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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우리땅 [2022/04] 3·1만세운동의 성지 수원시 근대인문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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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중심 ‘대한독립의 길을 걷다’ 

 

성곽길 따라 만세 함성 들려오니 

일렁이는 봄바람에 심장이 뛰네   


글 | 편집부  사진 | 수원시 포토뱅크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워하는 아들 정조의 지극한 효심에서 만들어진 수원화성은 18세기 과학과 건축, 예술을 총망라한 독보적인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2백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은 성곽길을 걸으며 봄바람을 느끼고, 푸른 잔디에 앉아 햇살을 만끽하기에 더없이 좋은 힐링 명소로 이름 높다. 하지만 정조 시대와 현재 사이, 백여 년 전 이곳에서 아주 위대한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아는가! 서울이 아닌 지역으로는 최초로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곳이 수원이며, 그 만세가 처음 울려 퍼졌던 곳이 바로 수원화성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이었다는 사실을…. 바람결에 일렁이는 만세 함성이 우리 모두의 심장을 뛰게 하길 바라며, 성곽길을 따라 거닐어본다.  


수원시는 근대 역사와 문화의 향기가 가득한 인문기행 코스를 개발하는 데 오랫동안 공을 들여왔다. 4년간 이루어진 노력의 결실로 4개의 코스가 완성되었다. 첫 코스 ‘신작로, 근대를 걷다’는 교동권역을 중심으로 수원의 근대화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역사적 장소가 펼쳐진다. 두 번째 코스인 ‘대한독립의 길을 걷다’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던 수원지역 종교시설과 학교 등을 따라간다. 세 번째 코스 ‘사통팔달의 길을 걷다’는 수원천변을 따라 내려오며 일반 서민들의 삶의 터전이 된 우시장, 전통시장, 공구상가 등을 만날 수 있다. 마지막 코스인 ‘농업혁명의 길을 걷다’에는 근대 농업의 발자취가 담겼다.


특히 두 번째 코스는 나라를 빼앗겼던 암울한 시대의 흔적을 간직한 근대 건축물과 일제에 저항해 독립의 의지를 드높였던 민초들의 역사를 만날 수 있어 의미가 깊다. 수원화성을 중심으로 아름다운 풍경까지 펼쳐져 봄날 여행에 제격이다. 총 6㎞를 둘러보는 데 2시간 반가량 걸린다. 


첫 만세 함성 울린 

수원화성 방화수류정


첫 발걸음은 연무대(동장대)에서 시작한다. 220년 전 정조의 친위대인 장용영 군사들이 무예를 연마하던 훈련장으로, 넓디넓은 잔디밭을 바라보노라면 절로 마음이 탁 트인다. 지금은 연날리기, 활쏘기는 물론 하늘 높이 올라 수원화성을 내려다보는 헬륨 기구 ‘플라잉수원’ 등의 체험이 가능하다. 


더없이 평화로운 이곳 연무대에서는 백여 년 전 나라의 독립을 염원하는 민초들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수원 장날이었던 1919년 3월 16일, 서장대와 연무대에 수백 명이 모여 만세를 외치며 팔달문과 종로 방향으로 만세 시위를 이어갔다. 


연무대에서 10분가량 내려오면 ‘방화수류정’이라는 아름다운 정자가 있다.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방화수류정은 수원지역 만세운동이 처음 일어난 장소로 역사적 의미가 깊다. 1919년 3월 1일, 수원에서 나고 자라 서울로 유학한 지식 청년들을 주축으로 만세운동이 시작됐다. 서울과 동시에 만세운동이 펼쳐진 유일한 지역이 수원이었으며, 그 만세가 처음 울려 퍼졌던 곳이 바로 수원화성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이다. 


조국독립을 향한 뜨거운 함성이 울려 퍼졌던 방화수류정 일대는 백여 년이 지난 지금, 정자를 둘러싼 용연과 화홍문의 절경 덕분에 나들이 명소로 인기가 높다. 살며시 눈을 감으면, 바람결에 선열들의 함성이 들려오는 듯 가슴이 절로 뜨거워진다. 


수원천변 따라 

독립운동 발자취 가득


화홍문 방향으로 수원천을 따라가면 일제강점기 수원지역의 독립을 이끈 종교와 교육기관을 만나볼 수 있다. 


먼저 독특한 색과 디자인의 ‘수원동신교회’가 시선을 끈다. 한복을 입고 짚신을 신는 등 한국식으로 생활하며 선교 활동을 벌였던 노리마츠 마사야스가 1900년 8월 수원에 설립한 ‘성서강론소’가 110년 동안 이어져 왔다. 


조금 더 내려가면 아담스기념관이 나온다. 아담스기념관이 자리한 삼일학교는 수원 최초로 설립된 근대적 교육기관이자 민족학교다. 일제강점기 임면수 선생과 이하영 목사 등 수원의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을 위해 인재 양성이 절실하다는 데 공감하고 북감리교회(현 수원종로교회) 부설 학교로 ‘삼일학당’을 개교했다.


1905년 설립 당시 현 북수동의 초가집에서 남학생 11명과 여학생 3명으로 시작한 이래 1906년 삼일남학당과 삼일여학당로 분리하면서 여학생을 위한 근대교육도 최초로 시작했다. 삼일여학당은 훗날 매향학원으로 발전했다. 1909년에는 삼일학교로 교명을 변경했으며 1923년 아담스기념관 건립과 함께 현재 자리로 옮겨오면서 본격적인 근대교육의 산실이 되었다. 일제의 탄압 속에 교과서를 빼앗기기도 하고 3·1운동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학교 이름을 바꿔야 하는 등 숱한 시련을 이겨내며 수원 독립운동의 주춧돌 역할을 했다. 삼일중학교에는 일제강점기 학생운동에 대한 안내문 등을 찾아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소실된 종각을 2008년 복원한 여민각 맞은편에는 ‘수원종로교회’가 있다. 붉은 벽돌에 푸른 지붕이 돋보이는 건물은 수원의 아픈 역사와 격변의 시간을 함께 보냈다. 삼일여학교와 삼일학교 등 최초의 근대교육을 시작했고, 3·1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을 이끌었다. 


기생들의 만세 시위가 펼쳐진 

화성행궁


길을 건너면 ‘화성행궁’이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 현륭원으로 이장하면서 수원화성 성곽 축조(1794∼1796)와 함께 건립한 행궁이다. 재위 중 12년간 13차례나 내려와 머물렀을 정도로 애정이 각별했다고 전해진다. 화성행궁은 건립 당시 21개 건물 576칸 규모의 정궁 형태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 지금 모습은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도 훼손되지 않고 원형을 그대로 보존한 ‘낙남헌’과 ‘노래당’을 비롯해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었다는 ‘봉수당’, 후원의 소박한 정자 ‘미로한정’, 신하들과 업무를 논의했던 ‘유여택’ 등이 자리하고 있다.


백여 년 전 화성행궁 봉수당에서는 특별한 역사가 펼쳐졌다. 당시 일제는 민족말살정책으로 민족의 얼이 깃든 화성행궁을 무너뜨리며 식민지화를 위한 행정기구와 병원 등을 설치했는데, 그중 자혜의원을 1910년 화령전에 만들었다가 봉수당으로 옮겼다. 병원 역할을 했던 이곳에 수원 기생들은 한 달에 두 번 정기 건강검진을 받으러 가야 했다.


3월 29일, 당시 23세였던 김향화의 주도로 30여 명의 수원 기생들은 태극기를 만들어 화성행궁의 중심인 봉수당과 일제경찰서 앞에서 당당하게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의로운 기상을 떨쳐 보였다. 이 일로 김향화는 경찰에 붙잡혀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성벽을 따라가면 ‘3·1독립운동기념탑’과 ‘대한민국독립기념비’가 나란히 서 있다. 대한민국독립기념비는 만세운동을 탄압하다 처단된 일본 순사 노구치의 순국비를 해방 후 수원시민들이 깨뜨려 버리고 그 위에 세웠다. 특히 당시 학생과 시민의 성금으로 세워진 기념비가 수원의 중심에서 수원시민들의 일상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김세환 집터’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수원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김세환(1889~1945)이 살던 터다. 민족대표 48인 중 한 명인 김세환은 수원과 충청지역 만세운동을 이끌었고, 삼일여학교와 수원상업학교 등 교육자로서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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