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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 역사기행 [2020/06] 순국선열 역사기행 - 제주 평화박물관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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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인권 유린과 침략 전쟁의 현장 

자유와 평화는 공짜가 아니다. 


글 | 강미경(시인, 여행작가)


아름다운 제주도는 대한민국의 보물섬이다. 많은 이들이 아름다운 제주도를 보기 위해 방문하고 있지만, 이곳에는 아름다움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웅장한 한라산을 모태로 한 수많은 기생화산 오름들에는 일제 침략군들이 제주도 양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파놓은 동굴 진지들이 산재해 있다. 파도가 넘실대는 아름다운 해안마다 고사포 진지 동굴이 입을 벌리고 있다. 평화박물관은 직접 동굴 진지 구축을 위한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던 아버지의 아픈 과거를 파헤친 어느 아들의 집념으로 탄생하였다. 이 평화박물관을 통해, 오늘 누리는 우리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여야 하는지를 성찰하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제주도는 낭만의 섬이다. 제주도에 스무번 넘게 다녀오는 동안, 섬 전체가 환몽적인 곳이라고 생각해왔다. 둘레 길을 걸으면서 철썩이는 파도를 보면 외국 어딘가에 와 있는 느낌이 든다. 해외로 멀리 가지 않아도, 김포에서 비행기로 50분이면 이국적인 제주 섬에 내릴 수 있다. 어떤 때는 완도에서 페리호를 타고 제주도에 간 적이 있다. 오메기떡이 맛있는 섬이다. 어떤 때는 부산 여행을 갔다가 김해공항에서 제주에 간 적도 있다. 제주갈치와 옥돔, 전복해물탕도 맛깔나다. 성게미역국이나 보말미역국도 일품이다. 제주도의 돼지고기 맛은 육지의 것과 다르다. 이렇게 맛과 풍미가 넘치는 제주도인줄만 알았다. 

 

아름다운 여인의 이면에 감추어진 너무나 아픈 상처들

 몇 년 전, 제주도를 찾았다가 우연히 보게 된 해녀박물관, 그곳에서 해녀들의 애환을 보게 되었고 해녀들이 일본에 당한 착취를 알게 되었다. 기행답사기를 써서 여러 군데 발표를 했다.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누를 길 없어 시를 써서 발표를 했다. 그리고 제주의 상처를 덮고 외면하고 싶었다. 그러나 제주도 조천만세운동과 무오 법정사 만세운동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다시 제주도를 찾지 않을 수 없었고 써야했다. 그래야 맘이 편해질 것 같았다. 모르고 있었다면 모르지만, 알게 된 이상 외면하고 쓰지 않을 수 없는 게 작가 정신일 테니까. 

 거기까지인 줄 알았다. 그런데 서울에 와서 글을 써서 마무리하다보니 모슬포 알뜨르 비행장과 격납고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일본이 중일전쟁을 준비하면서 제주도를 병참기지화 했다는 것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제주도의 아픔은 거의 다 다루었다고 여겼다. 제주도를 잊고 싶었다. 예쁘게 화장한 여자의 얼굴 뒤에 감추어진 상처투성이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은 심정 같은 것이었다. 

 일본이 할퀴었던 상흔이 제주도 여기저기에 산재해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안다. 모르는 이들은 제주 섬에서 낭만만을 낚시질하여 그들의 추억바구니에 담아오곤 할 것이다. 알수록 아픈 섬 제주도. 그곳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겨울 한 해군 대령에게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강 작가님, 제주도에 관해 글을 많이 쓰셨던데, 평화박물관에 가보셨어요? 그곳에 꼭 가보셔야 합니다. 꼭!" 

 "일제 때, 강제 동원되었던 제주도민 이성찬 옹의 아들이 아버지의 유언을……." 

 '아직 쓸 것이 더 남아있나?' 하는 생각으로 제주도 평화박물관에 대해 검색을 하며 몇 달 동안 공부를 하며 여행길이 열리기를 기도했으나 쉽게 열리지 않았다. 아니, 다른 지역으로 여행길이 더 먼저 여러 군데로 열렸기에 제주도로 가는 문은 닫아두었다. 

그러던 중, 지난 9월에 그곳을 일주일을 간격으로 연달아 2번이나 방문할 길이 열렸다. 처음 방문했을 때, 그곳 문화해설사는 목소리를 높여 강조했다. “이 땅의 평화에 대해서.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를…. 자유와 평화는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닌 것을” 


일제 동굴진지와 이성찬 옹의 절규, 그리고 평화박물관

이날 설명을 듣다가 평화박물관에 대해 글을 쓰려고 취재차 왔다고 했더니,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해설사 선생님은 박물관 관장을 불러주었다. 관장님을 만나 2시간이 넘게 인터뷰를 하면서 여러 가지 사실을 더 알게 되었다. 이영근 관장은 자신의 부친 이성찬 옹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박물관을 만들었다고 했다. 

 이성찬 옹(2008년 90세로 타계)은 해방될 때까지 가마 오름 동굴진지에 강제 동원되어 노역에 시달렸다. 1943년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 2년 반 동안, 이 옹은 동굴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올 수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강제 노역을 해야 했고 밤에도 동굴에서 쭈그리고 자야했다. 먹은 것이라곤 하루에 누룽지와 주먹밥 한 덩어리가 전부였다. 그에겐 정당한 노동의 대가가 주어질 리 없었다. 나라를 빼앗긴 백성은 인권도 짓밟히는 모양이다. 급료 한 푼 받지 못하고 강제로 동굴 속에서 땅굴을 파야했다. 거역하면 채찍에 맞았고, 일본은 총을 쏘아댈 거였다. 그렇게 해서 죽는 노동자들을 일본은 명이동 새물통 근처에서 공개적으로 불에 태웠다. 반항하면 불에 태운다는 걸 보여주는 일본의 계책이었다. 급료를 줄 테니 열심히 땅굴을 파라는 말은 있었지만,  쌀 한 톨도 주어지지 않았다. 일본이 패망하고 제주 섬을 떠나면서 남은 쌀 2되씩 나눠준 게 전부였다. 2년 반 동안 감금되어 노역에 시달린 대가가 쌀 2되였다. 

 일본이 도망간 후, 동굴에서 나오자 이성찬 옹은 바로 실명(失明)을 했다.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했으며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한 탓에 눈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잃은 것은 시력만이 아니었다. 삶의 희망을 잃었고, 일자리를 얻을 수도 없었다. 그의 맘에 깊이 박힌 상처와 어둠에 대한 공포는 전쟁에 대한 진저리를 내게 했고, 잠꼬대처럼 아들 이영근 씨에게 주문을 했다. "이 억울한 사정을 알리라"는 것이었다. 이영근 씨가 못하면 손자에게라도 시켜서 알리라는 것이었다. 

 이영근 씨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학교 급사를 하면서 중학교도 간신히 다녔다. 그가 화물차나 트럭 운전을 하면서 어려운 생활을 했지만, 아버지의 요청은 저버릴 수 없는 숙제처럼 그를 눌렀다. 이영근 관장은 화물차 운전을 하면서, 남의 집 이사 쓰레기 짐 속에서 버려진 유물들을 주워 모았다. 일제 때의 물건인 책, 작업복, 군복, 각반, 물통, 탄약상자, 수류탄, 포차바퀴, 측량기, 대동아공영 휘호, 무기, 사진기, 동굴 속에서 사용했던 곡괭이, 삽, 조명기구 등…. 그리고 이영근 관장은 마흔 살이 넘으면서부터(1996년부터) 가마 오름 부근의 산과 부지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화물트럭 운전을 하여 모은 전 재산과 은행 빚까지 들여서…. 이영근 관장과 인터뷰를 하다 보니, 그는 가슴에 맺힌 것이 많은지 쉬지 않고 이야기를 털어내었다. 이야기에 이야기를 이어 밤을 새워서 들어도 모자랄 것 같았다. 9월인데도 제주도의 바람은 차가왔다. 옷깃을 여미어야할 정도였다. 

 그런데, 인터뷰를 마치고 동굴 진지를 둘러본 뒤 서울로 올라온 뒤에 내게 문제가 생겼다. 사진을 모두 전담하다시피 찍었던 친구에게 연락이 온 것이다. "찍어온 사진들이 모두 날아갔다" 고 했다. 다시 내려가기로 했다. 내 사진기에 담아놓은 것만 한 장 있을 뿐…. 글을 뒷받침해줄 만한 사진이 넉넉해야 하는데 사진이 없어졌다면 다시 가야하는 것이다. 우리는 1주일 만에 다시 그곳을 찾아갔다. 이영근 관장에게 더 물어볼 말들을 생각하며 그 곳을 다시 찾았다.

 그게 2016년 9월말의 일이다. 그날따라 제주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제주 의병탑(사라봉 모충사)과 조천만세운동 기념관, 김만득 생가들을 둘러보는 내내 비를 맞아야 했다. 비를 맞은 탓에 생쥐머리가 되어버린 나는 오슬오슬 떨면서 다시 서쪽에 있는 평화박물관을 고집스럽게 다시 찾아갔다. 

 "알아야 하니까, 알아내야 하니까. 그리고 알려야 하니까"

 내 개인적인 욕심대로라면, 비를 맞은 몸을 말리고, 따뜻한 허브 물에 발을 담가 피곤을 풀고 싶은 마음 간절했으나, 제주도 중문단지에서 모충사로 모충사에서 다시 제주 섬의 서쪽으로 다시 달려갔던 것이다. 그날따라 머리카락이 긴 것이 후회스러웠다. 머리가 짧으면 비어 젖어도 금방 마를 테지만, 긴 머리는 그렇지가 못하다. 마찬가지로 아픔이 길면 그 아픔을 씻어내는 데도 시간이 길게 걸릴 것이다. 


일제 병참기지화에 동원된 제주도민의 아픈 역사 간직

가마 오름은 가마솥을 거꾸로 엎어놓은 것 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오름의 이름이다. 제주 368개 오름 중에 하나로 제주시 한경면 청수리에 있다. 이 오름에 이렇게 일제가 땅굴 진지를 판 이유가 무엇일까? 그곳엔 사령관과 작전회의실, 군수품보관소로 쓰인 흔적이 남아있고, 아직도 동굴 천정에는 곡괭이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모슬포 알뜨르 비행장에 작전명령을 내리는 지하 비밀 요새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또한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이 괌과 사이판을 점령하고 필리핀 마닐라를 탈환한 뒤 오키나와 섬까지 점령하자 일본은 겁을 먹기 시작한다. 미국이 제주도와 일본 본토까지 상륙할 것에 대한 예측 불안심리가 작용하여 일본 본토 사수작전을 세운 것이다. 미국이 일본에 상륙할 때 제주도에서 이를 막겠다는 심산이었던 것이다. 중일 전쟁(1926~1937년 : 20만평, 1937~1945년 80만평)때 알뜨르에 비행장을 만들어 중국 침공의 병참기지로 삼았던 것에 대한 연장선에서 제주도는 그렇게 일본의 태평양전쟁의 전쟁준비 터로 사용되었다. 

 그 때 제주도민들이 강제로 부역에 동원되었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라를 잃은 백성은 영토에 이어 자유도 평화도 목숨도 시간도 모두 빼앗기는 것이다. 그렇게 제주도민들은 땅을 빼앗기고 산 깊숙이 동굴진지까지 만드는 데 활용되었다. 아니 시간과 마음과 청춘과 에너지를 모두 빼앗겼다. 아무런 평화로운 대가는 물론 없었다. 

 언젠가 <터널>이라는 영화가 한참 흥행을 한 적이 있다. 갑자기 터널이 무너져 그 속에 갇힌 한 남자의 고통을 코믹하게 그려낸 영화였다. 동굴 진지에 들어가서 진지를 살펴보는 내내 불안이 몰려왔다. '갑자기 이 동굴이 무너지면 어쩌나, 그러면 땅속에 함몰되고 말텐데….' 

 동굴 천정에서는 몽글몽글하게 뭉쳐진 석회석이 만져졌다. 손만 대어도 쉽게 부서졌다. 천정에서는 방울방울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햇빛 한 점 없었지만, 조명등 주변에는 작은 풀들이 자라고 있었다. 몇 년 동안, 동굴 속에 갇혀서 강제 부역에 시달려야했던 제주도 남정네들의 아픔과 한,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의 한숨이 들리는 것 같았다. 불안과 공포는 사람을 병들도 할 수 있고, 죽게도 할 수 있다. 그 동굴에서 얼른 빠져나가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갖고 밖으로 나오면서 내 표정은 어둡고 아플 수밖에 없었다. 

 동굴 작업이 적어도 1945년 해방이후에 종료되었을 테니, 75년 전의 일이다. 채 100년도 되지 않은 아픈 상처들. 제주도 368개 오름 중에서 120여개 오름에 동굴진지의 상처가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될는지 참 궁금하다. 제주도를 찾는 관광객들 중 외국인들이 이곳에 방문을 하면, 그들은 일본의 전쟁야욕과 인권유린을 느끼고 가게 될 것이다. 외국인들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후손들이 이 일을 알아야한다.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갖고 그들을 미워하기 위해 이 박물관을 둘러보아야 한다는 게 아니다. 

 

과거의 참혹한 전쟁 역사, 현재와 연결하는 통로로 활용 

 이글을 쓰는 나도 일본 문화와 음식을 좋아하는 하는 사람 중에 하나다. 일본 오사카나 도쿄, 하코네에 다녀올 때마다 나는 작은 동전 지갑을 사오곤 한다. 아기자기하게 수놓아져있는 수예품을 보면 마음이 포근해지기 때문이다. 음식도 깔끔하고 맛깔스러워서 난 일본 요리를 좋아한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본의 심미주의와 예술을 사랑하는 그들의 국민성을 좋아한다. 그러나 미국의 인류학자 N.베네딕트가 <국화와 칼>에서 지적한 대로 일본은 제국주의 침략의 근성인 칼의 침략 모순성을 갖고 있다. 그 칼에 베이고 상처입고 죽임을 당하고 짓밟혔던 우리 한국이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다. 우리 후손들에게 그 사실을 가르치고 일깨워야한다는 생각이다. 과거 역사를 바로 알아야 현재가 보이고 또한 미래를 예측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2006년 12월에 가마 오름 동굴진지를 중심으로 문화재청에 등록문화재 308호로 등록되었던 이 평화박물관이 일본에게 매각될 뻔했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거의 모르는 것 같다.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고 후손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만들어진 평화박물관이 일본에게 매각된다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이성찬 옹과 같은 한(恨)을 안고 돌아가신 선열들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실 것 같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많은 부채에 시달리며 은행 이자(한 달에 2,000만원이 넘는)에 압박을 받고 있는 이영근 관장에게 일본의 한 단체는 매각 의사를 비쳤다.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주겠다는 것과 이 박물관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전쟁유산)으로 등재시켜주겠다는 유혹과 함께였다. 전쟁의 칼 - 살인도구와 침략의 현장이 문화유산이 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일본은 이영근 관장에게 이 박물관을 사들여 증거인멸을 하든지, 아니면 전쟁의 정당성, 군국주의의 우월성을 내세우는 등 일본 편의를 위해 사용하려는 의도였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가마 오름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렸던 사람들 200 여명의 유언을 녹취한 자료들(60분 분량)과 진지 동굴을 파는데 사용했던 도구들(소장 자료)도 엄청난 가치를 갖는 것으로 판정되었다고 한다.(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판정 250억 정도)

 2013년 3월 가마 오름 동굴진지는 문화재청에서 매각해주었다. 일본의 손에 넘어가지 않은 것이 매우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매각 후 문화재청은 안전을 이유로 관람을 중지시키고 문을 굳게 잠가둔 상태다. 평화박물관을 방문하면, 관람을 허락하고 있는 동굴진지에 들어가 볼 수 있다. 동굴진지에 들어가 보면, 일본의 인권유린과 만행에 몸서리쳐지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을 겪어보지 않고 강제 노동의 시련을 당해보지 않은 나와 같은 세대들 - 우리 후손들은 우리 선열들의 고난을 1%라도 이해하고 공명(함께 공감하고 함께 아파하며 울어줌)해야 하지 않을까?

 오늘밤엔 제주도에서 사온 장미 허브 향을 생각하면서 평화를 위한 촛불을 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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