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투고,기타 [2021/12] 독자투고 : 백암실기의 허구성과 박문용 의사 가족사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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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실기의 허구성과 박문용 의사 가족사의 진실
글 l 박경주(박문용 의사의 장손)
필자는 박문용 지사의 손자이자 [월간 순국] 애독자로서 2017년 12월호 월간 순국(통권 323호)에 게재된 내용 중 임진왜란 때 의병을 지낸 죽천 박광전 의병장 10대손 박문용 의사(독립장)와 그의 아내 임종순 여사의 집안사에 대한 행적은 정태화 의병의 독립운동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항임에도, 민망할 정도로 다수의 왜곡된 오류사항이 발견되어, 이에 대한 사실관계를 명확히 하여 바로 잡고자 본 원고를 투고한다.
백암실기 내용을 살펴보면 독립운동의 의미를 망각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조부 정태화 의병의 독립운동을 미화하려는 술책으로 보이며 매우 치졸한 생각으로 독립운동계에 치욕스러운 오점을 남기는 행태라 아니할 수 없다.
백암실기 중 박문용 집안사 오류
필자 정순권씨가 기술한 내용에 의하면, 박문용 의사의 며느리(정인묘)가 박문용 의사 제사일(1943. 7. 19) 전일(7월 17일)에 율어면 문양리 시댁을 갔으며, 그날 시어머니의 부정을 목격하고 이것을 이웃집 양촌댁에게 우물가에서 말하니 소문은 온 동네에 퍼졌다. 이 소문으로 인해 동네 창피해서 장남 박태장은 어머니 임종순을 모시고 1946년에 수원 고등동으로 이사했다는 내용이다. 이는 박문용 의사의 며느리 정인묘의 친정동생 정순식의 이야기를 듣고 아무런 확인도 하지 않고 여과 없이 기술한 것이 필자 정순권의 백암실기다.
박문용 가문의 오류에 대한
사실관계
당시 구한말에는 평균수명이 50세 안팎으로 이미 노인의 삶을 살던 임종순 여사는 큰아들 박태장이 보성읍 인쇄소에 다니고 있었으며 청년기에 들어선 둘째아들 태욱과 딸 옥이와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또한 다음날이 남편 박문용 의사의 제삿날로서, 바로 그 장소에서 부정한 일을 저질렀다는 내용은 보통사람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악의적인 사고이며 상상력으로 창작한 모략이 분명하다. 필자는 당시 사실관계를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설명한다.
임종순 여사의 가족이주 과정
임종순 여사의 생전 회고록에 의하면 1946년 9월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님이 동료 한분과 보성군 울어면 문양리를 방문하여 박문용 의사를 조문하였으며, 큰 아들 박태장에게 서울에 이주할 것을 타진하시고 두 아들의 취업을 알선해 주셨다. 얼마 후에 서울에서 전보가 왔고 김구 선생이 다녀가신 지 3개월 후 가세를 정리하여 수원시 인계동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동 사실만 보아도 백암실기에 기록된 내용이 얼마나 허구였는지 알 수 있다.
고부간의 갈등
임종순 여사는 남편을 잃고 담배를 배워 심신을 달래고 있었다. 동네 양촌댁이 임종순 여사의 며느리 정인묘에게 담배를 좀 달라는 부탁을 한 바 있고 이 말을 들은 정인묘는 시어머니의 담배 한 봉지를 몰래 준 사실이 있었다. 이 일이 있었던 후에 수다스러운 양촌댁이 시어머니인 임종순 여사에게 “며느리가 담배 7봉지를 주더라”고 부풀려서 고자질을 하였다. 이 한 마디만 보더라도 양촌댁이 얼마나 황당한 성품과 입담을 갖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이에 임 여사는 시어머니의 물건을 허락없이 주었다고 분노하셨고 사건이후 고부간의 갈등이 시작되었다고 정인묘의 둘째 딸 임숙은 어머니(정인묘)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임 여사의 평소 성품으로 볼 때 양촌댁과는 말조차 섞는 사이가 아닐 뿐 아니라 이 사건이후 더욱 불편한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수원으로 이사한 이후 점차 생활안정을 찾아 고등동에 가옥을 마련하자 객지생활이 두려워 함께 상경하지 않았던 며느리 정인묘는 딸 점숙과 함께 수원으로 합가하여 둘째 딸 임숙을 낳았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고부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어 며느리 정인묘는 결국 수원에서 생활을 못하고 두 딸과 함께 친정인 보성군 겸백면 도안리로 내려갔다. 정인묘의 고향생활은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며느리인 정인묘는 임 여사의 장손인 필자(박경주)를 만날 때마다 할머니 임종순 여사의 험담이 대화내용의 주된 소재였다.
백암실기가 [월간 순국]에 실린 이후 어머니 정인묘와 고난의 생활을 함께한 둘째딸 임숙은 어머니와 할머니간의 갈등으로 할머니에게 좋은 감정만 가질 수 없었음에도 할머니의 부정한 행적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며 그런 일이 있었다면 내가 모를 수 없는 사실이라며 일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0년경 6·25 동난으로 며느리 정인묘의 친정 큰 오빠가 수원으로 피신해 왔을 때도 보호해주었던 사실(백암실기)을 보더라도 임종순 여사의 인품을 알 수 있고 두 집안 간에는 상호존중과 호애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임종순 여사의 행적에 대해
1952년 임종순 여사의 장남 박태장은 부인 모경애와 아들 3형제를 낳아 서울에서 생활하였다. 임종순 여사는 손자인 필자(박경주)를 데리고 보성 고향을 방문할 때마다 친지들과 선영을 참배하고 죽천 박광전 할아버지의 청백전가 정신을 일깨워주셨으며 동네 어르신들을 만났을 때도 손자인 필자에게 빗길에서 큰절을 하게 하시는 등 유가적인 엄중함과 예의를 가르쳐주셨다.
아들 박태장(당시 40세)이 잘못한 일이 있었을 때 며느리 모경애와 아들 박경주(당시 3세)가 보는 앞에서 회초리를 드신 일도 있었고 친척집 새댁의 행실이 바르지 못할 경우에도 회초리를 드셨다고 한다. 또한 임종순 여사는 수원 고등동에 사실 때 팔달산 중턱에 움막을 짓고 혼자사는 불우한 할머니의 생계를 보살펴 주시고 비가 올때나 날씨가 추울때는 자신의 방에서 함께 기거하시는 등 많은 선행을 하셨다.
임종순 여사의 투철한 삶
남편 박문용 의사가 경성에서 독립운동을 할 당시 여자로서는 감당 못할 긴장의 순간들을 함께했던 임종순 여사는 독립운동을 함께 했을 뿐 아니라 일제 치하의 순사들이 칼로 위협하면서 남편 박문용의 행적을 추궁할 때도 “여자 하나 죽여서 나라가 망하겠느냐! 죽일테면 죽여라!”라고 일본순사에게 호통치셨던 민족정체성과 독립정신이 투철한 여장부이셨다. 이에 대한 입증은 1973년 임종순 여사와 손자 박경주가 독립운동가 박문용 의사의 행적에 대한 녹취록을 입수하여 보관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시골 작은 마을이나 일부 아낙네의 수다꾼들이 입담을 참지 못하고 독립운동가의 가족사를 허언으로 왜곡하고 모함함으로써 존경받아야 할 박문용 독립운동가에 치욕스러운 모욕을 초래한 것은 매우 유감스럽기 그지없다.
남편 박문용 의사가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피체되는 순간까지 독립의 희망을 함께한 완고한 인생의 삶을 살다가신 임종순 여사의 영전 앞에 다시는 이러한 치욕스러운 허구가 가득찬 독립운동사가 재현되지 않기를 바라며, 역사란 공정하고 정의로워야하며 진실을 말하여야 함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깨우쳐 주기를 기대한다.
제82주년 순국선열의 날 기념 백일장 대회 최우수상
당연한 삶의 의미
글 l 김서경(목포여상고 2년) 주최·광복회 전남도지부
우리에게 이토록 자유롭고 아름다운 땅을 이어준 이들은 몇몇은 글로, 몇몇은 사진으로, 목소리로 남아 그 이름을 역사에 새겼고, 미처 기록으로 남지 못한 이들 역시 우리는 지금 자랑스럽게 빛나는 이 땅과 우리의 미소로 그들을 기억한다.

개인의 삶을 영위할 기본적인 권리조차 보장해 줄 수 없고, 어린아이 일 적부터 사용하던 언어마저도 앗아가 잿빛이 된 땅에서도 자유를 외치는 삶의 무게를 나는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무지성으로 자유를 누리던 나는 그것이 쉽게 와닿지 않아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원하는 정보를 쉽게 발설하지 않고, 무장 폭력 앞에서도 태극기를 휘두르며 발을 뻗어간다는 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과연 무엇일지 궁금했다.
실질적인 고통을 눈앞에 두고도 함께 독립을 외친 동료와 일제의 협박을 저울질하지 않는 의지는 너무도 맹목적이고 뚜렷하게 보여서, 역사 속의 그들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닌 걸까 싶은 정도였다.
“쉽게 굴복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때로는 가족의 죽음을 목도해야 했을 것이고, 어떤 친구는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동료는 자신을 배신하고, 누군가는 도망치는 절망과 혼돈의 도가니에서 연대를 맺고 목적한 바를 이루고자 싸웠던 사람들은 얼마나 단단하고 놀라운 정신력을 가진 사람이었던 걸까. 각자의 방식으로 누군가는 글을 적고 총과 칼을 들고, 외치고, 학교를 세우고, 그렇게 손과 손을 잡아 서로 의지했다. 역사를 배우고, 그 시대를 살아간 시인의 글과 사진과 영상을 접하면서 생각했다.
그들이라고 두려움이 없었겠는가, 어쩌면 그들은 이 땅을 함께 딛고 섰던 그 자신들의 존재를 믿었던 게 아닐까, 비록 지쳐서 쓰러지고, 절망적인 사건이 잇달아 벌어져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고, 그를 보며 다시 몸을 일으켜 발을 뻗어갔던 것이 아닐까, 가족과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떠난 친구와, 자신을 배신해야 했지만 함께했던 동료들, 이 나라 조국을 사랑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서로는 그 무엇보다 강한 연료가 원동력이, 동기가, 의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 믿음 하나로 이 나라를 지킨 이들을 나는 깊숙이 존경하고 감사한다.
속 망토를 입고 초능력을 사용하는 이들만이 영웅은 아니다. 나는 이들을 ‘영웅’이라고 부르고 싶다. 손에서 빛과 얼음이 나오고, 무너지는 건물을 들어 올리는 괴력은 없지만, 그들은 이 나라 수천만 명의 삶을 지켰다.
지금은 우리에게 이토록 자유롭고 아름다운 땅을 이어준 이들은 몇몇은 글로, 몇몇은 사진으로, 목소리로 남아 그 이름을 역사에 새겼고, 미처 기록으로 남지 못한 이들 역시 우리는 지금 자랑스럽게 빛나는 이 땅과 우리의 미소로 그들을 기억한다.
고요하고 맑은 하늘, 그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비행기, 그곳에 타 희망을 품고 여행하는 사람들, 교복을 입은 학생과, 다양한 언론, 여가생활을 만끽하는 당연스럽던 삶이 지닌 의미를,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