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순국선열 [2021/09] 건국훈장 대통령장│이인영(李麟榮)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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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진공작전 진두지휘
13도 연합의병부대 총대장의 목숨 건 혈전
글 | 편집부
동포들이여! 우리는 함께 뭉쳐 우리의 조국을 위해 헌신하여 우리의 독립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야만 일본제국의 잘못과 광란에 대해서 전 세계에 호소해야 한다. 간교하고 잔인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인류의 적이요, 진보의 적이다. 우리는 모두 일본놈들과 그들의 첩자, 그들의 동맹인과 야만스런 제국주의 군인을 모조리 죽이는 데 힘을 다해야 한다.
-대한관동창의대장 이인영
핵심공적

13도창의군을 조직해 일제로부터 서울을 탈환할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한 서울진공작전을 추진했다.
주요약력
● 1868년 9월 23일 경기도 여주 출생
● 1895년 여주의병 거의
● 1907년 13도 창의대진소 의병 총대장
● 1908년 서울 탈환작전 개시
● 1909년 8월 13일 경성 감옥에서 사형,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문인들의 신망 받던 청년
단발령 소식에 의병 일으켜
1868년 9월 23일 경기도 여주군 군북면 교곡동에서 4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높은 학문적 성취로 전국의 많은 문인들이 그를 칭송했다. 27살 때인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살해해 사람들의 분노가 높은 가운데 그 다음달에 내려진 단발령은 전국의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는 도화선이 됐다.

단발령 소식을 들은 이인영 선생은 여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5백여 명을 규합해 춘천과 양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시작한다. 하지만 유생이 주도가 된 의병의 전투력으로는 관군과 일본군을 당해내기 어려웠고 1896년 여름 광무황제로부터 해산령이 내려지면서 이인영 선생은 의병을 해산하고 경상북도 문경 산중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일제가 헤이그 특사를 빌미로 광무황제를 폐위하자 전국에서 다시 의병이 일어났다. 강제 해산된 대한제국군 출신이 속속 의병에 참여하면서 예전의 의병전쟁과는 양상이 사뭇 달라졌다. 유생들로 조직되어 전투 경험이 부족해 고전을 면치 못했던 예전과 달리 해산군인들이 참여하면서 실전 능력이 상당히 올랐던 것이다.
병든 부친에 작별인사 후
관동창의군 대장이 되다
이때 강원도 원주에서 의병 2천여 명을 일으킨 이은찬, 이구채 등이 선생을 지휘자로 모시기 위해 찾아와 간곡히 권유하였으나 부친의 병이 깊을 때여서 쉽게 허락하지 못했다. 이은찬은 “이 천붕지복(天崩地覆)의 날을 당하여 국가의 일이 급하고 부자의 은(恩)이 경한데 어찌 자자로서 공사를 미루리오”라며 4일 밤낮을 가리지 않으며 선생의 결단을 촉구하자 1907년 7월 25일 선생은 마침내 이를 허락한다. 언제 돌아가실 줄 모르는 부친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즉시 원주로 가 의병원수부를 설치한 뒤 관동창의대장이 되었다.
이인영 선생은 곧 곳곳에 격문을 보내 “일제는 인류의 적이므로 분쇄해 조국의 국권을 찾자”고 호소했고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도 통문을 보냈다. 특히 「고재상항동포(告在桑港同胞)」라고 쓰여진 격문은 1908년 3월 2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 전명운 의사가 친일 미국인 스티븐슨을 저격하는 데 결정적인 동기가 됐다.
국내외에 배포된 격문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구국의지를 불태우게 했으며 사람들은 이 격문에 감동해 의병에 참가했다. 선생은 이때부터 1907년 11월까지 원주, 철원 등 강원지역에서 38차례나 일군과 교전했다.
13도 연합의병 총대장으로 추대
2천여 명 의병 이끌고 서울 진격

이인영 선생은 지방에서 일군과 싸워도 서울을 장악하고 있는 일제를 몰아내지 않으면 국권회복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때 이은찬이 전국의 의병을 모으자고 권유한다. 선생은 각자 싸우기보다는 대규모 연합의병부대로 편성하여 통일된 지휘 아래 서울로 진격하여 일거에 일군을 패퇴시키려는 계획을 수립한다. 1907년 11월 각 의병대장에게 경기도 양주로 집결할 것을 촉구하고 13도 창의대진소원수부(13道 倡義大陣所元帥府)를 설치했다. 그리고 모인 의병장들은 만장일치로 이인영 선생을 총대장에 추대했다.
서울 진격일을 12월 말(음력)로 정한 선생은 예하 의병대장들에게 경기 양주군 수택리 일대에 진주토록 하고 각 의병진에서 결사대원 3백여 명을 선발한다. 공격개시에 앞서 김세영에게 격문원고를 작성하고 서울에서 인쇄해 서울주재 각국 영사관에 전달하도록 지시했다.
선생은 이 격문에서 을사늑약의 폐지와 13도 창의대진소를 교전단체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한 뒤 2천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이때 이미 일군은 수천 명의 보병과 기마병으로 망우리 일대 군사요충지를 선점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무기·병력 열세로 일제에 패배
부친 사망소식 이어 교수형 선고
결사대원이 앞장서 싸웠음에도 빈약한 화승총으로는 기관총과 잘 훈련된 군대를 이기기는 힘들었다. 설상가상으로 각도 의병들은 일본군에게 막혀 시간 안에 도착하지 못해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이게 됐다.
이인영 선생은 의병대에 후퇴명령을 내리고 진영을 재정비할 무렵, 1907년 12월 25일(음력) 부친의 사망소식을 접하게 된다. 선생은 아들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일 등을 통곡하며 자책한 후 허위에게 군무를 위탁하고 총대장직을 사임한다. 하지만 1908년 5월 14일 포천 영평에서 허위가 사로잡히는 바람에 서울 공략계획은 이로써 무산됐다.
선생은 이후 시영(時榮)으로 이름을 바꾸고 경상북도 상주에서 노모를 모시고 살며 삼년상이 끝나는 대로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부친의 묘를 성묘하는 것이 단서가 돼 1909년 6월 7일 충북 황간 금계동에서 일본군 헌병에게 붙잡혔다.
선생의 마지막 소원은 일왕과 만나 담판을 짓는 것이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1909년 8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고 그해 9월 20일, 42세의 나이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