館洞離別曲)이 그의 문집에 전해 오고 있다.


창의원수부를 이어받은 이은찬, 연기우, 윤인순, 정용대 등의 의병장은 임진강 일대에서 계속 의병전쟁을 이끌어 갔다. 수원진위대 강화분견대의 부교(副校)로 활동하다가 1907년 8월 기의한 연기우는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에서 활동하였다. 일본군이 1개 소대에 이어 2개 중대를 파견하여 의병을 진압하기 시작했지만, 연기우(延基羽)는 불굴의 항일정신으로 고양군 구파발 흥국사를 근거지로 삼고, 고양과 적성, 마전, 삭령군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당시에 연기우 의병장의 이름으로 고지되었던 격문의 내용을 보면 일본군의 토벌을 비웃기라도 하듯 방곡령을 발하는 의병군정(義兵軍政)의 상황이 아주 잘 나타나 있다.


의병전쟁에서 순국한 영혼을 

기림은 산 자들의 의무


일제의 침략자들과 목숨을 걸고 싸웠던 의병들의 위대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군사력을 앞세워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을 일제식민지로 병탄했다. 그러나 섬나라 오랑캐들과 같은 하늘 아래 함께 살아갈 수가 없었던 민중들의 최후 항전, 의병전쟁은 삼천리강토에서 끝나지 않았다. 대한제국의 왕과 신하, 약삭빠른 위정자들은 일제에 굴복했을지라도 민초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들의 나라를 결코 빼앗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수많은 의병들의 피와 눈물이 젖어 있는 전투지에는 초라한 팻말 하나 서 있다. 이 나라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이 팻말을 보면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의병이 되라고 가르칠 수 있을까.


일본군의 무자비한 ‘남한대토벌작전’ 후에도 의병투쟁의 중심지였던 경기, 황해도 지역은 이진용 평산의진의 한정만, 공태원, 최순거, 채응언 등의 의병들, 조선창의존양군 연기우 의병진이 서로 연합과 분산을 하며 신출귀몰한 게릴라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때로는 義로써, 때로는 血로써 이 강토를 적시며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고 또 싸웠다. 


나는 무심의 들판에 외로이, 초라하게 서 있는 유적지 팻말을 구슬피 바라보며 지난 십여 년  동안 국내외 항일역사유적지를 답사한 작가로서 한없이 부끄럽고 북받치는 슬픔을 억제할 수 없었다. 이곳에 내가 기념비 하나 세울 수 있다면, 어느 무명용사의 절규처럼 이렇게 새겨놓고 싶다.


우리가 국권수호전쟁에서 싸우고 또 싸우다가 거룩한 전사를 하여 살이 썩고 뼈가 들판에 드러나고, 살과 가죽이 왜적의 창끝에 발리어져도 동포여! 형제여! 슬퍼하지 마라! 우리는 사랑하는 조국의 땅에 묻히니 우리들의 피가 강토에 스며들어 옥토가 되고, 우리들의 영혼이 역사가 되어 우리의 아들딸들에게 전해져 죽은 영혼을 깨어나게 하리라.


의병! 당신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습니다 


의병전쟁의 영웅들은 삼천리강토에 피를 적시고, 대한의 하늘에 외로운 영혼이 되어 우리의 후손들이 자신의 영혼을 다시 깨어나게 하길 기다리고 있다. 또한 오늘, 이 대한민국이 진정 기림과 추모로 다시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으리라. 


의병의 義와 血이 그렇게 아로새겨진 의병충혼탑의 외침은 오늘도 허공을 맴돌고 있을 뿐, 추모의 울림, 메아리조차 사라져버린 대한민국의 산하를 울리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의병의 고귀한 충혼(忠魂)은 아직도 삼천리 산줄기, 이름 없는 골짜기에 무명, 무훈의병으로 떠돌고 있다.   


필자 최범산

1986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한국문인협회 및 한국소설가협회 회원 등 현재 순국선열교육원장으로 있다. 최 작가는 잊혀지고, 훼손되고, 버려진 북간도 지역 항일독립전쟁의 유적을 십여 년 동안 답사하며 독립투사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새겨진 유적들을 찾아 기록하고 카메라에 담았다. 역사가 바로 서고, 진실하고 올바른 사람들의 세상을 위해 그는 간도지역 항일유적의 생생한 기록과 현장사진을 묶은 항일독립전쟁 유적답사기 『압록강 아리랑』 『두만강 아리랑』 두 권의 책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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