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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우리땅 [2022/03] 일제강점기 수탈의 관문, 목포 근대문화 역사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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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설움 속에서도 절개 지킨 항일의 항구도시  


‘목포의 눈물’ 강이 되고 바다 되어

마침내 더 큰 희망으로 돌아오다   


글 | 편집부 사진 | 한국관광공사 


호남선의 종착역에 내린다. 항구의 도시, 목포다. 군사적 요충지라 전쟁이 잦았고, 일제강점기 수탈의 관문이 되기도 했다. 도심은 유달산을 경계로 한국인과 일본인 거주 경계가 명확히 구분된다. 유달산 아래 들어선 일본영사관,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이 일제 침략의 첨병 역할을 담당했던 반면, 산 넘어 한국인 지역에서는 항일운동이 일어났다. 그 어느 지역보다 처절했던 역사를 견뎌오는 동안 ‘목포의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눈물이 강이 되고 바다 되어, 마침내 더 큰 희망으로 돌아와 한민족의 절개를 지켜주었다.  


유달산 남북으로 나뉜 ‘이중 공간’


목포(木浦)라는 이름은 서해로부터 영산강 물줄기를 거슬러 나주에 이르는 길목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바닷길이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예부터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고하도에서 군량미를 쌓아놓고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1897년 10월에는 부산, 원산, 인천에 이어 네 번째로 개항했다. 기름진 호남평야와 군사적 요충지를 일본이 가만둘 리 없었다. 목포는 호남의 수많은 곡물과 자원을 일제로 빼가는 수탈 창구가 되었다. 


개항 후 목포에는 외국인들을 위한 ‘각국공동거류지’가 들어섰다. 땅이 부족한 탓에 유달산 아래 바다를 매립해 조성했고, 바둑판 모양으로 도로망이 정비된 계획도시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각국’으로 시작했지만, 일제 강점으로 일본인 전관 거류지가 되었다. 반면 목포에 모여든 한국인들은 유달산 북쪽 무덤 자리에 터를 잡았다. 기본적인 시설조차 없어 매우 열악했다. 도로는 구불구불했고 비나 눈이 오면 진흙 속에 발이 푹푹 빠졌다. 여름이면 분뇨 냄새가 코를 찔렀다. 유달산을 경계로 남과 북이 한국인과 일본인의 거주 공간으로 확연하게 차별화된 ‘이중 공간’이었던 셈이다. 


목포의 상징인 유달산 남쪽, 그러니까 일본인들이 살았던 도심에는 근대 개항도시의 특징이 그대로 남아있다. 덕분에 2018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개별 건물이 아닌 지역 전체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첫 번째 사례로 옛 일본영사관, 옛 동양척식회사 목포지점, 유달초등학교 강당 등 기존 문화재와 함께 일제강점기 주요 관공서 등 근대건축물들이 백 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게 해준다. 


호화 건물에 깃든 민족의 애환


목포 구시가에는 근대사를 대표하는 두 장소가 있다. 옛 목포 일본영사관과 옛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이다. 두 곳은 현재 목포근대역사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곳을 돌아보고 나면 구시가 곳곳에 남은 근대건축물이나 근대사의 흔적을 더 익숙하게 느낄 수 있다.


붉은 벽돌로 지은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 옛 목포 일본영사관이다. 1900년 지어진 목포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일제의 정치적 본거지였다. 건물 외벽과 내벽 곳곳은 일본을 상징하는 욱일기와 벚꽃 문양으로 장식돼 있다. 유달산 기슭 명당에 자리 잡아 목포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영사관이 자리 잡은 뒤 일제는 목포역과 함께 사방으로 도로를 건설하고, 인근에 우체국과 경찰서, 법원, 상공회의소 등 각종 행정기관을 설치했다. 이 일대가 목포 근대사에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된 까닭이다. 


목포근대역사관 1관으로 이용 중인 이곳은 일본영사관 건물답게 호화롭다. 2층으로 오르는 나무 계단과 화려한 샹들리에가 마치 잘 꾸며진 세트장에 온 듯하다. 식민지 땅에서 호의호식했던 그들을 상상하니 분노와 서러움이 파도친다. 이곳은 아이유와 여진구 주연의 드라마 ‘호텔 델루나’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전시관은 1층에서 2층으로 이어진다. 전시실로 꾸민 방에는 애환이 담긴 유물과 자료 100여 점이 있다. 1930년대 일제 동양척식주식회사 직원들이 사용한 토지 측량기를 비롯해 당시 부유층들이 썼던 축음기, 나무 냉장고, 대리석 벽난로 등이 눈길을 붙든다. 


건물 뒤편엔 일제가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전쟁에 대비해 만든 방공호가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굴을 파는 데 강제 동원된 목포 주민들의 비참한 모습이 재현돼 있다. 36년간 내 땅에서 식민지 노예로 살아야 했던 민족의 한을 어찌 잊을까. 방공호는 현재 목포근대역사관의 전시유물을 보관하는 수장고로 이용 중이다.


잔혹한 시대 처참한 나날들


목포근대역사관 1관 계단을 내려와 도로에 있는 푯돌을 유심히 살펴보면 ‘국도1·2호선기점’이라고 새겨진 글자가 보인다. 국도1호선과 2호선이 출발한 지점이자, 한국 도로 역사의 기념비적인 장소다. 국도1호선은 목포에서 광주, 전주, 익산, 공주, 수원, 서울을 지나 개성과 평양을 거쳐 신의주까지 한반도를 관통하는 939km 도로다. 더 멀게는 중국을 거쳐 유럽으로 뻗어갈 수 있는 유라시아 횡단도로의 시작점이다. 국도2호선은 목포에서 강진, 순천, 진주 등을 거쳐 부산까지 대한민국 남쪽을 잇는 도로다. 


여기서 모퉁이를 돌면 목포근대역사관 2관이 나온다.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으로 사용되었던 이국적인 석조 건물은 국내에서 가장 많은 소작료를 거둔 일제 수탈의 상징적인 장소다. 현재 건물 1·2층은 일제강점기 시대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사진 자료로 채워져 있다. 대부분 목포의 옛 모습과 일제의 만행을 보여주는 장면인데, 그중 몇몇은 너무나도 잔혹해 경고 문구가 따로 붙어 있을 정도다.


1층 계단 옆에는 당시에 쓰던 대형 금고가 그대로 남아 있다. 육중한 철문 뒤에 자리한 커다란 방은 한때 모두 금으로 채워져 있었다고 한다. 광복 뒤에는 해군 헌병대의 유치장으로도 사용됐다. 2층에는 조선왕조 최후의 모습과 빼앗긴 조국, 침략자 일본, 일제의 아시아 침략 등을 주제로 한 사진들이 아픈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구시가로 가면 외세의 경제적 침략에 대항해 국내 최초로 설립된 민족자본 은행 건물이 있다. 현재 목포문화원으로 쓰이는 옛 호남은행은 조흥은행의 전신이며, 목포에 남은 유일한 근대 금융계 건물이다. 남교소극장으로 사용했던 목포청년회관은 1925년에 세워진 건물로 2002년 9월 국가등록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됐다. 일제강점기 목포 청년들의 항일운동 근거지였으며, 『조선청년』이란 잡지를 발행한 역사적인 장소다. 이외에 식당이나 잡화점 등이 자리잡은 구시가 곳곳의 가옥에도 근대사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있어 거대한 역사박물관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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