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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 역사기행 [2022/04] 스코필드의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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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외면한 진실 앞에

‘동정심’의 렌즈를 들이대다


글 | 강소이(시인, 여행작가) 


1916년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와서 세균학과 위생학을 가르치던 의학 교수. 우리나라 사람도 아닌데, 어떤 이유로 서울역에서 기차에 자전거를 싣고 화성까지 찾아왔을까? 그리고 불에 타서 폐허가 된 제암리와 수촌리 화수리 사진을 찍고, 불에 타서 죽은 사람들을 모두 모아 공동묘지에 묻어주었을까? 살아남은 사람들을 며칠씩 찾아가서 치료해주고 위로해주었을까? 다리도 불편한 소아마비 환자가. 21세에 소아마비에 걸려서 왼손과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어 지팡이를 짚고 다녔던 사람. 성한 왼쪽 발에 힘을 주어 한쪽 발로 자전거를 타고 제암리를 찾아왔던 그 사람. 그 사람은 왜 그런 일을 했을까?  


6년 만에 화성시 향남면 향남읍 제암리를 다시 찾았다. 여전히 공기도 맑고 조용한 시골 마을. 봄에는 복사꽃이 뒷산에 흐드러졌다고 했다. 몇 년 전 이곳을 찾았을 때는 모내기 전이라 논들이 황량했다. 지금도 제암리 3·1운동 기념관 앞에 너른 들판–논에는 겨울의 쓸쓸한 바람만 불고 있었다. 기념관 앞으로 뜰이 넓다. 그 오른쪽에 민가 몇 채가 있고 도로 건너편은 들판이다. 저 멀리 아파트촌도 보인다. 지금부터 103년 전에 이곳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지나는 구름과 바람만 기억하고 있을까? 기념관 왼쪽으로 제암리 교회가 있다. 기념관에서 나와 오른쪽 계단을 올라가면, 24위의 합동 묘가 있다. 

 

내 뒤통수를 한 방 때리는 

자전거와 스코필드 동상


1919년 4월 15일 제암리 교회에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창문으로 총을 쏘아 대었다.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밖에서 나무문에 못질하고 교회에 불을 질렀다. 그 당시는 초가지붕이었던 교회에 불이 붙었고, 안에 있던 사람들은 한 사람만 구사일생 탈출에 성공했고, 나머지 모두 불에 타 죽었다. 


지난해 겨울, 다시 제암리 순국기념관에 찾아갔다. 이번엔 서부간선도로를 타고 화성을 통해서 쉽게 갈 수 있었다. 자동차 바퀴는 1시간 10분 만에 6년 전 제암리 방문의 때로 나를 데려다 놓았다. 코로나19가 엄중한 시기라 기념관을 둘러볼 기대도 하지 않은 채, 기념관 마당 오른편에 있다는 스코필드 박사 동상을 보며 주변을 둘러보는 게 이번 여행의 목적이었다. 6년 전 방문 때는 설치되어 있지 않은 조형물이다. 1919년에 희생된 24분의 선열들을 형상화한 청록색 조형물과 3·1운동 순국기념탑, 24위 공동 묘만 있었다. 묘 앞에서 묵념하면서 묘역으로 올라가는 돌계단과 주변에 태극기가 휘날리는 것을 보았던 기억이 있다. 6년이 흐른 이번 여행에도 변함없이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다. 묘 앞에서 ‘꽃 한 송이’ 가져오지 못한 정성 없음을 한탄했었는데, 이번에도 꽃집을 찾지 못하고 그냥 빈손으로 간 게 송구할 뿐이다. 그리고 6년이라는 시간을 돌이켜 본다. 

 ‘여기를 다녀간 이후에 독립운동가들에 관한 글을 써서 연재를 계속해 오고 있고, 관련 저서를 두 권이나 냈다. 다른 역사유적지 수필도 한 권, 시집도 한 권 냈으니, 열심히 살았다. 만약 6년이 지난 다음에 이곳을 다시 방문하게 된다면, 그때 나의 주소는 어디에 있을까? 힘들더라도 「독립운동가 숨을 만나다」 책을 계속 써서 시리즈로 4권이나 5권쯤을 출간한 관록 있는 작가가 되어있을까?’ 


유적지를 찾아다니고 그 유적지나 선열에 관한 서적을 구해 읽고, 사진이 미비하면 몇 번씩 다시 찾아가고……. 한 꼭지 글을 마무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제 손을 놓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런 내 뒤통수를 한 방 때리는 자전거와 스코필드 동상. 


그날 따라 매섭던 날씨도 풀려서 포근한 햇살이 내리고 있다. 겨울 하늘은 맑았다. 사진을 찍는 내내 부신 햇살이 성가시기만 하다. 하나의 주조물에 불과한 높은 콧날의 스코필드 동상과 자전거. 카메라를 목에 걸고 어딘가를 노려보는 서양인 형상의 주조물. 사진 속에서 보았던 삐쩍 마른 체구의 그 사람. 조형물에도 혼이 깃들까? 해서 벼르고 별러서 찾아온 내게 호랑이 같은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하는 것일까? 


서울역에서 기차에 자전거 싣고 

화성까지 찾아온 까닭


제암리 학살 사건에 대한 일은 이미 6년 전에 썼으니, 익히 알고 있는 일이고, 그 일을 스코필드 박사가 [꺼지지 않는 불꽃]이라는 제목으로 원고를 썼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왜 그런 일을 했는지?’가 궁금한 것이다. 그는 의학도다. 자연과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매우 현실적이고 냉정하다. 실험과 검증에 의한 것을 좋아한다. 에비슨 박사의 초청으로 1916년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와서 세균학과 위생학을 가르치던 의학 교수다. 우리나라 사람도 아닌데, 어떤 이유로 서울역에서 기차에 자전거를 싣고 화성까지 찾아왔을까? 그리고 불에 타서 폐허가 된 제암리와 수촌리 화수리 사진을 찍고, 불에 타서 죽은 사람들을 모두 모아 공동묘지에 묻어주었을까? 살아남은 사람들을 며칠씩 찾아가서 치료해주고 위로해주었을까? 다리도 불편한 소아마비 환자가. 21세에 소아마비에 걸려서 왼손과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어 지팡이를 짚고 다녔던 사람. 성한 왼쪽 발에 힘을 주어 한쪽 발로 자전거를 타고 제암리를 찾아왔던 그 사람. 그 사람은 왜 그런 일을 했을까? 멍한 호기심을 갖고 『석호필, 민족대표 34 』이라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틀 만에 그의 전 생애를 송두리째 읽어냈다. 


스코필드 박사의 인생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려온다. 가난한 영국 초등학교 수학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위의 형과 누나들을 공부시키느라 재정적인 어려움이 많은 부친의 바람대로 대학 진학을 포기한다. 가축농장에서 몇 년씩 일했으나, 급료도 받지 못하고 노동력 착취만 당한다. 그 당시 영국 사회 풍토는 지나치게 이해타산이 밝았기에, 스코필드는 캐나다에 혼자 이민을 간다(1907년). 한 농장에서 일하여 대학 학비를 마련한다. 토론토 대학교 온타리오 수의과대학에 입학한다. 대학 2학년을 마치고 갑작스러운 신열로 병상에 눕게 된다. 소아마비에 걸려 있었다. 캐나다에 오기 전 영국에부터 몇 년간 심한 노동에 시달리며 제대로 먹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가난과 심한 노동이 부른 병이었다. 잠 잘 방, 세 끼 식사가 염려스러웠던 가엾은 스코필드. 가난과 고통을 심하게 겪어보았기에 어려운 사람들의 처지를 자기 처지처럼 안타까워하며 깊은 동정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된 게 아닌가 싶다. 한국에 와서도 제암리, 수촌리, 화수리 주민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했던 것은 청년 시절의 처절한 배고픔과 가난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다행히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온타리오주 보건국 세균학연구소 조수로 일하다가 <우유의 세균학적 검토>라는 논문을 써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게 된다. 세균학연구소 조수에서 기사로 승진하고, 온타리오 대학에서 세균학 강사로도 일한다(1914년). 스코필드가 한국에 온 것은 온타리오 대학에서 강의가 무르익을 무렵, 1916년이었다. 1920년 다시 캐나다로 돌아갈 때까지 4년 동안, 세브란스 의전 교수로 있으면서 그는 한국의 독립을 도왔다. 1919년 3월 1일, 3·1만세운동 때의 공헌이나, 1919년 4월 제암리. 수촌리, 화수리를 도운 일도 그의 젊은 시절이었다. 27세부터 31세까지였다. 그의 아내는 그의 선교사 일을 싫어했고, 조선에 적응하지 못했다. 해서 그녀는 한국에 온 지 1년 만에 캐나다로 돌아간다. 한국에서 3년을 혼자 지내면서 스코필드는 한국을 돕는다. 세브란스 의전에서 세균학과 위생학을 가르치는 것이 그가 한 일의 전부가 아니었다. 


힘없는 조선인들의 진실을

세상에 드러내다 


한국에 제암리 기념관 마당 오른편에 스코필드의 동상과 자전거가 있다. 목에 사진기를 걸고 바위에 앉아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다. 스코필드 박사가 아니었다면, 제암리 학살 사건이 그 당시 우리나라와 세계에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일본 경찰은 그들이 매수한 선교사를 통해서, 성질이 고약한 제암리 사람이 화재를 냈고, 바람이 심해서 다른 집에도 불이 번진 것이라고 거짓 조서를 꾸며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스코필드 박사에게 마을 사람들이 전하는 말은 달랐다. 일본 순사들이 성냥을 들고 다녔으며, 제암리 교회에 사람들을 모이라 했다는 것과 총소리를 그들은 들었다고 했으니…….


일본의 거짓 문서에 의해 그들의 만행이 덮일 뻔했다. 국권을 빼앗긴 힘없는 조선인들의 진실은 그렇게 묻힐 뻔했다. 총부리에 맞은 다리가 상처투성이인 조선인, 총에 맞은 짓무른 어깨의 화농 등……. 세브란스 의전에서 세균학과 위생학을 가르치는 의학박사의 소견은, 일본 순사들의 말과 달랐다. 


진실을 말하고 사진으로 남기고, 자신이 보고 들은 내용을 글로 써서 <서울프레스 The Seoul Press>에 [수촌리 만행 사건에 대한 보고]라는 글을 투고했다. 제암리 학살 사건에 관한 글은 너무 비참해서 조선인들이 그 사실을 알면, 반일감정이 고조될 터이므로, 모르는 게 좋겠다는 게 그의 의견이었다. 그리고 그는 298쪽이나 되는 분량으로 제암리 학살 사건에 관한 글을 썼다.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어떻게 죽었으며, 다친 사람들의 현상이 어떠했는지 며칠 동안 화성 제암리, 수촌리, 화수리에서 사람들을 고쳐준 이야기를 기록했다. 세브란스와의 4년 계약이 완료된 후, 그는 일본의 탄압으로 한국에 더 머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때. 298쪽이나 되는 원고를 며칠 동안 타이핑해서 사본을 만든다. 사본을 세브란스 지하 시멘트 바닥 속에 감춰둔다. 훗날 한국의 후손들이 발견하여 제암리 학살 사건에 대한 진상을 알게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원본은 무사히 캐나다로 가져갔지만, 영국 출판사 캐나다 출판사에서도 출판을 거절당한다. 일본의 만행을 세상에 알리는 일을 했다가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될 것을 두려워한 어떤 두려움들 앞에 그 책은 출간되지 못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알선으로 워싱턴에 있는 한 출판사에 찾아갔으나, 그 출판사는 출판비용을 스코필드에게 부담하라고 했다. 경제적인 이유로 보류한 뒤 여기저기 한 꼭지씩 발표해 나가던 중, 출판사에 맡겨둔 원고는 행방을 감추었다. 끝내 세상에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매우 마음 아픈 일이다. 


다행히, 세브란스 지하에 감춰두었던 원고를 파운드 박사가 발견하여 정대위(정 데비드)가 보관했다. 정 대위는 스코필드의 요청으로 스코필드 박사에게 넘겼지만, 박사는 작고하면서 다시 정 대위에게 원고를 보낸다. 


 여기서 나는, 작가도 아닌 의사가 그런 일을 해낸 것에 대해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도 무수히 많은 작가가 있었지만, 아무도 그 일을 해낸 사람이 없지 않은가? 자기 나라의 일을 외면했던 당시의 작가들에게 “무엇을 하셨냐?”고 물어야 할까?


두려움 없이 동정심을 전한 

다리가 불편한 천사


다리도 불편한 외국인 의사가 해낸 일–고개 숙일 일이다. 그러나 그가 그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세브란스 동료였던 이갑성의 영향도 컸으리라. 항상 카메라를 목에 걸고 다니며 사진 찍는 것을 즐기는 스코필드를 이갑성은 눈여겨 보아왔다. 이갑성이 찾아왔다. 1919년 3월 1일에 있을 거사를 카메라에 담아 외신에 알려주길 당부하려. “외국인이므로 일본의 감시와 제재에서 벗어날 것이고, 외국에 사진과 기사를 보내는 것도 수월할 것이다”라는 이갑성의 고견이었다. 의협심이 강한 스코필드는 종로, 광화문, 정동, 진고개(충무로) 등을 뛰어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일본 상점 2층에 몰래 올라가 사진을 찍다가 도둑으로 몰려 빗자루로 얻어맞기도 하면서……. 그가 찍어준 사진으로 인해 3·1만세 운동하던 현장의 모습이 사진과 기록으로 남겨질 수 있었다. 고마운 일이다. ‘그 일을 우리 한국 사람이 해냈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라 안 내국인보다, 외국인의 시선으로 더 정확히 포착할 수 있었을까?


그러면, 제암리 수촌리 화수리 환자들을 생각해 보자. 우리나라에도 그 당시 의사들이 있었을 텐데, 아무도 치료해주는 이 없는 그들을 치료해 준 건 캐나다 수의사였다. 일본의 탄압과 통제가 무서워서 우리 한국인들은 할 수 없는 일이었을까? “두려움”이 없는 수의사, “동정심”이 많은 수의사가 화성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며칠 동안 계속 화성에 내려가 그들을 치료해주었다. 물론 진료비는 한 푼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집이 모두 불타고 폐허가 되어 먹을 것이라곤, 들에서 따오는 산나물이 전부였다고 하니……. 하늘이 보낸 천사였을까? 다리가 불편한 천사. 그 당시 우리나라에 와있던 외국인 의사 선교사들도 많지 않았던가? 그 의사들은 그 일을 하지 않았다. 소아마비로 왼쪽 손과 오른쪽 다리가 마비된 스코필드만 그 일을 했다.   


필자 강소이 

서울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나와 교육대학원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했으며, 월간 <시문학>으로 시, <서울문학>에 수필로 등단했다. 한국시문학문회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국제협력위원으로 있다. 문단에 나와 시와 수필, 평론 등을 쓰며 문학의 지평을 넓혀왔던 필자는 최근 역사 유적지 여행을 정리한  『독립운동가 숨을 만나다 1, 2, 3권』을 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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