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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2021/09]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유관순(柳寬順) 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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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 꽃다운 나이로 순국

3·1만세항쟁의 뜨거운 선구자


글 | 편집부 


살아서 독립기 하에 활발한 신국민이 되어 보고 죽어서 구천지하에 이러한 여러 선생을 쫓아 수괴함이 없이 즐겁게 모시는 것이 우리의 제일 의무가 아닌가. 간장에서 솟는 눈물과 충곡에서 나오는 단심으로써 우리 사랑하는 대한 동포에게 엎드려 고하노니 동포! 동포여! 때는 두 번 이르지 아니하고 일은 지나면 못하나니 속히 분발할지어다.

-­ ‘대한독립여자선언서’ 중에서­


핵심공적

3·1만세항쟁에 참여하고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추진했다. 감옥 안에서도 지속적인 만세투쟁을 벌였다.


주요약력

● 1902년 11월 17일(음력)  충청남도 천안 출생

● 1919년 이화학당 학생으로 서울의 만세시위참여,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주도

● 1920년 옥중에서 3·1운동 1주년 만세 항쟁

● 1920년 9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중 순국

● 201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민족주의자였던 아버지의 가르침 

이화학당 장학생으로 입학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1월 17일(음력) 충청남도 천안에서 5남매 가운데 둘째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열사는 부친으로부터 민족의식을 가르침 받았으며, 개화와 신교육의 시대 분위기 속에서 자유와 인권의식에 눈뜨게 되었다.  


유관순 열사의 숙부를 비롯한 지령지 동리민이 일찍이 기독교 감리회로 개종하여 교육구국운동, 국채보상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하였다. 열사 또한 어려서부터 감리교에 입교하고 신교육의 분위기에서 자라났다. 

               

유관순 열사는 감리교 여선교사 제이 헴몬드 샤프 여사의 주선으로 1915년경 이화학당의 보통과에 교비생(장학생)으로 입학하여 1918년 봄 고등과로 진학하였다. 프라이 교장의 보살핌 속에 선진 학문을 공부할 수 있었고, 또 먼저 입학한 사촌언니 유예도의 주선으로 금세 선·후배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1918년 1월 8일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연합국 측을 대표한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전후처리 지침으로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천명했다. 그해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이 공식적으로 종전되고, 다음해 1월부터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독립을 염원하는 사람들은 이 기회를 그냥 넘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시위 결사대 조직, 만세시위 참가 맹세


중국 상해에서는 신한청년당, 일본 동경에서는 조선유학생학우회를 중심으로 국내외 동포들은 한국 민족이 대동단결하여 민족독립을 요구하면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고 하는 기대감 속에서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하고 있었다. 


국내에서도 거족적인 독립운동이 전개돼 천도교, 기독교, 불교, 학생이 참여한 민족대연합전선이 구축됐다. 민족대표들은 같은 행동을 취하고 일제에 체포되더라도 그동안의 경과를 정정당당히 밝힐 것 등을 결의하였다.


유관순 열사는 3·1운동 추진 계획을 이화학당 내의 비밀결사인 이문회 선배들을 통해 듣고 있었다. 그래서 열사는 3·1운동이 일어나기 전날 동기들과 시위 결사대를 조직, 만세시위에 참가하기로 맹세했다. 드디어 3월 1일 탑골공원을 나온 만세 시위대가 학교 앞을 지날 때 프라이 교장이 만류했으나, 뿌리치고 뒷담을 넘어 시위운동에 동참했다. 


일제는 학생들이 3·1운동에 대거 참여하고 학교가 만세 시위운동의 추진 기지가 되자 3월 10일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대한 임시휴교령을 내렸다. 학교가 문을 닫자 열사는 고향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실행하기로 마음먹고 집으로 돌아간다.


아우내 장터에서 울려 퍼진 대한독립만세


집에 온 유관순 열사는 동네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서울의 3·1운동 소식을 전하고 만세 시위운동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부친의 주선으로 조인원과 이백하 등 20여 명의 동네 유지들과 상의해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날 정오에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거사 당일에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태극기를 직접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


아우내 장날, 열사는 장터 어귀에서 밤새 만든 태극기를 나누어 주면서 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러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정오가 되자 장터 한가운데서 연설을 해 사람들의 애국심을 불태우고 이어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열사를 필두로 3천여 명의 군중들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기를 앞세우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시위 대열이 아우내 장터 곳곳을 누비자 헌병들이 달려와 총검을 휘두르며 만세 시위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하여, 이때 열사의 부친과 모친이 일본 헌병들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에 열사의 숙부인 유중무와 함께 조인원, 조병호 부자, 김용이 등의 사람들이 열사의 부친 시신을 둘러메고 병천 헌병주재소에 몰려가 항의 시위를 계속했다. 


감옥에서도 꺾지 못했던 

대한독립에 대한 의지


시위 군중들은 헌병들이 강탈했던 태극기를 도로 빼앗아 항의했는데 이에 헌병들은 재차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시위 군중들을 해산시켰다. 그 후 유관순 열사와 유중무, 조인원, 조병호 부자 등 시위 주동자들을 체포해 천안헌병대로 압송했다.


열사는 천안헌병대에서 갖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시위 주동자라고 말하면서 죄 없는 다른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호통치기까지 했다. 공주감옥으로 이송된 열사는 공주 영명학교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잡혀 온 오빠 유관옥을 만나게 된다.

법정에 선 열사는 기개를 잃지 않고 “나는 한국 사람이다. 너희는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너희다”라고 호통치며 일제의 재판을 거부했다. 유관순 열사는 공주재판소에서 5년형을 받고 항소하여 서울복심법원에서 3년형으로 감형되었다.


유관순 열사는 감옥 안에서의 온갖 탄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만세를 불렀다. 3·1운동 1주년을 맞이해서 수감 중인 동지들과 함께 대대적인 옥중 만세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서대문감옥 지하 감방에서 무자비한 고문을 당한 끝에 결국 1920년 9월 28일, 열여덟 살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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