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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 열전 [2021/08] 일제 판사 호령한 열여섯 소녀 곽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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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숭의여학교 만세운동 99년 만에 독립유공자 선정 


“일본에 반항하는 게 아닌 자유 원하기 때문”


글 | 이윤옥(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때는 일제강점기, 여기 한 가족이 있다. 남편과 부인 그리고 자녀들! 이들은 강탈당한 나라를 되찾고자 함께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친일 시인 서정주는 ‘광복이 그렇게 빨리 올 줄 몰랐다’고 했지만 진정한 독립운동가들에게 광복은 느리고 더딘 일이었다. 목숨이 위태로운 고비마다 일가(一家)는 일심동체로 서로를 위로하며 광복의 그날까지 질주했다. 그리고 맞이한 해방공간에서는 ‘독립유공자를 찾아 포상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맨 앞줄에 섰던 이들은 남성, 학식 있는 사람들, 직함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 뒤를 여성들이 이었다. 1962년,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 포상을 시작한 이래 2021년(3월 31일 현재)까지 남성은 16,143명, 여성은 526명이 서훈을 받았다. 남녀의 숫자 차이도 그렇지만 여성의 경우 유관순 열사 외에 그 이름 석 자를 댈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따라서 <월간 순국>을 통해 ‘알려지지 않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을 밝은 해 아래로 불러내 보고자 한다.


2018년 8·15 광복절을 맞아 국가보훈처는 25명의 여성독립운동가를 새롭게 독립유공자로 선정했는데 곽영선 지사(애족장, 추서)는 그 가운데 한 분이다. 곽 지사는 법정에서 “인도정의, 민족자결에 의해 조선인민의 인성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이며, 참여한 이유는 일본에 반항하는 게 아닌, 자유를 원하기 때문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해 일본인 판사를 당혹하게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곽영선 지사 자녀들, 

평양숭의여학교 출신 어머니 독립운동 사실 몰라


“어머님(곽영선 지사)은 여장부셨습니다. 평양숭의여학교 시절 만 열여섯 살 나이에 만세운동에 참여하신 그 정신을 평생 지니고 사셨지만 딸들에게는 크게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님은 평생 아버님과 함께 이웃을 챙기고 베푸는 삶을 사셨습니다. 아버님이 의사였지만 돌아가셨을 때는 무료 진료하신 외상 장부 40권만 남기고 돌아가셨을 정도였으니까요.”


이는 곽영선(1902년 3월 1일~1980년 4월 8일) 지사의 따님인 장금실(80세) 여사의 말이다. 2018년 8·15 광복절을 맞아 국가보훈처는 25명의 여성독립운동가를 새롭게 독립유공자로 선정했는데 곽영선 지사(애족장, 추서)는 그 가운데 한 분이다. 필자는 2018년 9월 20일 낮 2시 무렵 경기도 광주에 살고 있는 곽영선 지사의 따님인 장금실 여사를 만났다. 약속 시간에 맞춰 찾아간 장금실 여사 댁은 창문 너머로 지리산을 떠올리게 하는 푸른 숲이 가득한 조용한 아파트였다. 이곳에 미리 와서 기다리던 동생 장연실(76세) 여사와 셋이서 마주앉은 필자는 99년 전 어머니 곽영선 지사의 평양숭의여학교 시절을 시작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만세운동 99년 만에 독립유공자 포상에 감격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1980년입니다. 아버지가 그 1년 뒤에 돌아가셨지요. 그때만 해도 우리는 어머니가 독립운동한 사실이 ‘훈장’을 받을 일이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38년 만인 올해서야 독립유공자 훈장을 받게 된 것이지요.”

팔순에 이르는 두 자매는 뒤늦게 국가로부터 받은 ‘훈장증’을 바라다보며 몹시 감격스러워했다. 하지만 이조차도 사실은 ‘국가에서 알아서 발굴하여 포상한 게 아니라’ 장금실 여사의 아들(전태섭 씨), 그러니까 곽영선 지사의 손자가 수많은 증빙자료를 갖춰서야 가능했다고 했다. 똑똑한 손자가 아니었다면 팔순의 두 자매가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을 성싶다. 곽영선 지사는 남편 장우근 선생과의 사이에 모두 2남 5녀를 두었는데 이날 필자가 만난 분은 장금실(80세), 장연실(76세) 자매였다.


국가 발굴로 포상한 게 아니라 

곽영선 지사 손자가 발품 팔아 신청한 것


“사실 저는 조카가 할머니(곽영선 지사)를 독립유공자로 신청한다고 동분서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언니에게 ‘복잡하게 뭘 그런 고생을 하냐’고 말했던 적이 있어요. 그러나 조카가 아니었다면 어머니가 어린나이에 목숨을 걸고 만세운동에 참여해서 1년여의 징역을 살고 나온 사실을 세상 사람들은 까마득히 몰랐을 거예요. 조카의 노력이 큽니다.” 


곽영선 지사의 둘째따님인 장연실 여사의 말이다. 어머니(곽영선 지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팔순에 이르는 두 자매의 눈시울이 붉어짐을 느꼈다. 순간 부끄러움도 치솟았다. 만세운동 99년만의 포상이라니… 우리는 왜 이렇게 모든 것이 늦고 지지부진했던 것일까? 특히 여성독립운동가들의 발굴이 뒷전으로 밀려났던 사실이 못내 안타까웠다. 곽영선 지사가 살아생전에 이 찬란한 ‘훈장증’을 품에 안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움이 크다.


일제 판사 앞에서 당당한 일침 가해


곽영선 지사는 만 열여섯 나이인 1919년 3월 24일, 평양숭의여학교 재학 중에 태극기를 만들어 3월 27일, 고향인 황해도 신천읍 장터 만세시위에 뛰어들었다. 이 일로 2년형을 언도받았으나 상급심에서 8개월을 선고받고 1년여의 수감생활을 했다. 이때 곽영선 지사는 법정에서 “인도정의, 민족자결에 의해 조선인민의 인성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이며, 참여한 이유는 일본에 반항하는 게 아닌, 자유를 원하기 때문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해 일본인 판사를 당혹하게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평양숭의여학교는 이화여학교, 배화여학교, 정신여학교 등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여성근대교육기관으로 신사참배 거부 등 항일운동을 실천한 기독교계 민족 교육기관이었다. 


특히 평양숭의여학교는 독립운동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할 정도로 평양사범학교, 광성학교, 평양고등보통학교 등과 더불어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1913년 평양숭의여학교의 교사였던 황애시덕, 김경희, 박현숙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송죽결사대는 숭의여학교를 항일민족 교육의 성지로 자리매김하였으며 곽영선 지사 역시 선배들의 투철한 항일정신을 새기며 민족의 거사인 3.1만세운동에 앞장섰던 것이다.


아버지 곽임대 선생, 

미국에서 비행사 양성소 설립 등 57년간 독립운동


한편, 곽영선 지사의 아버지 곽임대(다른 이름 곽태종, 1885~1971) 선생 역시 독립운동가다. 


“외할아버지는 미국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제2인자로 활약하신 분입니다. 외할머니는 안중근 지사의 5촌 고모인 안태희 여사이십니다. 외할아버지는 국내에서 활동하시다가 미국으로 건너가서 흥사단에 가입하여 큰 활약을 하셨고 1920년 캘리포니아 윌로스지방에서 노백린 장군이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할 때 관여하는 등 57년간 미주에서 혁혁한 독립운동을 하신 분입니다. 이후 57년간 가족들은 외할아버지와 떨어져서 사셨던 것입니다.”


곽영선 지사의 두 따님은 외할아버지의 미주 활동을 어제 본 듯이 생생하게 증언했다. 곽영선 지사 나이 12세 때 아버지가 미국으로 독립운동을 떠나고 나서 고국에 남은 가족들의 생활고는 묻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 남겨진 가족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백범 김구 선생의 어머니인 곽낙원 지사가 상해 뒷골목에서 배추 시래기를 주워 생활을 연명하다 생활고에 시달려 두 손자를 데리고 귀국길에 올랐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이 시기 독립운동가 가족들이 겪어야했던 궁핍과 가족 간의 헤어짐의 역사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처럼 망국의 한을 안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집안치고 온 가족이 한 곳에서 함께 정상적인 생활을 이어간 집은 많지 않다. 


홀로 남은 어머니, 딸들 교육에 혼신의 힘 기울여


가장인 남편이 홀로 독립운동 최전선지에서 뛰게 되면 가족은 따로 남아 생활고를 해결해야 한다. 이때 어머니인 여성은 가장 아닌 가장으로 생계와 자녀양육을 도맡았으며 본인 역시도 여러 애국단체를 만들어 독립운동에 적극 뛰어들었던 것이 당시 ‘독립운동가’ 집안의 전형적인 모델이었다. 곽영선 지사 집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열악한 환경에서 곽영선 지사의 어머니인 안태희 여사는 딸들의 교육에 전념하게 된다. 곽영선 지사는 여자도 배워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던 어머니 밑에서 평양숭의여학교에 다닐 수 있었으며 이곳에서 조국 독립을 위한 만세운동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곽영선 지사의 아버지 곽임대 선생은 황해도 신천 출신으로 일찍이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나온 지식인이었다. 1909년 평북 선천에 있는 신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 1911년 11월, 조선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 암살미수사건(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일제가 조작한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뒤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갔다. 


“1970년 6월 17일, 나는 57년 만에 그리던 고국에 돌아왔다. 와 보니 내 조국은 말 그대로 상전벽해가 된 느낌이요, 마치 외국에 온 듯한 느낌을 맛보게 했다. 말을 절반 밖에 못 알아들을 정도로 모든 게 격변하여 내 자신이 이방인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자녀들이 여기에 있고, 어언 환갑을 맞은 흥사단도 건재해 있으므로 차츰 정이 들어 비교적 화평한 말년을 보내게 된 것을 하느님께 늘 감사드리고 있다.” 

- 재미투쟁반세기사 《못잊어 화려강산》

(곽임대 지음) 가운데 


여학생들이 저항하며 

피 흘려 되찾은 나라임을 잊지 말길


곽영선 지사는 2018년 73주년 광복절에 애족장(추서)을 받음으로써 미국에서 큰 활약을 한 곽임대(1993년 애국장 추서) 선생의 따님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어머니의 고귀한 독립운동이 3·1운동 99주년을 1년 앞둔 올해서야(2018년) 인정받게 되어 기쁩니다. 살아생전에 어머니께서 훈장증을 받으셨더라면… 여학생들이 저항하며 피 흘려 되찾은 나라가 대한민국임을 기억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라고 말하는 두 따님 장금실, 장연실 자매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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